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08)

개선

 중화민국 대총통부의 집무실.

 위안스카이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나? 응? 말해봐."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군악대가 나팔을 불며 큰 북을 치고 군중들은 흥분에 차 들썩인다.

 거리를 가득 메운 깃발에는 '환영'이라 쓰여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 착오입니다."

 육군부장관 돤치루이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니야, 돤치루이. 널 믿은 내가 잘못이지. 뭐? 독일군은 확전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카이저는 합리적인 자라서 위기를 잘 수습할 거라고?"

 "···죄송합니다."

 "참전군 같은 허무맹랑한 짓거리는 결코 허용하면 안 됐어! 의회와 척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막았어야 했다고!"

 벼락같은 호통에 돤치루이는 그저 눈을 내리 깔 뿐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시선을 다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펑궈장! 왕스전! 너희 둘은 이 사태에 대해서 할 말 없나?"

 이른 아침부터 대총통의 집무실에 호출된 세 사람.

 이 삼인방이야말로 현시점 북양파를 떠받치는 거두들. 이름하여 북양삼걸이었다.

 북양의 용, 왕스전.

 북양의 호랑이, 돤치루이.

 북양의 개, 펑궈장.

 위안스카이가 처음 북양군을 창설할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동지이자 부하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위안스카이의 물음에도 두 사람은 들은 체 만 체하며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뭐야, 펑궈장. 내가 묻잖아!"

 펑궈장이 비로소 시선을 돌려 위안스카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빛은 냉엄하였다.

 "진작 제 충고를 들으셨더라면 오죽 좋았습니까."

 "뭐라?"

 "신해혁명이 마무리되기 이전부터 저는 줄곧 일관된 조언을 드렸습니다. 혁명파의 한신을 조심하라고요."

 "···."

 "그러나 각하는 그저 목소리만 높은 쑨원 같은 작자를 경계하셨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쑨원은 바다 건너 도쿄의 다다미방에 쭈그리고 있는 신세. 오히려 혁명정부를 견제한답시고 감투를 씌워준 조선 놈이 날뛰고 있지 않습니까."

 위안스카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신해년의 어수선한 때에 펑궈장이 어떤 조선 출신 젊은 장수를 강하게 힐난했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모함으로 치부했었다.

 한커우 평원의 전투에서 판정패 당한 펑궈장이 단순한 시샘을 부린다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북양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전국 25개 성의 도독 중 가장 위험한 자는 후베이성의 한신이라고요."

 "확실히 그랬었지."

 "제 간언은 한신의 권력을 빼앗고 축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각하께서는 그저 돈과 여자 등으로 포섭할 생각만을 하셨지요."

 펑궈장의 눈빛이 불길에 휩싸인 듯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저는 이미 포섭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신, 그놈은 절대로 길들일 수 없는 놈입니다. 직접 제 손으로 수급(首級)을 취하기 전까지는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는 놈이란 말입니다."

 펑궈장의 말을 듣고 보니 위안스카이는 새삼 뼈아프게 느껴졌다.

 바로 된 충신이 옆에 있었지 않은가.

 진작 펑궈장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괜히 돤치루이가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그저 곁에서 실실대며 알랑방귀나 뀔 줄 알지, 실속은 하나도 없는 놈!

 "미안하군, 펑궈장. 자네의 충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내 탓이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놈이 근래에 명망을 조금 얻었다고 해도 여전히 따르는 세력은 미약합니다. 아직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

 위안스카이의 시선이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지나쳐 세 번째 사람에게 향했다.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은 왕스전이었다.

 "왕스전, 자네는 왜 한마디도 없나?"

 왕스전이 바깥 군중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위안스카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북양의 용이 된 사연은 용처럼 신묘해서가 아니었다.

 실은 신룡현수불현미(神龍見首不見尾, 용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다)의 고사에서 따온 것.

 다시 말해 어떤 일에도 전력으로 임하지 않고 항상 한발짝 물러나 있는 그의 행태를 비꼰 별명이었던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천지가 격동할 때도 왕스전은 평온했다.

 여전히 변발을 보존한 채 청나라의 복식을 고집했다.

 오늘도 마찬가지.

 혁명파의 애새끼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며 북양파를 위협하는데도 그저 산책이나 나온 듯 평온하다.

 왕스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는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뭐가?"

 "이번 참전군의 원정은 중국의 크나큰 쾌거입니다. 부당하게 빼앗긴 산둥의 영토를 환수하여 베이징의 시민들은 저리 기뻐 날뛰는데, 어찌 총통 각하는 마치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위안스카이는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몰라서 묻는 거냐? 한신은 혁명파의 간부다."

 "그게 어쨌다는 건지요."

 "이번 일로 놈을 추종하는 대중들이 폭팔적으로 불어나니, 세력 확장을 더 좌시했다가는 우리 북양파의 대권에 도전해 올 거다! 이걸 일일이 설명해야 아냐?"

 "정말 도전해온다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됩니다. 미리 힘 뺄 필요 있습니까."

 이런 젠장. 누가 상관이야? 

 남들 고생할 때 뒷짐 지고 방관만 한 자식이 어디서 힘을 빼라 마라야? 지가 힘 뺀 적은 있어?

 이런 놈이 북양삼걸이랍시고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니.

 위안스카이는 다시 돤치루이와 펑궈장을 번갈아 보았다.

 두사람의 격차는 현격했다.

 호랑이와 개라는 세간의 평가가 그 격차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몰락 가문 출신으로 군인이 된 돤치루이가 뛰어난 정치 감각을 통해 주변의 인망을 얻는 타입이라면.

 지주 출신인 펑궈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독선적인 성격 탓에 주변에 적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돤치루이를 지지해온 위안스카이였으나, 이번 일로 인해 생각을 바꿀 필요를 느꼈다.

 차기 육군부장관은 돤치루이보다는 펑궈장이다. 한신을 거꾸러뜨리려면 그게 맞다.

 왕스전은···. 지 알아서 하고 싶은 거나 하라 그래.

 문득 바깥의 환호성 소리가 높아졌다.

 저절로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중국이 승리했다!"

 "참전군 만세!"

 베이징의 대로.

 행진하는 군인들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짙은 색 군복을 갖춰 입은 군인들이 어린애 키만 한 소총을 받쳐 들고 씩씩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온 거리를 압도할 만한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열의 선두에 백마를 탄 한신이 있었다.

 "개선장군 납신다! 한신 장군 만세!"

 "진정 전략의 천재다! 한신의 현신이다!"

 "말해 뭐해! 국사무쌍은 바로 저분을 말함이라고!"

 광기에 가까운 열광의 도가니.

 위안스카이는 대총통부의 고층 집무실에서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문득 고삐를 잡은 한신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이쪽을 보는 건가. 저 아래서는 보이지 않을 텐데.

 찰나에 눈을 마주쳤을까?

 한신의 눈빛은 날카로운 기색 하나 없이 나른할 뿐이었으나.

 어쩐지 위안스카이는 폐부를 찔린듯 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까지도 마음 한구석에서 어린 조선 놈을 깔보는 생각이 있었던 위안스카이는 비로소 펑궈장이 말하는 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자신의 진정한 꿈이 좌절될 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었다.

 '이놈···. 위험해.'

 ***

 베이징의 개선식은 정신없이 끝났다.

 위안스카이는 훈장을 내리면서도 전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치하의 말도 없는 덕에 오히려 편했다.

 개선식 이후에는 악수 한번 해보자고 달려드는 베이징의 명사들에게 시달렸다.

 모두 물리치고 친분이 있던 몇 사람들과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이어와는 사후 강평을 함께 했고.

 량치차오와는 대영, 대일관계의 향방을 의논했다.

 쑹자오런이 의회의 머저리들을 욕하는 것도 다 들어주었다.

 소란스러운 절차를 마무리하고 슬슬 런각을 재는데.

 뭔가 허전하다 했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최종 보스가 접근해왔다.

 "야! 한신! 베이징 왔으면 회포를 풀어야지. 어딜 도망가려고?"

 "풀긴 푸는데, 고량주는 그만 먹읍시다."

 "부총통의 권한으로 그건 허락 못해. 네가 요즘 영웅이랍시고 제법 떠받들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나를 술로 이길 때까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모름지기 천하대장부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인 걸 모른단 말이냐!"

 "저는 번쾌가 아닙니다."

 "대신 한신이잖아! 나 정도는 이겨야 영웅이지."

 "평생 영웅은 글렀군요."

 두주불사는 유방의 부하인 번쾌의 고사에서 나온 말.

 항우가 내린 술을 항아리째 원샷했다고 한다. 

 됐어. 나는 번쾌 안 해. 한신이 좋아.

 아니, 나 정도면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닌데 리위안훙이 가져오는 고량주는 인간이 먹을 게 못 된다.

 처음 잔을 털어 넘겼을 때는 리위안훙이 배신하고 날 독살하는 줄 알았다고.

 "고량주보다 좋은 게 있습니다. 이거 함 보세요."

 "뭔데?"

 비밀병기 등장.

 독일 뮌헨 박람회 금상에 빛나는 칭다오 맥주를 즐겨보세요.

 물맛 좋은 키아우초우에서 독일식 공법으로 빚었답니다.

 "음···. 쩝쩝."

 "어떻습니까?"

 왜 내가 긴장되지?

 리위안훙이 소믈리에처럼 입맛을 다셨다.

 "괜찮군. 한 잔 더 줘봐."

 "사업성은 있을 것 같습니까?"

 "자네가 개발한 건가? 이거 되겠는데."

 "제가 개발한 건 아니지만, 이젠 제거죠."

 독일 소유였던 칭다오 맥주공사는 참전군에 압류되었다.

 나는 헐값에 지분을 사들였으며 지금은 완전한 내 소유다.

 "오우! 약하긴 한데 술술 잘 들어가. 깊은 맛도 있어."

 연거푸 맥주를 들이키는 리위안훙은 마치 뮌헨의 주점에 앉아있는 술꾼처럼 얼콰해져가더니.

 종래에는 보살 같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행복하세요?"

 "그럼그럼."

 칭다오 맥주공사의 첫 납품 계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베이징을 빠져나왔다.

 마침내 우창의 도독부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의 긴장이 쭉 풀리는 기분이었다.

 집무실 구석에 마련한 침대에 누워 칭다오 공략전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습은 순조롭게 되었다.

 영국과의 협동작전으로 정당하게 차지한 키아우초우. 일본이 강짜를 부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가미오 중장은 귀국하는 마지막까지 후회하게 될 거라 엄포를 놓았다.

 확실히 이번 일은 일본의 계획을 중국이 바로 앞에서 대놓고 밟아버린 사건.

 나비효과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은 칭다오 공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 앞바다에 전함을 끌고 나타나 이권을 요구해왔다.

 일명 21개조 요구.

 조선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을사늑약과 같은 방법으로 중국을 삼키려는 시도였다.

 다만 산둥성 진출 시도가 무산된 지금도 원역사와 같은 요구를 해올지는 미지수다.

 키아우초우에는 참전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치안을 안정화했다.

 제2사단은 후베이성으로 귀환했다. 보다 강군으로 거듭나게끔 훈련시킬 생각이었다.

 집무실에서 홀로 사색하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벌여 놓은 일들이 날 가만두지 않았으니.

 "도독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홍콩상하이은행에서 왔다는데, 잡상인 같으니 돌려보낼까요?"

 쩝.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

 내년 초까지는 버틸 줄 알았는데.

 "들여보내."

 나타난 자는 주름 하나 없는 고급양복을 빼입은 중년의 영국인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중국식으로 두 손을 맞대어 공수(拱手) 인사를 했다.

 "한 장군님!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예. 몇 년 전에 HSBC(홍콩상하이은행)의 홍콩점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영국인의 정체는 HSBC의 홍콩점장. 

 나는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파칭코 사업수익의 대부분을 금괴로 치환하여 홍콩상하이은행에 맡겼었다.

 그리고 오늘 이 영국인이 찾아온 것을 보면 3년 반에 걸쳐 점화되도록 설정한 황금 폭탄의 심지는 다 타들어 가기 직전이다.

 내가 심은 폭탄을 잊었을 리 없으나 짐짓 모르는 척, 갑(甲)의 행세를 이어 나갔다.

 "아아, 그런 일이 있었나요? 미안합니다. 일 때문에 워낙 만나는 사람이 많아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그날의 짧은 만남은 큰 영광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끝의 홍콩에서 이곳까진 어쩐 일이신지."

 지점장이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울한 눈으로 몸을 굽히더니.

 이내 그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접혔다.

 "장군님. 제발 저희 은행을 살려주십시오. 장군님의 손에 HSBC의 앞날이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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