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하게, 화려하게2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쑨원이 나올 때까지 쑹아이링은 잠자코 대기했다.
창문 밖으로 떠나는 쑨원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심호흡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쑹아이링은 꿈이 있었다.
어머니 세대처럼 전족(纏足)을 하고 가마 없이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삶 따위는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 쑹자수(宋嘉樹)는 남다른 교육관을 갖고 있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아버지.
찢어지는 고생 끝에 상하이로 돌아와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덕에 집안의 교육은 엄격하고 사치는 금지되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제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깨달은 그녀였다.
쑹아이링은 비범하게 살고 싶었다.
화려하게 날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고작 열네살의 나이로 미국행 배를 타면서도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여성의 몸, 그것도 중국인 출신으로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한 쑹아이링은 삶이란 생각보다도 더 험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어딜 가나 불결한 병자를 보는 시선이 쏟아졌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학 생활 5년 동안 친구는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쑹아이링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백인들을 역으로 무시했다.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하게!
그러한 마음가짐이 도움이 되었는지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 되어서는 교수에게 생전 없던 말을 듣기도 했다.
"아이링 쑹도 이제는 제법 미국 시민티가 나네."
자기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했는지 모르지만 쑹아이링에게는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 말에는 곧 중국인은 열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흥! 두고 보라지! 나는 누구 못지않게 크게 성공하여 떵떵거리고 살 거야!
상하이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해혁명이 터졌다.
늦은 밤 아버지는 쑹아이링을 불러 앉혔다.
"너는 우리가 왜 이리 소박하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없느냐?"
항상 쑹아이링이 궁금해했던 바였다.
분명 아버지의 사업은 창창 대로를 걷는데, 어째서 우리 집은 상하이의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구석탱이에 위치하였나.
쏟아져 들어오는 은화들은 대관절 어디로 사라지는 건가.
"···무슨 말씀이세요?"
"쑨원이라는 혁명 지사를 아느냐? 나는 지난 17년간 중국동맹회에 자금을 대왔다. 그 성과가 오늘에 이르러야 나타나니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아 흐뭇하기 그지없구나."
어렴풋이 이름만 알던 쑨원에 대하여 자세히 들은 것이 그때였다.
아버지의 묘사 속에서 쑨원은 불세출의 의사(義士)였다.
중국과 민족을 위하여 일어난 희대의 위인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쑨원이 마침내 상하이에서 쑹자수를 만났을 때 쑹아이링도 함께 있었다.
쑹아이링은 냉큼 쑨원의 통번역일을 맡겠노라 자원하고 나섰다.
그런 영웅 옆에서 일하다 보면 자연히 자신도 크게 출세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가까이서 모시게 된 쑨원은 자신이 생각했던 영웅이 아니었다.
일 처리는 독선적이고 편협했으며 누구의 조언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짧았던 임시정부의 대총통직을 반납한 쑨원은 실권 없는 한직을 맡았다.
철도를 깐다며 전국을 유랑하는데 시찰이라기보다는 유람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었다.
철벽에 철벽을 치면서도 그의 비서 일을 지속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찌 되었건 혁명파에서 쑨원의 명망은 출중하였고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상사의 가치를 높여야 했다.
쑨원을 도우며 동시에 다른 길로 빠질 수 있는지 눈치를 보는 쑹아이링이었다.
그러다 오늘 발견했다.
새로운 갈래로 뻗은 출셋길을.
쑹아이링은 살포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글씨를 끄적거리던 한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쑨 선생님의 전언이라도 있소?"
"그런 건 없어요."
한신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쑹아이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성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떨림이 저 남자에 대한 끌림인 건지, 아니면 출세를 위한 계획을 실행하느라 긴장한 것인지.
쑹아이링은 분간할 수 없었다.
"저희 아버지가 도독님을 무척 좋아하셔요."
"그렇소?"
"저는 쑹아이링이고 아버지는 자자 수자를 쓰셔요. 상하이에서 방직업과 출판업 등을 하시는데 동맹회에도 자금 지원을 크게 하신답니다."
말투 왜 이런데?
평소 극혐하던 말투를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는 쑹아이링이었다.
"대단한 분을 아버지로 두셨소."
"아버지께서는 도독님을 꼭 한번 초대하고 싶어 하니 언제고 상하이에 오시면 저희 집에 방문해주셨으면 해요. 저희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그러겠소."
물론 아버지와 후베이성 도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나치게 깔끔한 한신의 대답에 쑹아이링은 더 이어 나갈 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럼···. 주소를 적어드려도 될까요?"
"그러시오."
책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상하이 저택의 주소를 적으며 몰래 한신의 얼굴을 살폈다.
언뜻 흐리멍덩한데 형용하기 어려운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계속하여 곁눈질하는데도 한신은 자신이 뭘 하든 관심 없다는 듯 서류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다. 남자는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그저 젊은 여자가 눈앞에 있으면 풀린 눈으로 음탕한 시선을 보내는 게 응당 남자라는 족속 아니었던가?
대영웅이라는 쑨원에게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이자는 달라.'
조선인이라는 건 별 상관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돈은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이 사람이야말로 그동안 자신이 찾아다니던 영웅 아닐까?
아직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
꽌시를 맺어두면 장차 큰 효용이 있을 거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다.
오늘날 여성이라는 성별은 지난한 차별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도 있다는 것이 쑹아이링의 생각이었다.
쑹아이링이 생각하는 내조는 단순히 집안에서 남편의 살림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바로 옆에서 가까운 조언가가 돼주며 함께 난관을 극복해가는 동반자가 그녀가 생각하는 아내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내 동생들이 있어. 그 애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사람과 인연을 맺어두면 좋지.'
외간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모험적인 행동을 쑹아이링은 그렇게 합리화했다.
오직 그 생각만이 전부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다 적었어요."
"주시오."
쑹아이링이 건넨 쪽지를 대충 쓱 주머니에 넣는 한신.
"그럼 가볼게요."
"잘 가시오."
방을 나오며 쑹아이링은 마지막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으나 한신의 시선은 책상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쿨가이야 아주.'
***
창밖으로 쑹아이링이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땀승인가? 어떻게든 강철 장벽을 지켜냈다.
쑹아이링의 의도는 명백하다.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엮이고 싶은 건데, 그 눈치를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물론 이 시대 사람들은 으레 내 나이 때면 결혼을 하긴 하지만,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 무엇보다 저런 여자를 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쑹아이링이 미래에 누구와 결혼하는지 다 아는데.
역사를 개변한다 해도 그런 쪽으로는 바꾸고 싶지 않은걸.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아주 조용히 생을 살다 간 여자와 결혼할 거다.
똑똑.
서양식 노크.
"들어와."
"흐흐. 도독님."
샤즈광이었다.
"뭘 처웃고 있냐. 준비는 끝났어?"
"예. 흐흐."
쑹아이링이 나가는 걸 봤겠지.
별말도 없이 빙글대기만 하는 샤즈광이 밉살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걸음을 앞장섰다.
"가자. 가는 길 얼굴은 봐야지."
"흐흐."
"닥쳐."
우창성 북쪽 공터에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장정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전국 총선거를 위해 우창을 떠나 전국 각지로 파견될 병력.
군데군데 삼합회 친구들도 함께였다.
"다 모였나."
"예!"
"좋아. 이번 경호 임무는 또 하나의 전쟁이라 생각해라. 너희들의 최선은 경호 대상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말을 기억해라. 최선은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란 걸."
병사들이 조금 머뭇거렸으나 이내 우렁차게 답했다.
"예!"
"적은 실재한다. 그리고 공격해올 거다. 알겠나! 최선은 그런 적의 음모를 분쇄하고 원흉을 뿌리째 뽑아오는 것이다!"
"예!"
이들은 내 최고의 정예병들이다.
짧은 시간에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단순 훈련으로는 얻기 힘든 연대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단순 경호 임무에 투입하기에는 지나치게 강대한 병력.
하지만 이번에 중국 전역에서 열릴 선거는 그간 역사에 없는 규모다.
청조 시절에도 자의국(지방 의회) 선거는 있었으나 당시의 유권자는 4억 인구 중 170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이번 선거는 투표권의 범위를 크게 늘려 약 4300만명가량이 유권자였다.
여전히 재산이나 학력, 성별의 제한 등은 있으나 그럼에도 획기적으로 늘린 규모였다.
이 선거가 어떻게 치러질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당장 21세기에도 투표율이 140프로가 나오고 뇌물 대리투표가 성행하는데.
그저 의구심뿐이다. 이게 되겠어?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지 않은가.
나는 이번 선거에 공화당이 여당이 되는 것만큼이나 관심을 두는 문제가 있었다.
"상하이로 가는 부대는 나오라."
"예."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
"샤즈광. 네가 이들을 직접 지휘하지?"
"예. 맞습니다."
"너희들은 소총을 챙겨가라."
"예?"
"말했잖냐. 이건 전쟁이다. 특히 상하이에서는 더욱 그럴 거다."
위기는 기회.
이번 기회에 천치메이를 친다.
도쿄에서 도망친 천치메이는 어느새 상하이의 대부가 되어 있었다.
청방(靑幇)은 홍콩의 삼합회와 더불어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범죄조직이었다.
신해혁명 이후의 혼란스러운 대도시를 폭력으로 정복한 청방은 상하이를 폭력배들의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덕에 상하이는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었으니 현실판 고담시라 해도 말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상하이는 중국 중남부에서 가장 큰 대도시.
선거 유세의 핵심지다. 제낄 수는 없다.
그러니, 전쟁이다.
"시내에서 총격전은 피해라. 민간인이 한명이라도 휩쓸리면 그거야말로 최악이다."
"예."
"청방의 소굴이 있을 거다. 소탕을 목적으로 기동해라."
"예."
"놈들을 일반 건달이라 믿지 마라. 적군이라 생각해라."
"예."
그리고 조금은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남았다.
"만약 생포 당했을 시에는···."
"바로 자결하겠습니다."
"아냐. 입만 열지 마라. 고문은 당할 거다. 하지만 버텨라. 버티고 있으면 꼭 구해주마."
"···예."
샤즈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봤을 때는 쌩 날라리 같던 놈이 이젠 제법 믿음직하다.
"한계다 싶으면 삼합회에서 왔다고 해라. 고문을 한참 버틴 끝에 털어놓으면 아마 믿을 거다."
"그, 그렇게 하면 삼합회에 피해가 가는 것 아닙니까?"
"이미 청방의 세는 삼합회에서도 좌시하기 어려울 만큼 성장하여 조직의 이익에 심대한 손해를 끼치고 있다. 걱정 마라. 삼합회의 이름은 그 정도 무게는 버틸 수 있어."
이번에 홍콩에 지원 요청을 하며 이미 용두와 상의한 바였다.
청방을 친다는 말에 젊은 용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었다.
다시 한번 병사들을 훑었다.
잘 훈련된 군인의 전투 수행 능력은 길거리 깡패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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