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끝낼 전쟁 (수정)
창밖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넘실거렸다.
홍콩에서 보내는 안온한 오후.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신아! 밥 먹어라!"
"네~."
언제나 부하들에 둘러싸여 근엄한 척 눈이나 부라리다가 집안의 귀요미가 된 이 기분.
나쁘지 않아. 실은 맘에 들어.
2년 만의 휴가.
1913년은 조용히 지나갔다.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기동이었다.
제헌의회에서 치러진 대총통 선거는 위안스카이가 당선되었다. 부총통은 리위안훙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열강들은 위안스카이를 두 팔 들고 환영했다.
정식으로 출범한 북양 정부가 아편 전쟁 이래 청이 맺은 불평등 조약들을 그대로 이어받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청나라와의 관계성을 부정하고 조약을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힘이 없는 상태에서 강짜를 부려봤자 먹혀들어 갈 리 없으니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제헌의회의 총리는 쑹자오런이 되었다.
쑹자오런과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곧잘 원만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헌법 제정은 자꾸만 미뤄졌고 대총통은 재정과 외교 등에 있어 끊임없이 권리를 요구해왔다.
내각 회의에서는 하하호호 덕담이 오갔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의 베이징 정치라는 걸.
제헌의회든, 북양 정부든 서로 간만 보며 먼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베이징 주변의 몇 개 성에 한하여 작용할 뿐.
화중남의 군사령관들은 자체적인 권력을 틀어쥐고 명목상으로만 중앙에 복종할 뿐이었다.
물론 각자 하나하나씩 떼놓고 보면 북양군의 1개 사단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성(省)이 부지기수였으나.
자칫 잘못 건드려 그들이 연합이라도 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니 북양 정부에서도 눈치를 봐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세금.
슬금슬금 중간에서 착복하는 지방 정부가 있는가 하면.
광둥성같이 돈이 없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곳도 있었다.
세수의 격감은, 당금 최대의 현안이었으니.
의회와 정부 구분 없이 어느 쪽이든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의 경우로 말하자면, 후베이성은 상대적으로 북양파의 입김이 센 탓에 세금 납입을 패스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세 따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에 가까웠다.
그깟 세금 얼마나 한다고. 후베이성은 근대화의 첨병으로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었으니.
1,900만 위안의 자본으로 출발한 한양은행은 공격적으로 투자를 감행하여 어느새 그 세 배에 가까운 돈을 굴렸으며.
한야평공사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용광로는 연신 철강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일은 노동 계급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
한양은행의 지원을 받은 기업은 중공업에 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공업 분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개인 사업자들이 빵빵한 지원을 받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허허벌판이었던 평야에 방직공장들이 들어섰고.
장강 근처에는 제분공장들이 가득했다.
근대식 공장의 산업집약도는 무시무시해서 본격적으로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인력을 갈아 마시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사람이 없어 근로자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자연스레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여 근처의 안후이성과 허난성 등지에서 농민공(農民工)들이 대거 쏟아져 들어왔다.
고향을 떠나 후베이성에 정착한 농민공들은 기존 지역 사회의 전통에서 자유로웠다.
오직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의 권익과 노동에 따른 임금 뿐이었다.
나는 의회에서 입안한 노동법을 철칙으로 엄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노동쟁의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한 산업단지의 풍부한 유동성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쟁의 따위에 시간을 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이득이라는 인식이 만연하였다.
지지부진하던 철도 사업도 막힌 혈이 뚫렸다.
국민당의 선거 몰락 이후 쑨원은 철도부에서 외채를 끌어다 쓸 권리를 요구하였다.
자신이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면 북양 정부가 대신 보증을 서달라는 다소 해괴한 논리였다.
위안스카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나아가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는지 쑨원을 철로 총판 자리에서 해임해 버렸다.
철도 사업은 교통부로 이관되었고 쑨원은 일본으로 도피하듯 떠났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교통부는 자금을 마련한 지방 정부에 우선하여 철도 건설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그 첫 순서는 단연 후베이성.
기존 베이징과 한커우를 잇는 징한철도.
한커우와 광저우를 잇는 웨한철도에 이어.
우한을 시작점으로 난징과 난창, 시안. 세 개 경로에 한꺼번에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역시 돈이 최고다. 안되는 게 없다.
완성된 철로는 공장 지대의 상품을 중국 전역으로 수송할 것이다.
아래층에 내려가니 이미 아버지와 여동생은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간단한 소면과 만두 몇 개. 소박한 상차림.
"식기 전에 얼른 먹으렴."
"네."
소면을 떠서 입에 넣자마자 고소함이 입가를 가득 채운다.
어머니의 손맛이 살아있는, 어릴 적부터 먹어왔던 익숙한 식사다.
돈으로 안되는 게 요기잉네.
"일은 어떠니? 힘들진 않니?"
"적성에 맞아서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구."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순식간에 자기 그릇을 비운 여동생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내 소면을 넘봤다.
"먹고 싶냐?"
"응!"
"어~, 안돼."
"치. 다른 오빠들은 동생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주든데."
"누가 보면 굶은 줄 알겠네."
여동생은 콧방귀를 뀌며 만두를 집어 먹었다.
"너 학교 공부는 어떠냐?"
"알아서 뭐 하게."
"이제 네 진로도 생각해야지."
"웃겨. 오빠가 우리 아빠야?"
진짜 아빠는 이미 세 젓가락에 소면을 완료하고 만두 한 개를 집어 든 채 식탁을 벗어난 후였다.
나는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 제대로. 너 뭐 하고 싶은데?"
"음···. 몰라."
"대학 안 가?"
여동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자가 대학에 어떻게 가."
"왜 못가."
"진짜? 나 대학 보내줄 거야?"
"네가 가겠다면."
"···."
여동생이 고민하는 듯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가렴."
"근데 대학에 가게 되면 집에서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신이가 집을 떠난 것이 열여덟이었으니까, 서시가 올해 꼭 나이가 같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저 없으면 엄마랑 아빠가 심심하잖아요."
"얘는, 무슨 소리 하니. 엄마랑 아빠는 너희들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이루는 게 최고의 행복이야."
"진짜요?"
"그럼."
여동생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음을 놓은 듯 재잘거렸다.
"근데 홍콩대는 여학생 안 받는데. 여자가 진학하려면 베이징이나 난징에 있는 사범대학 쪽을 알아봐야 된데."
"벌써 알아봤나 보네."
"응, 다 알아봤어."
"그럼 가고 싶은 거냐?"
"웅!"
나는 준비해둔 편지지와 펜을 꺼냈다.
"이게 뭐야?"
"대학 진학을 알아볼 거면 자기소개서를 써야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비전과 포부를 가졌는지, 얼마나 학교 공부에 충실할 것인지 빽빽하게 적어."
"흠, 자기소개서라."
"그리고 쓸 때는 영어로 써라."
"영어로?"
궁금해하던 여동생은 문득 깨달았는지 입을 헤 벌렸다.
"나 외국 가는 거야?"
"그래. 이왕 가려면 제대로 배워야지. 영국이든 미국이든 둘 중에 선택해."
"나 미국."
"영국이 낫지 않냐. 홍콩 시민권이 있으면 진학하기 편할 텐데."
"음···. 홍콩에 사는 영국인들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워낙 당한 게 많아서 영국엔 별로 가고 싶지 않네."
하긴.
근데 미국도 별다를 건 없을 텐데.
잠깐 고민이 들었으나 이내 마음을 접었다.
한서시는 보기완 다르게 마음이 강한 아이다.
그깟 인종 차별쯤은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래. 내가 한 번 알아볼게. 혹시 가고 싶은 대학이 있으면 미리 말해라."
"오빠가 어떻게 알아봐? 연줄 있어?"
"그거 몰라? 여섯 다리만 거치면 세계인이 모두 연결된다는 거. 나 정도 위치가 되면 건너 건너 꼬맹이 하나 대학 입학시켜주는 건 일도 아니야."
"아싸!"
연줄을 이야기하며 나는 머리속에서 쑹아이링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국의 웨슬리언 여자대학교를 졸업한 보기드문 이 시대 보기 드문 지성.
그녀의 동생들이 줄줄이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부탁하면 여동생도 가능하리라.
먼 타지지만 같은 중국인이 있으면 생활도 어느정도 편할 터.
신나서 유학 준비에 들어간 동생을 두고 온갖 충고를 늘어놓았다.
듣는 둥 마는 둥, 짐 정리를 한답시고 집안을 뛰어다니는 동생을 지켜보다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곧장 삼합회의 쫄병들이 뒤따라 붙었다.
나는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페리를 탔다. 목적지는 침사추이의 삼합회 본부였다.
용두와는 육사에서 돌아왔을 때 사업 보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백색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용두는 날 보자마자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이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에이, 우리 마스터. 왜 그러세요."
"온 천하에 장군님의 위명이 휘날립니다. 삼합회는 장군님이 베푸신 은혜덕에 다시 없을 전성기를 맞았으니 마스터 된 자로서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지요."
"뭐 작정했슈? 됐고 평소처럼 합시다. 나는 온종일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대접받는 사람이야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이곳에서는 좀 편하게 있고 싶네요."
"아, 예. 그럼 편하게."
용두는 말과는 달리 무척 불편한 자세로 소파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바지에 똥이라도 쌌나 생각하는데 내게 상석을 양보하는 자세란걸 깨달았다.
나는 무시하고 상석의 오른쪽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스터. 우리 편하게 하자니까? 이 기회에 말 놓읍시다. 항상 궁금했던 거, 몇살이요? 본명은 뭐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말하기 싫음 말고."
"장군님께만 알려드리지요. 회의 다른 녀석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오키."
"1885년생입니다."
나보다 다섯 살 형.
아직 서른도 안 됐다.
"와 진짜 어렸구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하여간 나이는 비밀입니다. 다른 녀석들이 알면 우습게 볼지 모르니까."
"네. 그러죠. 그 보다 말 놓으라니까요, 마스터?"
"정말 말 놓습니까?"
"예."
한때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삼합회의 드래곤마스터가 내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새삼 먼 곳까지 왔다는 실감이 났다.
용두가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쩝쩝거리다 입을 열었다.
"좋아. 한신 장군. 말을 놓자고."
"그거야. 마스터. 그래서 이름은?"
"뉴샤오티엔(牛少天). 이것도 비밀이야."
"괴상한 이름이네. 왜 안 밝혔는지 알겠어."
"···그래."
용두가 파칭코 사업의 보고를 해왔다.
"사업을 더 불리고 싶다고?"
"그래. 메이지 덴노가 죽은 이후 일본은 다이쇼 시대가 열렸지. 현재는 장사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야.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경직되어있던 사회 분위기가 한껏 완화되며 전체적으로 느긋하게 변하고 있어. 파칭코 사업의 탄압도 느슨해졌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고."
"나야 뭐, 사업에 손을 뗀 지 오래됐으니까 네가 더 잘 알겠지. 알아서 잘해봐."
"고마운 말이군."
용두는 보고를 마치고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파칭코 사업에 관하여 무언가를 지적하러 온 줄 알았던 모양.
하지만 내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잘 들어, 마스터."
"응. 듣고 있다."
"곧 전쟁이 날 거다."
"또?"
"또가 아냐. 인류사에 한 번도 없었던,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대전쟁이 유럽에서 벌어진다."
"···그게 뭔말인데?"
1914년이 도래했다.
"유럽은 구만리 먼 길이지만 대전쟁의 영향은 분명 아시아에도 올 거다."
"아니,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일본은 유럽의 혼란을 틈타 아시아, 특히 중국에 손을 뻗어 올 거다. 그때가 기회야."
"무슨 기횐데?"
"일본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삼합회가 그 사전작업을 좀 해줘야겠어."
내 목적은 간단했다.
개전 이후, 일본은 중국의 독일 조계를 침략해온다.
하지만 그 시도가 막힌다면? 군부의 영향력은 약화될 터.
일본에는 일명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민주주의 사조가 나타나고 있다.
내가 삼합회에 하는 주문은 그걸 뒤에서 부추기라는 것.
잘만 이루어지면 군국주의 일본을 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계획 실현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일본군에 맞서 침략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
그 누군가는 결국 나일 거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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