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08)

상하이 소풍 (수정)

 "어이쿠, 무슨 일입니까. 일어나세요."

 나는 무릎 꿇은 HSBC 홍콩지점장을 일으켜 세웠다.

 예전에 만났을 때도 체면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돈만 보고 직진하는 자본주의적 행동이 인상깊었는데.

 황인한테 무릎 꿇는 영국인은 또 처음 보네.

 "부탁을 들어주시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점장이 도리질쳤다. 

 이런 수법은 잘 알고 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상대에게 마음의 짐을 얹는 거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지.

 "부탁을 먼저 말해야지 듣든 말든 하지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지점장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와···. 이게 프로 은행원의 솜씨인가?

 가슴이 왜 이리 아픈 거야. 내게 통할 것만 같잖아.

 "그럼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억지로 소파에 앉히고 손수건을 건넸다.

 지점장이 크게 코를 풀더니 입을 열었다.

 "장군님께서 저희 은행에 보관한 금괴가 상당량 있습니다. 당시 거치식으로 3년 반의 기한을 두기로 했지요. 그 기한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예. 그때 특약을 두며 예치한 금괴를 그대로 돌려받기를 원하셨지요."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 기한을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말없이 턱을 긁었다.

 긍정의 신호라 생각했는지 지점장이 바싹 붙어 앉았다.

 "예금을 갱신해 다시 3년 반의 예치 기간을 두신다면 다른 조건은 모두 그대로 두고 이자를 열 배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열 배면 얼마인지요."

 "기존에 4푼이었으니, 4할이 됩니다."

 40퍼센트 이자라. 확실히 마음을 세게 먹었나 보다.

 떠보는 것도 없이 처음부터 상당한 조건을 제시해온다.

 그만큼 어렵다는 거겠지.

 "갑자기 그런 조건이라니. 은행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휴우···. 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근래에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본점은 자금난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금의 유출이 심각하니, 부랴부랴 파운드의 금태환(은행권을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나 이미 금 보유량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제 금괴가 필요한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생각 외로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었다.

 "이자는 필요 없습니다. 예금을 갱신하지요. 새로 계약을 맺어 예치 기간을 늘려도 상관없습니다."

 지점장은 확 반색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침착하게 물어왔다.

 "그럼 어떤 조건을 원하십니까?"

 방금까지 앉아있던 울보찔찔이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변신한 HSBC 홍콩점의 총책임자가 앉아있다.

 "홍콩상하이은행의 주식에 좀 관심이 있는데요."

 "예?"

 "HSBC의 주식매입권을 원합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지점장이 머뭇거렸다.

 "어렵습니까?"

 "일단 그 부분은 제 소관이 아니라서···."

 "그래도 알아볼 수는 있잖습니까?"

 "···."

 대답이 없네.

 이 얘기를 해야 넘어오려나. 

 "그런데 말입니다. 저 역시 홍콩 출신인지라 타지에 있으면서도 이것저것 얘기가 들려오더군요."

 "무슨 얘기 말입니까?"

 "최근 HSBC의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는 찌라시를 봤습니다."

 "그, 그런 헛소문이! 말 그대로 찌라시일 뿐입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나는 기지개를 켜며 딴청을 부렸다.

 부정하든 말든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이다.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서구의 자본가들은 자금회수에 들어갔다.

 지점장님, 그만 내려놓고 말씀하세요.

 솔직한 게 장점이시잖아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점장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종래에는 입을 열었다.

 "실은···, 사실입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잘됐군요. 제가 말하는 주식 매입권은 그 회수되는 투자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의미입니다. 가뜩이나 주식을 팔아치우려는 주주들에게 가격 맞춰주느라고 진땀이실 텐데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예."

 "하지만 결국 말씀하신 바는 이사회의 소관이기 때문에 어찌 될지 장담은 드릴 수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알아보기만 해주세요."

 지점장은 알겠노라 대답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사회에서 직접 뵙고 의논하자는군요. 이사회는 상하이에 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방문을 부탁드립니다."

 ***

 상하이는 처음이었으나 어쩐지 처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 가보자."

 "거긴 뭐 하러 갑니까?"

 "그냥."

 이제는 제법 경호원 냄새를 물씬 풍기는 샤즈광.

 말없이 상하이 외곽의 허름한 건물로 날 인도했다.

 이미 폐허가 된 건물 앞에 누군가 세워놓은 비석이 있었다.

 싸구려 돌을 쓴 듯 투박했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사뭇 비감해 보였다.

 「故 천치메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석을 내려다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샤즈광이 따라붙었다.

 "조문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냥 갑니까?"

 "놈의 마지막은 어땠냐?"

 거사 이후 샤즈광과 한 번도 나눈 적 없는 얘기였다.

 천치메이의 죽음 이후 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 대장의 전언이 있는지 묻더군요."

 "그래서 뭐라 대답했는데?"

 "없다고 말했지요."

 "그 뒤엔?"

 "그 뒤는 없습니다. 그다음은 빵! 이었으니까."

 샤즈광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 갔구먼. 천치메이.

 나는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어주었다.

 홍콩상하이은행의 상하이점은 멀리서부터 알 수 있었다.

 HSBC의 본점은 홍콩이었으나, 상하이점이 이미 영업실적에서 앞선 지 오래되었다던데.

 정말 금융의 중심지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이미 거리의 초입부터 중국인 전용의 매판이 쫙 깔려 있었다.

 상인들은 마차를 타고 거리를 난폭하게 내달렸다.

 샤즈광이 투덜거렸다.

 "아이씨, 마차 엿같이 모네. 저러다 사람 하나 치겠는데."

 정말 샤즈광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노인 하나를 치고 갔다.

 노인은 낑낑거리며 일어섰다가 힘이 빠진 듯 허리가 꺾이며 다시 쓰러졌다.

 가까이 다가갔다. 샤즈광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죽었네. 씨발."

 백주대낮에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신경쓰는 이 없다.

 나는 주변의 매판원을 잡고 물었다.

 "여기 살인사건이 났는데, 방금 이 노인을 치고 간 마차를 아시오?"

 "에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시오."

 "어떻게 그냥 지나가겠소. 노인의 가족이나 아는 사람은 있는지?"

 "그냥 구걸하는 거진데, 무슨 가족이 있겠수."

 "그럼 보상은···."

 "여기 처음이오? 언제 저놈들이 보상해주는 것 봤소?"

 매판원이 설명했다.

 HSBC는 외환어음의 가격을 공시하는 권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전 중국에서 거래되는 외환어음의 가격이 HSBC 상하이점에서 결정되었으니.

 방금 날듯이 말을 몬 마차는 바로 그 공시가격을 빠르게 전달해 차익을 거두려 그리 급히 뛴 것이었다.

 "매일 이 일이 반복된단 말이오?"

 "그런 셈이오."

 확실히 중국 외환시장을 독점한 HSBC의 위세는 무섭다.

 나는 샤즈광에게 말했다.

 "저 노인, 묻어주고 와라."

 "대장은?"

 "저 은행, 삼키고 오마."

 거침없이 은행의 문을 열었다. 

 경비원이 제지하려는 듯 다가왔다.

 "노 차이니즈."

 나는 초대장을 제시해 보였다.

 날인을 알아본 경비가 황급히 물러났다.

 몇 개의 보안을 더 통과한 이후 안내된 방에는 커다란 원형 탁자와 얌전히 앉은 백인들이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시선이 쏘아져 왔다.

 "나는 HSBC 이사회의 로버트요. 귀하가 주식 매입권을 요청한 장본인이오?"

 "그렇소."

 "또한 본 은행에 400만 달러 상당의 금괴가 있으시다고."

 "지금 금값은 시가로 쳐야 하지 않소? 400만 상당이라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군."

 말을 꺼낸 노랑머리 중년인이 딱 보아도 두목이었다.

 로버트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귀하의 요청은 확실히 이례적이라 우리도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주시오. 다만 먼저 말할 것은, 우리 회사는 중국인에게 주식을 팔지 않소."

 "이유는?"

 "이유?"

 "그걸 말해줘야 알아먹을 거 아니요."

 로버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은행이 홍콩과 상하이에 자리 잡기까지 무수한 어려움이 있었소. 본사의 방침은 그러한 역사를 고려한 것이라오."

 "좀 정확히 말해주시오."

 "간단히 말하면 워낙 중국인에게 뒤통수를 많이 맞아서 말이오. 거참, 못 배워먹었으면 돈이라도 탐내지 말든가. 돈이 생기면 씻기라도 하든가. 하여간 열등한 중국놈들···."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당연하지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문득 로버트가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귀하를 지칭한 것은 아니오. 다만 본사의 방침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오."

 "내가 아는 HSBC의 방침은 단 하나요. 근데 그걸 당신을 잘 모르는 것 같군."

 "오호? 상하이점에서만 23년을 근무했는데, 내가 모르는 방침이 있단 말이오?"

 "그렇소."

 "그럼 알려주시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돈 앞에선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거요."

 로버트는 언짢은 듯 침을 삼켰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하하! 그 말이 맞소. 내가 잠시 잊어버렸구려. 암, 돈 앞에는 만물이 평등하지."

 "따라서 내 국적이나 피부색 따위는 잊어버리시오. 우리는 오늘 돈 얘기만 나누면 되는 거요."

 "그래도 문제가 있소. 그 평등을 가르는 기준이 우리 은행에서는 제법 높다는 것이지. 귀하의 예치금 400만달러는 물론 큰돈이오. 하지만 은행의 전체 자본금과 비교하면 미약한 돈이기도 하오. 그 돈으로 주식 매입권을 구할 수는 없소."

 "내가 언제 그 돈으로 구한다 했소?"

 로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후베이성 도독이시잖소. 그 정도 조사는 했다오."

 "오늘은 도독으로 온 것이 아니오."

 "무슨 말이오?"

 "한양은행의 투자담당책으로 온 거요."

 한양은행이 언급되자 HSBC의 이사진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무시무시한 자본력으로 금융시장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공룡이 바로 한양은행.

 신용을 중시하는 HSBC가 망설였던 차관사업에도 한양은행은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도저히 회수가 불가능할 것 같던 사업. 

 그러나 본인들이 주도적으로 경영에 참여하여 사업을 주도하고 죽어가던 기업을 회생시키니.

 투자할 때마다 이익금으로 그 몇 배를 챙긴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홍콩상하이은행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있겠지.

 "귀하가 투자 담당이라고?"

 "한양은행의 실적이 워낙 좋으니 후베이성 정부에서는 공공은행에 준하는 권한을 주고 있다오. 그러니 오늘 한양은행의 공무를 처리하러 온거요."

 "민관에 이런 관계는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이 중국을 아시오? 중국에선 뭐든지 가능하다오."

 한양은행의 주인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세간에서는 미국인이니, 일본인이니, 중국인이니 떠들지만.

 이건 몰랐지? 조선인이다.

 내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어디까지나 한양은행의 대리인으로 행세했다.

 로버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는 찰나.

 다른 이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조건이라도 봅시다."

 "그래요. 정말 한양은행에서 왔다면 조건이 궁금한데요."

 종이가 대령되었다.

 만년필을 들고 액수를 적었다.

 이사회 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홍콩상하이은행 주식 액면가는 125달러지요. 그 열 배를 쳐 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모두 합하여 대략 20퍼센트가량의 지분매입을 희망합니다."

 액면가의 열 배라고는 해도 시가를 반 아래로 후려친 가격.

 게다가 돈만 있다고 파는 것이 아닌 HSBC의 주식이니 고민이 많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HSBC의 금보유량이든 투자자들의 자본금 회수든,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이사회는 처음부터 그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을 터.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잖아.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잖아.

 중국 자본에 잠식당하면 안된다느니 하는 여왕님의 속삭임은 멀리 치워놓고, 그만 편해지라고.

 "이, 일단 회의를···."

 잠깐 나가 있는 사이. 회의 결과가 삼십분만에 결정되었다.

 이 은행.

 이제 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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