비범하게, 화려하게
후베이성 도독부.
평소에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
그러나 오늘만큼은 사교 파티라도 열린 것처럼 소란스럽다.
소동의 주인공은 쑨원이다.
사업가들을 잔뜩 대동하고 여기가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떠들어댄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터진 총성 한 발로 신해혁명이 시작된 거라오. 그 총성으로 촉발된 봉기가 실패하였더라면 중화민국의 역사는 십년은 늦추어졌을 테니, 그야말로 천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소."
네가 했냐? 내가 했지.
내가 소총 들고 땅바닥을 구를 때 미국의 2층집 발코니에서 홍차나 타 먹던 인간이 마치 자기 손으로 혁명을 일궈낸 것처럼 떠든다.
쑨원과 동반한 자는 중국인 사업가들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푸른 눈의 백인이 많았다.
그 때문에 쑨원의 중국말은 빠르게 영어로 동시 통역되고 있었다.
통역가는 젊은 여인이었는데 유창한 발음과 대조되게 표정은 쌀쌀하였다.
처음 쑨원의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선거 관련하여 국민당의 당수 자격으로 회담을 제안해 오는 건가 긴장했었는데.
정작 나타난 쑨원은 얼굴이 완전히 풀려있었다.
선거 따위는 하든 말든 관심도 없는 모습.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서 사업가들과 와인을 나누며 낄낄댈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통역을 하는 여인을 바라보는데 눈깔이 희번득한게 속마음이 다 들여다보였다.
혁명파와 북양파가 청 황제의 폐위에 동의한 후 베이징에서는 감투 잔치가 벌어졌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리위안훙은 부총통.
그 외에 내각과 지방관들 자리까지 철저히 공적에 따라 분배되었건만.
혁명파의 수장이던 쑨원은 돌연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청조가 몰락하고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자신의 과업은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직 사십 대의 창창한 나이.
주변 인물들이 그를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쑨원은 전국철로 총판에 임명되었다.
정부 요직은 거절해도 철도책임자 자리는 마음에 든 모양.
호기롭게 외치기도 했다.
"철도는 마치 인체의 혈관과 같으니 앞으로 10년 안에 전국에 10만 킬로미터의 철로를 깔겠소! 중국은 천하제일의 부국으로 다시 우뚝 설 것이오!"
물론 1860년에 첫 선로가 놓인 이후 지난 50년 동안 깔린 철도의 총길이가 채 1만 킬로미터가 되지 않았으니.
그의 호언장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쑹자오런은 쑨원의 발언을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쑨 선생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지키지 못 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10년 정도 경험을 쌓으면 그때는 중책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쑹자오런의 나이가 쑨원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것을 감안하면 상황 자체가 코미디였다.
철로 총판으로 부임한 쑨원은 그간 전국을 순회하며 철도 놓을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후베이성에 온 것이었다.
사업가들과 떠들던 쑨원이 내 쪽을 보고 외쳤다.
"도독! 이리로 와 보시오."
마치 아랫사람을 부리는 말투였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다가갔다.
혁명파에서 쑨원의 위치는 독특한 데가 있어 중년의 나이에 벌써 원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쑨원이 큼지막한 지도를 쓱 펼쳐보였다.
"이것이 전국철로계획이오. 이 계획대로면 3년 안에 우한3진은 난징과 항저우, 시안, 하노이와 모두 연결될 거요. 어떻소?"
어떠냐고?
이건 철도망 구축계획이라기보다는 초등학생이 제출한 숙제같은데.
행정구역과 성도만을 표시한 백지도.
검은 먹으로 찍찍 그어진 줄은 지형을 뭣 하러 고려하냐는 듯 정직하게 뻗어있다.
성도와 성도를 잇는 간선(幹線)은 그렇다 쳐도.
부속 도시를 잇는 지선(支線)까지 뻣뻣한 건 너무한데?
차라리 한두군데가 이상했으면 지적했을지도 모르는데.
총체적 난국을 눈앞에 두니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뭐. 좋군요."
"당연히 그래야지. 후베이성은 중국의 가운데에 있소. 그 말은 곧 상하좌우로 거미줄처럼 철도가 연결되어 교통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거요. "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도독은 앞으로 철도 총책임자인 나에게 잘 보여야 할거요. 장차 후베이성 교통의 향방이 내 손에 달렸으니. 하하!"
쑨원의 수다는 끝나지 않아 사업가들을 앞에 두고 장밋빛 전망을 좔좔 쏟아내었다.
하지만 사업가들은 누가 보아도 지루한 기색.
철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 코쟁이가 은근슬쩍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영어가 자유로운 쑨원에게 바로 물어왔다.
"중국에 얼마 안 있어 국회의원 총선거가 열린다더군요. 맞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소."
"쑨얏센께서는 국민당의 대표시니 참으로 바쁘시겠습니다."
"나는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당의 행사에는 손을 뗀 지 오래라오."
"그래도 국민당의 일원으로 뭐라도 하는 일이···."
"없소. 하하, 아무런 실권조차 없다오. 선거에 관한 모든 제반사항은 국민당 선거본부에서 관할하지. 자, 다른 얘기는 그만하고 다시 철도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여기 우창과 난창을 이으면···."
사업가는 실망한 눈치였다.
마치 친구가 밥 사준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편의점 삼각김밥을 대접받은 표정이랄까.
쑨원의 장광설을 이기지 못한 사업가들이 하나둘씩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종래에는 쑨원과 그의 고문 몇사람, 그리고 통역만이 남았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심지가 굳은 것인지.
쑨원은 사업가들이 모두 떠났음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이제야 도독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구려. 방에 들어가 이야기하시겠소?"
"예."
허나 독대라는 말과 달리 쑨원은 통역을 대동한 채 방에 들어왔다.
나는 특별히 그 점을 지목하진 않았으나 쑨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친구는 신경 쓰지 마시오. 통역뿐 아니라 업무 전반에 걸쳐 일을 도와주는 비서요."
"예."
"그래서. 최근 후베이성의 발전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더구려."
"예."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성과를 일구어내다니. 베이징의 회의에서 도독의 인사를 반대했던 이 사람이 부끄러워지더이다."
"예."
대놓고 단답으로만 일관하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심지가 굳은 건지?
쑨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특히 한족의 민족자본을 바탕으로 외국은행을 몰아낸 한양은행의 공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소. 나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오. 한양은행에 얼마간 예금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 중이라오."
"한양은행은 아직 기업만을 고객으로 운영하니, 일반 개인의 여수신 업무가 이루어지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군! 오히려 듣기 좋은 소리요. 오늘 내가 온 이유가 기업의 일이라오."
"뭡니까?"
쑨원이 좀전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나는 최우선 순위로 한커우에서 난징을 잇는 한징철도(漢京支線)를 계획 중에 있소."
"예."
"이 철도는 후베이성에도 커다란 이득이 될 터이니 자금을 좀 투자해주길 바라오."
"제가 알기론 이번 철로 계획은 중앙 정부의 것이고 거기서 예산이 나올 텐데요."
"예산은 항상 부족하다오."
"아까 사업가들은요?"
"물론 그들도 지원할 예정이오. 그러나 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이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오."
글쎄다. 아까 만난 사업가들.
죄다 상하이의 천치메이를 만나러 간 거 같던데.
"지방 정부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한커우 전투가 바로 작년이었습니다."
"한양은행이 있지 않소."
"한양은행은 민간의 상업은행입니다."
"하지만 후베이성의 은행이잖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철로계획은 온 중화인들의 염원이자 바램이며, 중국을 천하제일국가로 우뚝 세울 이정표가 될 거요. 도독이 마땅히 사정을 설명하면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한양은행이 어찌 도리를 저버리겠소."
확실히 알겠다.
아무리 보아도 심지가 굳은 건 아니다.
그저 대가리가 꽃밭인 거다. 현실 감각 따윈 안드로메다로 날리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떠들어댈 뿐이다.
"한양은행의 차관 조건은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에게 대출받으려면 적어도 붓으로 그린 지도 한장 보다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져가야 될 겁니다."
"하하. 물론 그렇지. 계획이야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 걱정할 것 없소."
"···그럼 철도 공사는 어느 기업에서 착수할 예정입니까?"
"돈만 있으면 일할 기업이야 많소."
"철도를 까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수년에 걸쳐 자재와 노동자를 꾸준히 공급할 수 있는 여력, 근처 주민들의 동의를 얻을 소통 능력, 모래바람이 불거나 폭풍우가 쏟아져도 망가지지 않을 만한 철로 건설 기술까지. 이 모든 것들을 갖추어야 합니다."
쑨원은 심드렁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내가 그것도 생각 안 했을 것 같소?"
"그래서 묻는 겁니다. 계획에 따르면 한커우와 난징이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지형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철로를 건설할 것인지를요."
"그거야 기술자들이 할 일이지. 내 일은 아니오."
공밀레를 찾는 거야? 이래서 첫 삽이나 뜰 수 있겠어?
후베이성을 교통 허브로 두는 철로 건설은 당연히 환영이지만 쑨원이 철도 총책임자인 이상 난항이 예상된다.
이 사업에 돈을 투자할 바에야 러시아에서 통째로 열차를 사 오는 게 낫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 어쨌건 후베이성 정부에서 도와드릴 일은 없는 것 같군요. 차관이 필요하면 한양은행에 가보길 바랍니다."
"도독."
"예?"
"흠···. 동맹회에서 그토록 도독의 출신 성분을 두고 물고 늘어질 때 나는 도독의 편을 들어주었소. 조선인이 중국의 이익을 바랄 리 없다는 이간질에도 나는 한 도독이 중화의 가치 아래 함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소."
"감사한 말씀이네요."
"하지만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나 또한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소."
할 일은 더럽게 쌓였는데 헛소리를 더 들어줄 여유 따윈 없다.
나도 이제 거물이라고!
"얘기는 끝났습니다. 계시든지 떠나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 부하들을 괴롭히진 마십시오. 다들 업무가 바쁘니."
축객령을 내리고 돌아서려는데.
"방금 발언. 사과하세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메모에만 열중이던 비서가 돌연 입을 열었다.
쑨원도 의외였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내게 말한 거요?"
"그럼, 여기 도독님 말고 누가 있나요?"
"나는 지금껏 쑨 선생님과 독대 중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환청이 들려오길래 놀랐소."
"도독님이 멋대로 대화를 끝마쳤으니 이제부터는 독대가 아닌 셈이지요. 그러면 제게도 말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인.
쑨원의 옆에서 당돌하게 재잘대는 그녀의 정체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 말해보시오. 내가 왜 사과해야 한다는 거요?"
"쑨 선생님은 도독님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수십 년간 힘써오신 분이에요. 도독님은 운 좋게 신해혁명의 열차에 탑승하여 높은 자리까지 오르셨지만 그러한 결실을 맺기 위해 중국동맹회가 암중에서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요? 쑨 선생님의 자기희생은 예수와도 같은 고귀한 것. 중화민국의 모든 신민에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요."
절로 실소가 나왔다.
"운이 좋았다라."
"앗, 그 말은 제 실언이에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해드리지요. 그리고 쑨 선생님께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간 격무에 시달리느라 저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군요. 혁명파의 대총통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쑨원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괜찮소."
완전히 몰입하여 비서를 쳐다보는 쑨원.
근데 눈은 왜 그렇게 그윽한데?
"그래도 도독님은 참으로 담대하신 편이에요."
말문이 터졌는지 그녀가 조잘거렸다.
"내가 담대하오?"
"예.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지금처럼 따진 적이 있었는데, 사과를 받기까지 8분이 걸렸죠. 도독님께서는 3분 만에 사과하셨으니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대범하신 거예요."
쑨원이 말했다.
"됐다. 그만 이동해야겠으니 너는 나가서 열차 편을 알아보거라."
"네."
비서가 나가자 쑨원이 날 보고 친근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철도 차관 문제로 얼굴을 붉혔던 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저 아이 어떻소?"
"다부지네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다오. 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으면 무척 수줍어하지."
"아, 네."
쑨원이 헤벌쭉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들끼리 은밀한 비밀을 공유할 때의 어색한 웃음.
애초에 철도 따윈 쑨원에게 그저 유흥거리다. 진지하게 고민한적 조차 없을 거다.
"나는 저 아이랑 결혼할 거라오."
"딸뻘이잖습니까."
"알고 있소. 그래도 결혼할 거요."
"부인은요?"
"이혼하면 되오."
쓰레기 같은 소리를 맑은 눈으로 진지하게 지껄이는 쑨원.
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 금지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름은 뭡니까?"
"쑹아이링(宋藹齡). 쑹아이링이라고 하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 자매의 맏언니가 바로 쑹아이링이었다.
***
같은 시각.
쑹아이링은 열차 편을 알아보러 가기는커녕.
쑨원과 한신이 같이 있는 집무실 바로 앞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벌써 도독이라니. 얼굴도 멀쩡하고···. 말하는 것도 똘똘하고···.'
쑹아이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남편감을 어디 가서 구하겠어? 내가 어렵더라도 내 동생들이 있으니. 꼬셔야 돼. 무조건 꼬셔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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