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끝낼 전쟁3
위안스카이의 얼굴이 굳었다.
"한 장군, 뭔가 착각하는군. 오늘 회의는 유럽의 위기가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토의하는 자리야. 설사 전란이 일어난다 해도 평화적으로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먼저 선전포고를 입에 담다니, 제정신인가?"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위안스카이의 의도는 명백하다.
이미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보전받은 상태.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각하께서도 이미 수많은 전란을 겪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전쟁은 피하고자 해서 피해지는 성질이 아닙니다."
"아니야. 자네는 모르는군···. 양놈들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야. 저 경자년(庚子年)에 이곳 베이징에서 어떤 참상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하나?"
위안스카이는 1900년의 의화단 운동을 입에 담고 있었다.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세우며 외세를 배척했고 청나라는 그런 의화단을 등에 업고 서양 세력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당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은 초토화되었네. 자금성에 입성한 양놈들은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3일 동안 베이징 시내를 불태웠지. 마치 지옥의 업화가 도시를 삼킨 것과 같은 광경이었어. 다시는 그런 악업을 반복해서는 안 되네."
트라우마가 도진 모습이다.
하기야 당시 세계 군사력 1위부터 8위까지 줄 세운 강대국들에 다구리를 당했으니.
미영프독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까지. 역사상 다시 없을 호화로운 명단에 처맞아보면 정신이 나가는 게 당연하긴 해.
"말씀하신 의화단 운동 이후 체결된 신축조약(辛丑條約)으로 중국에는 수많은 조차지가 설치되었고 열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들끼리 중국 영토 안에서 전쟁을 벌일 수도 있으니, 시선을 돌린다고 외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야! 어떤 상황에서도 서양 세력과 싸우는 것은 피해야 해. 중국은 중립을 지킨다."
"국제 관계에서 중립을 표방한다는 건 결국 무능력을 증명할 뿐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겐가! 중화민국은 청국과는 달라. 열강들 모두 북양 정부를 승인했단 말이야. 중립국을 요청하면 모두 받아들일 거라고! 나는 평화를 원하네. 유럽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겠다면 싸우게 놔두지 뭐. 그놈들이 투덕거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얼씨구.
위안스카이가 평화주의자라니. 광서제가 지하에서 울겠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제부터에 달렸다. 강하게 압박에 들어간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대총통 각하께서는 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위안스카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예."
"무례하군. 하지만 나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니 한 번 참겠어. 그래. 내가 뭘 착각하고 있지?"
"작금 세계의 세력 균형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맹이며 다시 내일의 적으로 변모합니다. 열강들은 끊임없이 동맹을 바꾸어가며 어떻게든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있습니다."
"좋구먼. 그렇게 동맹을 맺어 세계 평화로 나아가면 되지 않는가."
"문제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동맹을 만들다 보니 어느 순간 턱없이 거대한 세력권이 형성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나는 회의장을 훑었다.
대총통과 부총통을 포함한 내각.
장군부와 육군부의 장성들.
오늘날 중화민국을 떠받치는 주요 인사들이 모두 한 자리였다.
"이번에 만약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 규모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파멸적인 시나리오를 읊었다.
회의장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묵시록에 손을 얹는 새로운 국가가 언급될 때마다 분위기는 더욱더 질퍽질퍽한 진창으로 가라앉았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
세르비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가 나선다.
구실을 찾던 독일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근거로 러시아에 선전포고한다.
러시아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 또한 자연스레 전쟁에 끌려 나온다.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가 등장조차 하지 않은 시대.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던 다극 체제는 어느 한쪽을 절멸하지 않고서는 더는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란 표어는 대전쟁을 통해 한 체제가 패배함으로써 이후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였다. 동시에 참전 명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전쟁이 끝나겠나.
세계 대전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끝장내는 전쟁이었을 뿐이다.
내가 말을 마치자 회의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데 문득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클클···. 재밌어. 정말 재밌어."
위안스카이였다.
"한 장군, 좀 자중하게나. 젊은 패기는 좋지만 시류를 읽을 줄도 알아야지. 군사 회의에서 전쟁을 가정하고 이야기하자는 건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를 찾아보자는 것이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소설이나 쓰자는 게 아니야. 장군이 말하는 그런 세계구 급의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거야. 열강의 지도자들이 정신이 나갔다고 그런 선택을 하겠나."
그렇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제 예측이 소설로 머문다면 좋겠지만, 각하 말마따나 여기는 군사 회의장. 최악을 추정하였을 때 분명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이라는 말인즉슨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전란을 바라는 나라가 있다는 얘깁니다."
"무슨?"
"그 나라는 중국 영토의 중립 요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니, 중국이 구미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게 어딘가?"
"일본제국."
위안스카이가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쳐 말을 이었다.
"일본의 위치는 독특합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세계에 열강으로 인정받고 있지요. 문제는 놈들이 영국과 동맹이라는 겁니다."
범지구적 패권국인 대영제국이 최초로 선택한 동맹국은 극동의 이름 모를 섬나라였다.
세계는 놀랐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동양의 노란 원숭이들과 대등한 동맹조약을 맺다니.
호사가들이 두꺼비와 달님의 결혼이라 떠들어대는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불곰을 거꾸러뜨리고 영국에 자신들의 역량을 입증하여 보였다.
"일본은 분명 열강의 대열에 올라섰지만 서구의 식민제국들과는 처지가 다릅니다. 같은 근대화의 후발주자인 독일이 유럽의 열강들에 둘러싸여 강한 견제를 받는 반면, 일본은 그 지리적 특성 덕에 상대적으로 팽창할 자리가 넉넉하지요.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놈들은 분명 영일동맹을 구실삼아 아시아에 세력 확장을 꾀할 겁니다. 가장 만만한 곳은 역시 독일의 식민지인 키아우초우겠지요."
장성들에게서 분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말에 동의를 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아시아의 동지인 일본이 그럴 리 없다는 자도 있었다.
소란은 위안스카이가 정리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네. 게다가 독일과 특별히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산둥반도를 침공해올 거라고는 믿기지 않아."
"···."
"게다가, 우리 쪽에서 먼저 독일을 공격하다니. 그거야말로 황당무계한 소리야. 장군은 모르겠지만 정부의 재정 상태는 좋지 않다네. 신해혁명의 여파가 아직도 미치고 있어. 중화민국이 자리 잡은 후, 치안 역시도 아직 불안정해.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야. 그렇지, 돤치루이?"
듣고만 있던 육군부장관 돤치루이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키아우초우의 독일군은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우수한 화력으로 수비를 공고히 하고 있어 육지 방향에서 점령하려면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그래. 점령 자체도 쉽지 않아."
"예. 적어도 3개 사단은 투입해야 함락이 가능할 텐데, 북양군이 움직일 경우 치안의 허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독일 제국과 척질 필요도 없고요."
"역시 돤치루이. 옳은 말을 했어."
"감히 하나 더 첨언하자면 독일군의 전투력은 세계 제일입니다. 독일 제국은 황제의 지도아래 군민이 일체가 된 국가. 설사 한신 장군의 말처럼 대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독일군이 패배할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그 경우 섣불리 독일에 선전포고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겁니다. 의화단의 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복을 받겠지요."
돤치루이는 일찍이 독일의 육군대학에서 공부한 유학파.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한 장군, 들었지? 장군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정치란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으니 호연지기(浩然之氣)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게 있어. 군을 운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전쟁의 전황에 따른 대처까지. 장군의 간언을 들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고. 알겠나?"
"방법이 있습니다."
"뭐?"
"참전군을 편성하면 됩니다."
위안스카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참전군?"
"이번에 닥칠 유럽의 전란에 대비하여 별도의 군대를 편성하는 겁니다. 참전군은 전쟁의 전황을 면밀히 살피며 중화민국의 이익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일 것입니다. 일본이 준동한다 싶으면 그에 대응하고, 육군부장관의 말대로 독일이 승전할 것 같으면 그에 맞게 대처하면 됩니다."
"하지만···. 재원은? 말했잖나. 국고는 빈털터리야."
"여력이 있는 지방 정부가 있습니다."
"어디?"
"바로, 여기.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인상이 한껏 더 찌그러졌다.
"헛소리!"
하지만 회의장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이어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후베이성의 재정은 풍요롭고 한양병공창에서 공급하는 군수품 역시 수급이 원활하다고 압니다. 게다가 한신 장군은 뛰어난 전략가이니, 그에게 신군의 편성을 맡기면 어떤 변란이 닥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번에는 부총통 리위안훙이 말했다.
"역시 한 장군이요! 이런 애국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모두가 제 안위 지키기에 급급한데 홀로 국가를 위하여 출혈을 감수하고 전장에 나가기를 자처하다니! 고적한 몸으로 부총통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지는구나!"
다음에는 외교부장관 량치차오.
"확실히 국제 정세는 신묘막측하여 예상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열강들의 견제를 받는 중앙군 대신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참전군을 편제하자는 한신 도독의 방안은 합리적이라 판단됩니다. "
국무총리 쑹자오런도 말을 덧붙였다.
"오늘 군사 회의 결과는 의회에 가져가 다시 토론해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중화민국은 더는 예전처럼 함부로 폭주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의회라는 안전장치가 있으니 상황이 닥쳤을 때 의회는 충분히 숙고하여 의결할 겁니다. 편히 말씀들 나누세요."
각부의 관료들이 다 같이 한마디씩 하는데 워낙 수가 많아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한껏 몰리고 있었다.
아무리 대총통이라 하여도 명색이 회의인데 고압적인 자세만 견지할 수는 없으니.
위안스카이가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노회한 생쥐 같은 모습. 꾀주머니를 헤집으며 묘략을 찾고 있었다.
돤치루이와 몇 마디 속삭인 끝에 그의 웃음기가 돌아왔다.
과연 어떤 꾀를 꾸며냈을지?
"좋아. 장군들과 각료들이 한마음으로 원하니 대총통 된 자로서 흘려들을 수는 없는 노릇. 다만 조건이 있어."
"예."
말해봐. 무슨 지략이야?
"참전군은 어디까지나 위급한 전란이 일어났을 시 필요한 군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도 없네."
"예."
"한 장군. 자네의 그 허무맹랑한 소설이 실제 상황이 되는 날이 온다면 참전군의 편성을 허락하지."
오늘 날짜는 1914년 7월 22일.
나는 간단히 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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