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08)

중국의 정당한 황제

 펑궈장은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총통부의 문을 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그거 아십니까? 새해에 조상님의 묘를 찾았는데 등나무가 새로 자라 마치 용과같이 뻗어있더군요."

 "허허, 그러냐?"

 "점쟁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올해 운수가 대통할 징조라고 합니다. 온갖 언론에서 아버님이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얼른 마음의 결정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이 <순천시보>를 보십시오. 객관적이고 공정하기로 소문난 신문조차 아버님의 제제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펑궈장은 작정하고 인기척을 냈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누구냐?"

 "펑궈장입니다."

 잠시 후, 대총통의 방에서 절름발이가 발을 질질 끌며 나왔다.

 스쳐 지나가며 눈을 흘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름발이가 나간 후에야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와 독대할 수 있었다.

 "아드님과 사이가 돈독하시군요."

 "용건이나 말해라."

 펑궈장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에게 육군 장관 자리를 빼앗긴 돤치루이는 심통이 났는지 낙향해버렸고.

 왕스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산신령처럼 뒷짐만 지고 있다.

 대총통이 엇나가고 있다면 충언을 할 사람은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다.

 비록 욕을 먹을지라도 군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지적하는 것이 충신의 길이다.

 "세간에 이상한 얘기가 떠돕니다."

 "뭐?"

 "말하기 송구스럽지만, 각하께서 군주제의 부활을 원한다는 얘기가···."

 "뭐, 누가?"

 "요즘 시내에 나가면 온통 그 소리뿐입니다."

 "그으래?"

 어쩐지 위안스카이는 싱글거리며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펑궈장은 좀 더 강하게 말했다.

 "각하, 이미 의회에서 헌법대강을 발표하여 중화민국은 확고한 공화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제제를 시도했다가는 중국 전역에 반발이 심할 겁니다."

 "누가 뭐래냐? 누가 군주제 부활시킨데?"

 "그, 그럼 뜬소문인 걸로···?"

 "당연하지! 야, 펑궈장. 나는 대총통 자리에 오르면서 공화제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 하겠느냐."

 펑궈장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약간의 의구심이 남아 다시 물었다.

 "의도치 않게 조금 전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아드님께서 군주제의 복고를 상당히 원하는 것 같더군요."

 "위안커딩(袁克定), 그 녀석은 말에서 떨어져 평생 절름발이로 살 처지다. 아비 된 도리로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겠냐?"

 "아, 그렇군요."

 "내 나이가 벌써 쉰 여덟이다. 지금껏 우리 가문에 예순을 넘긴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황제가 되더라도 얼마나 살겠냐? 게다가 커딩을 포함하여 내 아들들은 죄다 어리석은 녀석들 뿐이야. 보위를 물려줄 수도 없다. 허황된 황제의 욕심 따윈 품지 않아."

 "역시!"

 그럼 그렇지. 온갖 평지풍파를 이겨내고 대총통까지 되신 각하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정치 감각을 가진 분인데 판단을 잘못하실 리 없지.

 "그것보다 한신에 관한 건은 어떠냐?"

 "장군부로 귀환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아직 답신이 없습니다."

 "뇌물도, 주색잡기도 통하지 않는다니. 아예 베이징에서 눈 딱 감고 콱! 해버리는 건 어떠냐?"

 펑궈장은 반색했다.

 찢어 죽이고 싶던 한신을 이번에야말로 끝장낼 수 있는 건가?

 "후베이성에 틀어박힌 놈을 사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확실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사건을 일으켰다가는 내전이 터지겠지···."

 "그놈은 위험합니다. 감수하여 제거할 가치가 있습니다."

 한동안 묵묵히 있던 위안스카이가 문득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흥, 단순 사과라니. 정 요구하는 김에 목이라도 청할 것이지."

 "예?"

 "아냐. 혼잣말이다."

 무슨 말이지?

 펑궈장이 고민하는데 위안스카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한신에게 다시 한번 교서를 내려라. 장군부의 업무가 바쁘니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면 항명으로 여기겠다고 적어라."

 "그, 그럼?"

 "그래. 놈이 나타나면···. 뭐 알아서 잘 처리해라."

 "예."

 펑궈장은 공손히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들어갈 때는 한껏 시름에 찼었으나.

 나올 때는 묵은 변을 다 배출한 것처럼 시원했다.

 역시 대총통 각하.

 믿고 따른 보람이 있다.

 위안스카이의 집안에 예순살을 넘긴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북양삼걸 중 현재 가장 신임을 받는 사람은 본인.

 북양파에서 차기 대총통이 나온다면 자신이 가장 유력하다.

 여기에 일이 잘 풀린다면 한신까지 제거할 수 있다니.

 그놈이 마지막 가는 길은 두 눈으로 꼭 보고 말리라.

 위안스카이를 이어 대총통이 될 생각에 꿈에 부푼 펑궈장.

 그러나 그가 나간 후 총통부 집무실에서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저 눈치 없는 새끼···, 감히 내 앞길을 겁박해···?"

 ***

 한신의 베이징 복귀.

 그러나 그 방식은 위안스카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게 다 뭐야···?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냐?"

 베이징의 시내로 군인들이 밀어닥쳤다.

 보병 1개 연대의 병력. 그 수는 일천을 훌쩍 넘겼다.

 마치 점령군이나 다름없는 시위인데도 시민들은 그저 좋다고 나와서 환호해 댔다.

 한신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위안스카이는 곧바로 호출했다. 

 단단히 호통치리라 결심했다.

 여느 때처럼 밉살스러운 조선놈이 건들거리며 나타났다.

 "왔는가."

 "예. 각하."

 "시내에 주둔한 병사들은 대체 뭔가? 누가 자네에게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허락하였단 말인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온 것은 군법에 따라 반역으로도 볼 수 있음이야!"

 불호령에도 한신은 천하 태평한 얼굴이었다.

 "반역이라니요. 농담이 심하십니다. 분명 칭다오 공략전 이후 장군부에서 이루어진 사후 강평에서 전술 연구를 위해 참전군의 기동 시범을 보이기로 예정하지 않았습니까? 밖에 있는 부대는 그걸 위한 병사들입니다."

 "···그렇다고?"

 "예. 장군부는 대총통 직속의 군사고문 기관이잖습니까. 모든 회의 기록은 각하께 올라가니 분명 아시리라 생각했는데요. 장군부에 조속히 복귀를 명하신 이유가 기동 시범 때문 아니었습니까? 급히 병사를 준비하느라 고생하였는데 말씀을 그리하시면 섭섭합니다."

 쳇. 그깟 장군부 회의록 따위 읽겠냐고.

 일단은 불쾌했으나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신을 베이징으로 불러 암살할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한신의 병사들에 북양정부가 압박당하는 꼴이라니.

 주변을 은밀히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본래 한신을 베이징으로 소환한 것은 일본의 22개조 요구 때문.

 중국이 자기들 속국인 것처럼 구는 일본놈들은 재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요구를 거절할 만한 힘도 없다.

 이미 일본에서 빌린 외환만 수억 위안에 달한다.

 눈꼴시려도 그들의 요구를 거역할 수단이 없다.

 위안스카이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애국자지?"

 "애국이요?"

 "자네의 핏줄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자들도 있지만 지금껏 보여준 자네의 행보는 중화민국의 애국지사라 불리기에 부끄러움이 없어."

 "뭐, 훈장도 받았으니 많은 분이 인정해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좋아, 좋아."

 위안스카이는 부드러운 말로 상대를 안심시키며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자네의 작은 희생으로 중화민국 전체가 큰 이득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하지요."

 좋아, 걸려들었어.

 "그래서 말인데···, 일본에서 자네에게 간단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네."

 "뭐에 대해서 말입니까?"

 "글쎄···. 자네가 칭다오 공략전 당시 일본군 중장과 설전을 벌였다더군."

 "사실입니다."

 한신이 의외로 선선히 인정하자 위안스카이는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일본군의 희생을 비웃고 천황을 모욕했다던데···. 그 일을 두고 사과를 요구하는 거야."

 "그건 이상하군요. 비웃거나 모욕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군의 희생에 감사를 표했었지요. 천황은 입에 담은 바도 없으며 육사의 선배께 인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나야 잘 모르지만, 저쪽에서 받아들이기에 따라 기분이 나빴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일본은 자네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어."

 한신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놀라거나 긴장하는 낌새도 없었다.

 한신이 여유를 부릴수록 위안스카이는 저도 모르게 조급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떤가? 자네가 고개만 한번 숙이면 4억 백성이 두 발 편히 뻗고 잠이 들 수 있을 거야. 사과할 마음이 있나?"

 "없습니다."

 "···스스로를 애국자라 칭하면서. 작은 희생도 받아들이기 싫다는 거로군."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더 큰 희생을 감내하며 중국이 훨씬 거대한 이득을 얻길 원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위안스카이는 언뜻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한신이 보란 듯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22개조 요구를 수용하는 것 따위를 중국의 이득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대신 열강의 부당한 압력에 굴종하지 않고 이겨내는 모습이 시민들에게 희망이 될 겁니다."

 예감은 현실이 되고.

 겨우 몇 마디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일본에 굴복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 베이징은 채 사흘을 버티지 못할 거야."

 "누가 그럽니까?"

 "돤치루이."

 "우리의 전(前) 육군부장관께서 다소 과장하셨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격보다 수비가 쉬운 시대이니. 3일이 아니라 3년이라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일본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질 테고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겠지요. 그럼 중국의 승리입니다."

 젠장! 그럼 중국 경제는? 내 재산은?

 위안스카이는 욕이 절로 나왔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 잘 먹고 잘살아 떵떵거리려고 하는 일인데.

 베이징 코앞에서 3년간의 전쟁이라니.

 끔찍하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위안스카이는 조용히 한신을 내보냈다.

 역시 이놈의 공화제가 문제다.

 명색이 대총통이라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뭐만 하려면 여기에 의견을 구하고, 저기에 인가를 받고···.

 지방정부 버러지들은 사사건건 탈세로 자기들 몸집 불릴 생각이나 하지 중앙정부에 눈곱만큼의 충성심도 없다.

 이게 무슨 나라냐!

 역시 중국은 강력한 군주제가 어울린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위안스카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간의 인생에서 몇번의 커다란 갈림길이 있었다.

 그때마다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자부하는 위안스카이였다.

 광서제를 독살하고 서태후의 편에 섰을 때는, 이후의 삶은 일사천리로 풀릴 거로 생각했었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끌어내리고 대총통에 선출되었을 때는, 이제 자신의 앞날에 영광만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생은 좀처럼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복병이 나타나 자신을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다르다.

 정말 마지막 선택이 될 거다.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는 선택이 될 거다.

 서류고를 뒤적여 장군부의 회의록을 찾았다.

 과연 한신이 말한 대로 참전군의 기동 시범이 예고되어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조용히 그 부분을 찢어 장작불로 던졌다.

 물론 증언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차이어와 한신을 제외한 장군부 고문들은 모두 북양파에 포섭되었으니.

 이로써 증거는 완벽히 인멸했다.

 위안스카이는 은밀히 펑궈장을 불렀다.

 "베이징의 제7사단을 움직여라. 한신이 함부로 군대를 준동한 혐의를 물어라."

 "···놈이 군사를 끌고 온 탓에 자칫 싸움이 크게 번질 수도 있습니다."

 "놈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면 진압은 어렵지 않다. 명분은 우리에 있어."

 "하지만 제7사단을 움직이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무시해."

 펑궈장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는 멈추지 않고 밀어붙였다.

 "한신을 제압한 후에는 의회를 해산한다."

 "각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론을 조심해야···."

 "그다음에는 제위에 오를 거다."

 "예?"

 "아직 중국은 공화제를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혼란기를 수습하려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가 필요하니, 내가 황제가 되어 헌신하겠다."

 펑궈장은 싸늘한 시선으로 위안스카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아무런 대답 없이 몸을 휙 돌려 나가버렸다.

 "저 무례한 새끼! 야! 마음대로 어디 가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펑궈장.

 저 새끼는 싸가지가 글러 먹었어. 이래서 돤치루이를 기용했던 것인데.

 하지만 돤치루이는 육군부장관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있다.

 남은 것은 왕스전···.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여 불러보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대답이 나왔다.

 "그러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군주제 부활을 원하는 목소리가 많사옵니다."

 "그러냐?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저와 친분이 있는 장쑤성의 도독 장쉰(張勳)이 난징에 3만 병력을 주둔 중이니, 그 병사들을 불러오면 될 겁니다. 중앙군 소속이 아니므로 의회의 의결도 필요 없는 군대입니다."

 "좋아, 좋아! 역시 북양의 용답구나, 왕스전."

 "과찬이십니다."

 생전 일을 시키지 않던 왕스전에게 중책을 맡긴 위안스카이.

 그저 잘 해내리라 믿을 뿐이었다.

 ***

 장쑤성 난징.

 장쉰은 먹었던 가는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뭐? 군주제를 부활시킨다고?"

 "예. 대총통이 황제의 즉위를 노린답니다."

 "제깟 놈이 무슨? 중국의 정당한 황제 폐하는 자금성에 계시는 한 분뿐이시다."

 "어쨌건 베이징에서는 출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기회야! 당장 출동이다!"

 급한 대로 10개 대대 5,000여명이 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장쉰은 생각했다.

 '폐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소신이 청조가 건재함을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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