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08)

22개조 요구

 쑹칭링 실종 소동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베개 밑에서 사랑을 찾아 도쿄로 떠난다는 편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쑹자수의 시름 어린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상하이를 떠났다.

 우창으로 돌아와서는 참전군의 훈련에 힘썼다.

 비록 칭다오 공략전의 경험이 있는 군대라곤 하나, 그건 진짜 전쟁에 비하면 나들이였지.

 가장 기초적인 제식훈련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우창군관학교의 경험이 있는 장교들은 자기들이 구른 만큼 병사들을 똑같이 굴렸다.

 몰래 숨어서 훈련을 참관하는 일은 내 작은 도락이 되었다.

 "뒤로 돌아!"

 "하나, 둘!"

 "앞으로 가!"

 "하나, 둘!"

 제법 오와 열을 맞춘 병사들.

 처음 부임했을 당시 차렷 자세 하나 제대로 하는 병사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늠름하던 병사들은 좌향과 우향을 바꾸어 걸을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악몽의 발 바꾸기에 이르자 무수한 탈락자들이 나타났다.

 "엎드려!"

 "하나, 둘!"

 "하나에 정신! 둘에 무장! 하나!"

 "정신!"

 "둘!"

 "무장!"

 좋아 시작하는구나.

 야매로 행해지던 얼차려를 체계화하여 군기 훈련 요강을 만들었다.

 "목소리가 작다!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고 싶나!"

 "아닙니다!"

 "목소리 두배로!"

 "아닙니다!!"

 저것도 매뉴얼에 있는 대사다.

 잘하고 있어, 제군들.

 흙바닥에서 많이 구를수록 강군이 된다는 법칙은 인류가 망하기 전까지는 지속될 거야.

 보병대야 저렇게 몸으로 때우면 되는데.

 문제는 포병대였다. 병과의 특성상 훈련이 까다로웠다.

 결국에는 실사격 훈련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와야지.

 지금으로서는 포탄을 나르기 위해 근력이나 키울 뿐이었다.

 사격지휘병의 양성은 또 다른 문제라 포병과를 나온 장교들이 병사를 새로 교육해야만 했으니, 수고가 두배로 들었다.

 그저 지독한 훈련의 나날.

 1914년의 겨울은 무심히 지나갔다.

 ***

 새해가 밝았다.

 베이징에서 몰래 온 손님이 있었다.

 량치차오와 차이어. 두 사람 다 중화민국을 떠받치는 고위 관리임에도 수행원 하나 없이 행색이 남루하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정무는···."

 량치차오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있소."

 "더 나쁜 것부터 듣지요."

 "일본이 22개조에 달하는 요구사항을 전해왔소."

 22개조?

 원역사의 21개조보다 한 개가 더 늘었네.

 "어떤 요구사항입니까?"

 량치차오가 묵묵히 서류를 건넸다.

 빠르게 읽어나갔다.

 제1항목은 산둥성의 권익을 탐하는 4개 조항.

 칭다오 공략전 당시 목숨을 잃은 일본군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일부 지역의 조차권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산둥 등지의 철도 부설권까지 요구하고 있으니 산둥을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제2항목은 남만주와 내몽골의 이권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7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뤼순, 다롄을 포함한 관동(關東)지역의 조차권 연장을 요구하며.

 각종 농경, 상공업, 광산, 철도 등의 이권까지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제3항목에 이르자 절로 욕이 올라왔다. 뜬금없이 한야평공사의 공동 경영을 요구하는 2개의 조항이 쓰여있었다.

 분명 몇 년 전에 미쓰이 물산의 일본인들과 담판을 지어 한양은행이 정당하게 지배권을 얻었을 텐데.

 게다가 공사라고는 하지만 후베이성 지방정부와 좀 관련이 있을 뿐, 이미 민간회사나 다름없다.

 어디서 내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려고?

 제4항목은 중국의 영토를 타국에 할양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자기들만 먹겠다는 심보가 아주 고약했다.

 제5항목은 중국 전체에 적용되는 8개조였다.

 화남과 화중 지방의 철도 부설권, 외국 차관 도입 시 일본의 허락을 맡을 것, 재정 및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할 것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22조.

 잘못 읽었나 다시 살펴보는데. 

 진짜였다.

 제22조. 일본군을 기만하고 천황을 모욕한 후베이성 도독이자 참전군의 군단장인 한신은 진심 어린 사죄문을 작성한 후, 도쿄의 천황이 있는 궁궐을 향해 요배(遙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본 왕을 향하여 하는 절)한다.

 이게 맞아?

 국가가 개인을 특정하여 사죄를 요구한다고?

 웃음이 나왔다. 웃겨서가 아니라 황당해서.

 "다 읽으셨소?"

 "예. 마지막 요구가 재밌네요."

 "나도 내 눈을 의심했소. 이 요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칭다오 공략전 이후, 한신 도독은 중국 전역의 그 누구보다 일본이 제거하고 싶어 하는 대상 일 순위에 올랐다는 거요."

 "그런 것 같군요."

 량치차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해당 22개조 요구는 외교부를 비롯하여 아직 내각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안이오. 오직 대총통과 일본 공사 사이에서 은밀하게 오간 외교문서라오."

 "그런데 용케 구하셨군요."

 "실은 영국 공사에서 구해다 준 거라오. 본래 외교적 제안이 있으면 마땅히 외교부에 연락을 먼저 해야 할 것인데, 일본 공사는 절차를 무시하고 대총통에게 직접 접근했소. 이는 곧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보지 않는다는 표시이니 그저 모욕적일 뿐이오."

 량치차오가 한탄하는 사이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찌해야 할까.

 선택의 갈림길인가.

 원역사에서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

 전쟁까지 불사할 것 같던 일본군의 위협이 두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참전군이 있고, 영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일본이 다 씹고 총력전을 벌여온다면 상당히 골치 아프겠지만.

 러일전쟁 당시 1년가량 진행됐던 전쟁에 일본의 국가재정이 거덜 났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일본이 떠오르는 신흥강국이라 해도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역량이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 같은 요구는 지도부에 대한 겁박이다.

 대총통 위안스카이 개인을 협박하는 거다.

 지도층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중요시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수렁에 빠지기보다는 조금 손해 보는 편한 길을 택할 거라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올인 뻥카다.

 네가 내 판돈 다 받을 수 있어? 다 받았다가는 한 번에 게임이 끝날 텐데?

 그러지 말고 조금 손해 보면서 이 판만 나한테 내놔. 괜찮잖아, 이정도는···, 같은 식이다.

 실상은 지도 쫄리면서.

 올인 싸움으로 가면 자기도 이쪽을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면서.

 이깟 21개조, 아니 22개조 요구 따위 쌉소리로 무시해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일본은 감히 전쟁을 걸어오지 못할 거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량치차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외교부장관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는 오히려 전략의 천재께 식견을 얻으러 왔소."

 "제 의견은 '불가'입니다."

 차이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면 량치차오는 수심에 잠겼다.

 "나는 정치사 연구를 많이 했다오. 도독께 실례지만 바로 옆 나라, 조선이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 아니오? 일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저들이 자칫 무력을 동원할 수 있으니 나는 그것이 두렵소."

 "괜찮습니다. 차이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있고요."

 량치차오가 차이어와 내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소···?"

 "그보다 문제는 위안스카이를 제지하는 겁니다. 대총통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버리면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는 말짱 헛것이 될 테니까요."

 "말 잘 꺼냈소. 처음에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있다고 하였지. 이제 할 얘기가 그나마 덜 나쁜 소식이오."

 "뭡니까?"

 "대총통이 군주정의 복고를 원한다는 소문을 아시오?"

 소문이랄 것도 없다.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니까.

 상하이의 쑹칭링이 위안스카이의 황후가 되겠다 농담할 정도면, 중화민국에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얘기.

 "예. 압니다."

 "그동안 나는 뜬 소리로 치부했으나 얼마 전 직접적인 복고 시도를 보았소. 우리는 어렵게 세운 공화정의 근간을 흔들려는 대총통을 보고 급히 베이징을 탈출하여 한 도독을 찾은 것이오."

 "무슨 시도였습니까?"

 "얼마 전에 그간 지지부진했던 헌법대강(憲法大綱)이 완성되었잖소."

 "그렇지요."

 제헌의회가 조직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쑹자오런의 강한 의지에 의해 드디어 의회는 일하기 시작했고 헌법 초안이 완성되었다.

 골자는 당연히 의원내각제의 원칙에 입각하여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총통을 약화하는 것.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대총통은 의회의 헌법 초안을 보고 대노했다고 하오. 그에 따른 반발로 의회해산권을 발동하려 하고 있소."

 "총선을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명분은 있습니까?"

 "의회가 하는 일도 없이 세금만 축내는 도둑집단이라 매도하고 있소.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시일이 제법 지났음에도 특별한 정책적 성과가 없다는 점도 지적하오."

 "그건 대총통이 죄다 막아서 그런 거잖습니까."

 의회해산권은 약법 제정 당시 내가 대총통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끼워 넣은 조항.

 언뜻 막강한 파워를 쥐어준 것 같지만 실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명분 없이 의회를 해산해서 뭐 어쩔 건가.

 총선거는 바로 치러질 거고 강제로 해산당한 공화당은 더 큰 의석수를 차지하며 승리할 텐데.

 혹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노리나?

 그것도 쉽지 않을 거다. 여전히 북양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은 화북의 몇 개 성뿐.

 지방정부의 세력이 강한 화중과 화남에서 섣불리 선거에 개입했다가는 도리어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을 위안스카이가 모를 리 없다.

 아니면 선거가 치뤄지기 전, 그 틈을 노리는 건가.

  

 "아직 끝이 아니라오. 대총통은 의회가 해산된 사이, 특별 대회를 개최하여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려고 획책하고 있소."

 진짜네.

 량치차오가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신문을 한 아름 꺼냈다.

 "이걸 보시오."

 <아시아일보>, <중국일보>, <베이징일보> 등등의 신문 사설에 군주제를 옹호하는 글이 실려있었다.

 신해혁명의 공화제는 성급했으며 중국 백성들도 군주제의 복귀를 바라고 있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

 "신문은 다 다른데, 어째 한 사람이 쓴 것 같습니다."

 "죄다 어용신문이니 그럴 만도 하오. 그나마 <순천시보> 같은 신문이 객관적으로 평하더군. '공화국에서 황제가 되고 싶어 하다니, 자신이 나폴레옹이라도 된다고 여기는 건가? 하지만 그 대단하다던 나폴레옹도 말년에는 비참하였다'라는 비평이었소."

 "나폴레옹이라기보다는 조조와 비교해야 하지 않을까요. 난세의 간웅이라는 점이 꼭 닮았습니다."

 "그렇군. 조조가 적당하구려.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공화제의 수호자처럼 굴며 뒤로는 군주제의 여론조성에 몰두 중이오. 이러다가는 한번 큰일이 나고 말 거요."

 정말 나쁜 일과 더 나쁜 일이구만.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할 야심을 품는 도중, 일본이 22개조 요구를 가해오다니.

 "차이 장군은 베이징에서 아예 탈출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놈들이 장군부라는 되도 않는 수작으로 절 옥죄려 하니 강제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불러들이면 어떡합니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해야지요. 윈난성으로 돌아가 군대를 모을 겁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위안스카이가 제제(帝制, 군주제로 되돌리는 것)를 단행한다면 거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방의 차이어라면 우군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장관님은요?"

 "나야 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거요. 후베이성까지 온 것은, 물론 제자 가는 길을 멀리 배웅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 도독을 만나 조언을 듣기 위함이었소."

 "제가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아니오. 단호하게 말해주는 도독 덕에 자신이 생겼소."

 나는 두 개의 나쁜 일들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베이징에 가서 기다리시면 제가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

 량치차오와 차이어가 떠나고 며칠 후.

 베이징에서 대총통의 직인이 찍힌 교서가 내려왔다.

 「후베이성 도독, 한신은 참전군의 공무가 끝났으면 조속히 장군부로 복귀할 것.」

 알아서 베이징으로 불러주네.

 물론 '조속히'를 붙여 복귀를 급히 원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22개조 요구를 수용하려면 제22조의 당사자가 필요하겠지.

 천황이 한신의 사과를 바란다고?

 내가 고개 숙이는 건 우리 아빠밖에 없거든?

 그깟 허무맹랑한 요구는 잘근잘근 씹어줄 테다.

 대총통이 날 부른다면 가야지.

 물론 혼자 갈 생각은 없다.

 우리 친구들도 뼈 빠지게 훈련했는데. 보람을 맛봐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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