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08)

상하이 소풍2

 HSBC와의 거래는 잘 마무리되었다.

 시작은 지분율 20퍼센트지만 비율은 점점 늘어날 거다.

 종래에는 한양은행을 지주회사로 두고 홍콩상하이은행에 지배권을 행사해야지.

 청나라가 멸망하고 이어지는 수십년간의 혼란기.

 홍콩상하이은행은 중국의 외환거래를 독점하여 부를 쌓아나갔다.

 그 우월한 지위 덕에 부여받은 특혜와 이권이 셀 수 없으니.

 좋게 보면 자본주의의 원칙 아래 영업이익을 잘 낸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중국 대륙이 휘청이는 것을 이용하여 뼛속까지 빨아먹었다고도 볼 수 있다.

 HSBC는 블랙기업.

 아편을 밀매한 돈이든, 불법무기 자금이든.

 독재자가 부정 축재한 돈이든, 테러단체의 자금이든.

 어떤 검은돈도 HSBC의 금고 안에서라면 안전하다.

 나는 그러한 HSBC의 방침을 무리하게 바꿀 생각은 없다.

 공장이 돌아가면 구정물은 나오고, 어디선가는 폐수처리장이 돌아가야 한다.

 그 폐수처리장을 내 소유로 두고 어떤 공장에서 어떤 폐기물을 배출하는지만 파악할 수 있어도, 세계 정세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니.

 상하이 출장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

 객실에서 전표를 정리하는데 샤즈광이 문을 두드렸다.

 "대장, 누가 왔는데요."

 뭐지? HSBC에서 사람을 보냈나.

 거래는 깔끔하게 끝났을 텐데.

 "여길 누가 알고 와?"

 "그러게 말입니다. 대장이 주소를 알려준 것 아닙니까?" 

 "뭔 소리?"

 "하여간 잘 해보시지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샤즈광.

 의문은 조금 후에 풀렸다.

 "안녕하세요?"

 나타난 여자가 챙이 넓은 검정 모자를 벗자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쑹아이링. 쑨원이 철도를 의논하며 후베이성에 찾아왔을 때 비서 일을 하던 자였다.

 "상하이에 오시면 꼭 저희 집에 들러주십사 부탁드렸었는데···. 실망이에요. 말씀도 없으시고."

 "실망할 것 없소.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찾아뵈고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려 했으니."

 "정말요?"

 "그렇소."

 "믿을게요."

 모자를 곱게 접는 쑹아이링을 보며 내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요?"

 "홍콩상하이은행에서 주소를 알려주던 걸요. 저희 아버지가 우수고객이시거든요. 친분이 좀 있답니다."

 "그것 이전에···, 내가 상하이에 왔다는 건 어떻게 안거요?"

 쑹아이링이 방긋 웃으며 신문을 한 부 내밀었다.

 데일리 상하이였다.

 - 마차에 치어 죽은 노인을 수습한 '의인'. 알고 보니 후베이성 도독 '한신'.

 신문 기사라니, 딱히 행보를 숨기려는 생각까진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샤즈광 이 자식, 명색이 경호 요원이면서 기자들한테 이런 걸 흘리고 다니냐.

 훈훈한 제목과는 달리 기사의 내용은 홍콩상하이은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였다.

 외환거래에 미친 상인들이 주변을 도외시하고 난폭하게 마차를 몰다 사고가 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HSBC는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며 어떠한 보상방안도 내놓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오너로서 블랙기업 컨셉은 유지하더라도 이런 부분은 바꿀 필요가 있겠다.

 "잠깐 상하이에 들러서도 이처럼 의로운 일을 벌이다니. 정말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국사무쌍이 과장된 얘기가 아니네요."

 "이름빨이요."

 "음···. 그건 쪼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쑹아이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예전보다 한층 차분하고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문득 네 번째 손가락에 끼인 반지가 보였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쑹아이링이 작게 웃었다.

 "얼마 안 됐어요."

 "축하드리오."

 "감사해요."

 "연락을 주셨으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참석했을 텐데."

 "호호, 제가 결혼식을 올린 날짜에 도독님은 칭다오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계셨는걸요."

 "아, 그랬군."

 자연스레 이야기는 쑹아이링의 남편에 대한 걸로 옮겨갔다.

 쑨원을 따라 도쿄에 자리 잡은 쑹아이링. 일본의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으니.

 산시성 출신에 미국 유학파인, 사업가 쿵샹시(孔祥熙)가 그녀의 남편이었다.

 휴. 실제 역사의 사랑이 아름답게 이어졌다.

 "지금은 사업 준비를 위해 중국으로 돌아와 본가에 잠깐 머무는 거예요. 시기가 안 맞았으면 오늘 이처럼 만나기도 힘들었을 텐데, 하나님이 도우시나 봐요."

 "그런 듯 하오."

 "그럼 저녁 식사에 와주시겠어요?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러겠소. 동생에 관한 일을 처리해주셨는데, 행정이 바빠 지금껏 직접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으니 항상 마음의 짐이었다오. 오늘 뵐 수 있다면 영광이겠소."

 "뭘요. 저희가 영광이지요."

 여동생 한서시의 미국 유학에 가장 힘을 써 준 것이 쑹아이링의 아버지, 쑹자수.

 그가 미국에 살았었던 연줄을 이용해 내 동생이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가끔 오는 편지로 보건대 서시는 잘 지내는 모양이니 쑹자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럼 저녁에 뵐게요."

 "알겠소."

 ***

 쑹자수의 저택은 상하이의 번화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유럽식으로 멋들어지게 지은 건물. 주변이 조용하니 운치가 있었다.

 안내받은 자리에서 기다리자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한 중년인이 두 팔을 벌리고 나타났다.

 "아하! 우리 집에 대단한 손님이 오셨구려!"

 "안녕하십니까. 한신이라고 합니다."

 "암, 암. 당연히 알고 있소. 누구보다 빨리 혁명의 선봉에 섰던 선지자이자, 후베이성의 근대화를 이룩한 명도독. 거기에 부당하게 빼앗겼던 중국의 영토를 되찾아오는 군공까지! 조촐한 자리에 귀한 분이 찾아주셨으니, 이 사람은 오늘 명을 다해도 여한이 없다오."

 "과찬이십니다."

 쑹자수는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다.

 다정다감한 언사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칭다오를 그리 경미한 피해로 함락할 수 있었던 거요? 아, 이거 군사기밀이려나? 미안하오. 내가 앞에 계신 분이 누군지 모르고 실언했군. 허허!"

 "기밀이라니요. 아닙니다. 그저 우리 군은 수가 많았고 함락의 의지가 강했을 뿐입니다."

 "군을 그렇게 만든 것이 장군이니, 그저 대단하오."

 한창 얘기를 나누는데 쑹아이링이 나타났다.

 그녀의 옆에 손을 꼭 잡은 또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오셨네요?"

 "반갑소."

 "이쪽은 제 동생인 쑹칭링(宋慶齡)이에요."

 쑹자수 가문 자매들의 둘째.

 붉게 입술을 바른 쑹칭링이 살며시 인사했다.

 "칭링이에요."

 "한신이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선물로 가져간 칭다오 맥주에 호평이 쏟아졌다.

 "마음에 드는구려. 상하이에서는 구할 수 없소?"

 "아직 설비를 확충 중이라 전국으로 유통되려면 시일이 걸릴 겁니다."

 "먼저 마셔보는 우리가 행운아인 거로군. 허허."

 "이런 자리에 초대된 제가 행운아지요."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 만찬이 이어졌으나.

 나는 쑹칭링을 둘러싼 묘한 기류를 느꼈다.

 명랑하던 쑹자수는 쑹칭링을 바라볼 때마다 어딘가 냉엄한 시선을 쏘아냈고.

 쑹아이링 또한 초대된 나보다 오히려 쑹칭링 쪽을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쑹자수가 말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시겠소? 2층에 장식을 잘 해놓은 방이 있다오."

 "예. 그러지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시오. 사업 때문에 처리할 일이 있어, 그것만 마무리하고 바로 올라가겠소."

 "예."

 정말 쑹자수의 말대로 2층은 훨씬 호화로웠다.

 나는 도자기가 가득한 방에서 혼자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나타난 사람은···. 쑹칭링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조금 있다 오실 거예요."

 "알겠소. 허면 언니분은?"

 "언니는 잠깐 아버지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알겠소이다."

 하···. 이럴 거 같긴 했는데.

 뭐, 상관없다. 조용히 있다가 가면 되니까.

 쑹칭링은 말없이 내 앞에 앉아 맥주잔을 들이켰다.

 주변이 워낙 조용하여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풉."

 갑자기 쑹칭링이 웃었다.

 그러더니 도발적으로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쳐왔다.

 "너무 웃기지 않아요?"

 "뭐가 말이오?"

 "지금 이 상황이요."

 빙글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쑹칭링이 잔을 털어 넘기곤 다시 말했다.

 "아버지나, 언니는 뭔 생각인지···. 오늘 일은 사과드릴게요."

 "뭘 사과한다는 거요."

 "이 자리요. 본디 남녀 간의 애정은 억지로 지어낼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자리를 만든다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여기는 게 우스워요. 장군님께도 실례고요."

 뜻밖에 쑹칭링이 먼저 털어놓자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상관없으니 별로 신경 쓰지 마시오."

 "후훗, 저는 오늘 장군님을 처음 뵙지만 왜 언니가 그토록 신신당부했는지 알 것 같네요."

 "뭘 신신당부했다는 거요?"

 "꼭 장군님을 잡으라던데요. 벌써 쑹가문의 신랑감으로 간택되신 거에요."

 농담도 잘하네. 쑹 아가씨.

 그런데 나도 잘해.

 "쑹가문의 여인이라면 어디 가도 찾을 수 없는 미모와 지성을 갖추었으니 나는 좋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저는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아버지와 언니의 노력은 다 헛수고에요."

 "결혼할 사람이 누구요?"

 나는 역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모두가 아는 그 이름. 

 "위안스카이요."

 엥?

 "대총통을 말하는 거요?"

 "놀랐어요? 위안스카이가 황위에 오를 욕심을 품는다던데 그자와 결혼해서 황후가 되려고요."

 "···."

 내 표정을 본 쑹칭링이 깔깔 웃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제 결혼할 사람은 지금 도쿄에 있어요. 장군님과도 밀접한 친분이 있는 분이에요. 혁명파의 지도자라고 하면 아시려나?"

 "쑨원 선생님."

 "예, 맞아요! 바로 맞추셨네요."

 쑹가문의 맏언니인 쑹아이링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던 쑨원.

 하지만 쑹아이링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쑨원은 좌절하지 않았다. 더 어리고 더 예쁜 동생이 나타났으니.

 쑹칭링은 쑨원의 새로운 통번역 비서가 되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하시지만, 저는 성인이에요. 제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사랑하는 사이인걸요."

 "응원하겠소."

 "정말요? 정말 응원하세요?"

 "그렇소."

 "와아, 다른 사람에게 응원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비록 쑨원이 이미 결혼하여 애가 셋이고.

 첩실 또한 셋에 첩에서 낳은 자식도 있고.

 쑹칭링과 나이 차이가 스물여섯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좋다는 데 뭐.

 더 이상 내가 끼어들 바가 아니다.

 하지만 쑹칭링은 내가 더 끼어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못된 장난을 떠올린 표정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장군님, 그럼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되나요?"

 "무슨 부탁?"

 "제가 남편 될 사람 옆이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아세요? 부모님이 강제로 소환하신 거예요. 게다가 도망치지 못하게 감금까지 하고 있다니까요? 제 방 보실래요? 자물쇠를 달아놨어요. 이런 법이 어딨냐고요."

 "그럼 부탁이라는 건···."

 "제 탈출을 도와주세요!"

 쑹칭링의 눈빛이 정열적으로 이글거렸다.

 이게 사랑에 빠진 아가씨의 눈인가.

 "남의 집안 사정에 함부로 끼어들 순 없소."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제 부탁은 저와 시내에 데이트를 나가달라는 거예요. 한 장군님은 젊은데다 능력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하셨으니 아버지는 당연히 좋아라하시겠지요. 번화가에 도착하면 저는 상하이항에 가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탈 거에요. 장군님은 그저 아버지께 제가 갑자기 사라졌노라 말씀하시면 돼요."

 "걱정하실 텐데."

 "편지를 남길 거니까 괜찮아요. 어때요? 장군님께 실례인 줄은 알지만, 감히 부탁드려봐요."

 쑨원과 쑹칭링의 사랑을 반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도울 필요까지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소. 미안하오."

 "치."

 쑹칭링은 토라져 버렸다.

 ***

 쑹자수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가는 길. 

 쑹자수가 다가왔다.

 "어젯밤은 미안했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장군을 혼자 두었으니."

 "칭링씨가 있었으니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거 다행이구먼. 재밌었소?"

 "예."

 "좋군, 좋아. 언제든 찾아오시오. 우리 집은 항상 장군을 위해 열려있소."

 눈에 띄게 신나 보이는 쑹자수를 뒤로하고 객실로 돌아왔다.

 상하이의 일이 거진 마무리되었으니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짐을 거의 다 싸가는데 쑹자수가 헐레벌떡 객실을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칭링이 여기 왔소?"

 "아니요."

 "안 왔다고?"

 "칭링씨와는 어제저녁에 뵙고 다시 만난 적 없습니다."

 "그, 그럴 수가! 분명 한신 장군과 약속이 있다고 집을 나섰건만!"

 쑹자수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칭링이···, 칭링이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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