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당한 황제2
참전군의 보병연대는 베이징시 외곽에 주둔했다.
중국 대륙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정치, 사법, 행정을 아우르는 중심지는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중심지의 장악은 권력 쟁탈의 핵심이 된다.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전횡은 슬슬 도를 넘고 있다.
어떻게든 끝맺음이 필요한 때가 왔다.
그런 의미에서 1개 연대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가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
그럼에도 그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잘 훈련된 1개 연대가 작정하고 수도의 행정부를 장악하려 나선다면 아침에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끝맺을 수 있을 거다.
물론 다짜고짜 그런 짓을 벌이면 쿠데타에 불과하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따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색다른 방면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통신의 발달은 20세기 지구의 체감면적을 크게 줄였다.
이미 전장 바깥에서는 총과 포탄, 그 이상의 강력하고 새로운 파워가 자라나고 있다.
"정말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22개조 요구를 정부에서 수용하려 한다고요?"
"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이 이러이러한 요구를 해왔고 북양정부에서 또 어떠어떠한 말을 들었다고 알려드렸을 뿐이지요."
"그 말이 그 말인데···."
"떽! 다릅니다. 저는 어떤 추측의 말도 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드린 겁니다."
<베이징 타임즈>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신문사.
주요 일간지들에 밀려 보는 사람만 보는 평범한 신문이지만, 한양은행의 간택을 받아 이제 소유권이 내게 넘어왔다.
앞으로는 각종 정재계 찌라시들을 공급받을 것이니 신뢰받는 국가 정론지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가 크다.
"그럼 바로 내일 특종 발행하는 걸로···!"
"내일 낸다면, 몇부나 가능합니까?"
"저희 기계로는 일단 500부 정도···, 입니다."
"그걸로 뭘 하겠습니까. 한양은행에 문의해서 자금 지원을 받고, 인쇄기를 임대하여 최소 5,000부 이상 발행하는 방향으로 가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내 손으로 제보하고 기사를 내도록 지시하는 것이 민망하긴 하지만.
뭐, 어때. 국민들도 알 건 알아야지.
여론전을 준비한 후에는 외교부장관 량치차오를 대동하고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의 공사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규탄하고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유럽의 전세가 급박하여 도움은 줄 수 없다는 것.
그나마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이 영국 공사였다.
"바너디스턴 소장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장군을 칭찬하더군요. 저 역시 칭다오 공략전에서 드러난 중국군의 실력에 크게 놀랐습니다."
"영국군의 도움이 컸지요."
"하하. 그럴 리가요. 바너디스턴 소장은 자신이 그저 엄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아이 같았다고 술회하던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영국 공사는 지난번 만났을 때 다소 거칠었던 말투도 순화하여 훨씬 온화하게 대해왔다.
"이번에 은밀히 진행되던 일본의 22개조 요구를 파악하고 외교부에 전달한 것이 공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사님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요구가 있는지도 모르고 밀실 협상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니,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별말씀을. 대영제국 정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일본의 세력 팽창을 주시해왔습니다. 이번처럼 세계의 이목이 유럽에 쏠린 틈을 타 제국주의적 행보를 감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보에 대한 대비도 생각해 놓은 게 있으신지요."
지금껏 활기차게 말을 잇던 영국 공사가 뜸을 들였다.
여타 열강들과 비슷한 내용의 답변이 흘러나왔다.
"유럽의 전황이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돕고 싶어도 도울 여력이 없습니다. 가능한 것은 외교적 중재 정도입니다만. 이미 칭다오 공략전 당시, 중립 요구를 무시한 일본에 항의하였으나 천황에게 재가를 올린 사안은 취소할 수 없다는 헛소리나 늘어놓았던 전력이 있으니. 중재가 먹힐지는 모르겠습니다."
"22개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일본이 더 강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만 명색이 같은 협상국의 처지에 설마 전쟁까지 선포하겠습니까? 일단은 유럽의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인력과 자원을 빨아먹고 있는 그 대전쟁이 끝나야 뭐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상태에서 영국에 더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열강들의 여론은 중국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공사관 순회를 마치고 나오자.
부관 리페이양이 괴상한 뉴스를 들고 왔다.
"장쑤성 도독 장쉰이 5,000여 병력을 이끌고 북상 중이랍니다. 오늘 저녁 내로 톈진에 도착할듯싶습니다."
"장쉰?"
모두가 혁명을 외칠 때 홀로 굳건히 충심을 지킨 청나라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장쉰 장군.
아직 움직이기에는 때가 이른데.
내 개입으로 인해 시간선이 슬슬 꼬여가기 시작하는 건가.
"어떻게 할까요?"
"북상의 목적은?"
"그것이 오리무중입니다. 사람을 풀어 알아볼까요?"
"아니, 됐다."
장쉰이 베이징에 들어오려 한다면 그 목적이야 한 가지뿐이다.
자금성에 갇혀있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다시 옥좌에 앉히는 것.
그러나 굳이 타이밍이 지금일 이유가 뭘까.
나는 급히 국회에서 숙식 중인 쑹자오런을 찾았다.
그는 여전했다. 밖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헌법조문을 구성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총리님."
"어? 한신 도독님, 오랜만입니다. 아니, 이젠 국사무쌍의 장군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나요."
국회는 넓고 웅장했다.
의석을 훑으며 쑹자오런에게 말했다.
"헌법대강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대로 제정만 된다면 중화민국은 만인이 인정하는 공화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겠더군요."
"그렇지요? 조문 하나하나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보람이 있네요. 통과만 되면 이제 대총통은 허울뿐인 자리로 남고 책임의원내각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겁니다."
"헌법대강이 통과되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표결을 준비해야 하니까 다음 주는 되어야 합니다."
다음 주면 너무 늦다.
나는 쑹자오런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총리님,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저한테요?"
"국회 전체에요."
전체 국회의원 수는 870명.
그중 공화당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범여권 집합이 대략 600여명이 된다.
이번 작전에는 그들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아군 의원들을 국회로 모아 정족수를 채우는 대로 헌법대강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
"어···. 왜죠?"
"대총통은 며칠 내로 의회해산권을 발동할 겁니다."
"엑? 헌법 제정을 막으려는 시도입니까?"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뒤에 더 큰 것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더 큰 거란 말에 쑹자오런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나는 쑹자오런의 양 어깨를 잡았다.
"총리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우창 봉기가 터진 후 저는 곧바로 달려가 도독님께 지지를 부탁드렸었지요."
"당시 청국 황제의 통치 아래서도 총리님은 공화를 말하고, 책임내각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지기 직전입니다."
"멀리 왔군요."
쑹자오런의 뒤로 그가 잠을 자는 초라한 나무 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에는 쌀가루 죽이 말라붙은 그릇이 뒹굴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흘린 땀이 짐작이 갔다.
"의회해산은 대총통의 권한으로 선포하는 거지만, 효력을 가지려면 국회에 통보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제가 국회를 봉쇄하고 해산을 통보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겠습니다."
"···?"
"총리님은 그사이에 의원들을 규합하여 헌법대강을 통과시키세요."
"봉쇄라니···. 그, 그런 짓을 베이징 한복판에서 하겠다고요?"
쑹자오런이 트라우마가 도졌는지 몸을 덜덜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님, 거의 다 왔습니다. 공화국이 눈앞에 보인다고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치 말고 할 일에 집중하십시오. 그게 우리가 바라왔던 꿈을 이루어줄 겁니다."
떨림이 멈추었다.
쑹자오런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
위안스카이는 불안한 마음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앞에서는 그의 장남, 위안커딩이 재잘대고 있었다.
"한신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목적이 뭐냐?"
"참전군의 기동 시범을 보인답니다. 아버님께도 참관을 부탁드린다고 했습니다."
"개소리! 시내에서 뭔 기동 시범? 그딴 거 허락한 적도 없다!"
"어···. 장군이 말씀드리면 알 거라던데요."
"난 모른다. 감히 국가의 녹으로 편성한 참전군을 사사로이 움직여 정부를 겁박해? 그놈을 더 이상 장군이라 부르지 마라. 놈은 파면이야. 반역도에 불과해."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대총통이 된 후에 진작 이렇게 했었어야 했다.
괜히 시간을 둬서 지방군을 육성할 여유나 줬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청조 시절부터 10년의 기한을 목표로 자신이 직접 고안했던 북양 36진 계획은 웬만큼 달성에 성공했다.
이미 신해혁명 이전 북양 6진만으로도 청나라 최강의 군대로 명성을 떨쳤었는데.
오늘날에는 북양파에 직간접적으로 소속된 사단 개수만 30여개에 이른다.
물론 그 지휘관들의 충성도는 제각각이고.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녀석이 없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고 북양파가 천하를 얻는 것이 확실시되면 그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한신을 포함하여 남방의 몇 개 지방관들이 말을 듣지 않더라도 밟아 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펑궈장은 어딨느냐?"
"휴가를 냈습니다."
"갑자기? 내게 보고도 않고?"
돤치루이에 이어서 펑궈장, 네놈도?
개 같은 녀석. 내 가문이 잘 되는 것이 그렇게 배 아팠단 말이냐?
저깟 것들을 충신이랍시고 보살펴주었다니.
위안스카이는 위안커딩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발을 다쳐 절름발이가 된 것이 흠이지만 머리는 제법 명석한 아들이다.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한 효자인 것도 마음에 든다.
자신의 황위를 계승할 황자가 있다면 이놈이겠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황위라니! 정말 손에 닿는 곳까지 왔다.
"장쉰의 병사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봐야겠다. 왕스전을 불러라."
명에 따라 왕스전을 찾으러 나갔던 위안커딩은 혼자인 채로 돌아왔다.
"왕스전은?"
"자리에 없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흠···. 뭐 일이 있겠지."
제제를 결정한 이후 한껏 신이 난 위안커딩이 또다시 재잘거렸다.
"그래서 아버님, 황제의 집무실은 어디로 할 생각이십니까?"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이 적당하다."
"거긴 너무 낡았습니다. 사용하려면 대대적으로 개축해야겠던데요."
"하면 되지. 내가 황제인데, 누가 뭐라 하느냐?"
"아하하! 맞습니다."
옥좌에, 용포에, 다시없이 휘황찬란하게 진행될 즉위식까지!
이야기를 해도 해도 장밋빛 미래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왕스전이 나타났다.
어깨가 한껏 위축되어 어딘가 기진맥진해 보였다.
"왕스전! 어디 있다 이제 오느냐?"
"장쉰 장군과 작전을 조율하느라 조금 늦었사옵니다.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죄는 무슨. 이번 일이 잘 진행된다면 일등 공신은 자네일 텐데. 그래서 장쉰은 어디쯤 왔느냐?"
"톈진에 10개대 5,000 병력이 도착하여 주둔 중입니다."
"그럼 내일이면 베이징에 입성할 수 있겠구나."
"그것이···."
왕스전이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뭐냐?"
"장쉰 장군이 의회의 해산을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위안스카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헌법을 통과시키기전에 의회해산은 당연히 하는건데.
자기가 뭐라고 먼저 요구해? 괜히 심통이 난다.
"일단 베이징으로 들어오라고 해."
"의회해산이 선행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알았으니까 불러!"
도장. 쾅!
이로써 중화민국 국회는 해산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위안스카이인데.
아버지의 제위를 위해 바삐 돌아다니던 위안커딩이 밤중에 발을 질질 끌며 급히 뛰어 들어왔다.
"아버님, 큰일 났습니다!"
"흠냐···. 뭐야? 한밤중에."
"한신 장군이···, 아니 한신 그 개자식이···!"
절로 눈이 번쩍 뜨인다.
"한신이 뭐?"
"국회 주변에 병사를 배치하고 점거 중입니다! 어느 틈엔가 국회 주변에는 의원들이 가득하고, 안에서는 헌법 제정을 두고 표결에 들어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옵니다!"
어이쿠야!
아이고 뒷목이야!
한신, 이노오오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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