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정당한 황제3 >
멀리서 새벽 동이 터 온다.
국회의 정문에 <베이징 타임즈> 특보판이 배달되어 왔다.
- 일본은 중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키려는가? 22개조의 부당한 요구를 폭로한다!
강렬한 헤드라인.
기사에는 일목요연하게 22개조가 정리되어 있었으며 상세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었다.
「···물론 일본제국의 동아시아 수탈 시도야 그간에도 꾸준히 있어 왔으나, 이번에 본지(本紙)에서 밝혀낸 22개조 요구는 그 음흉함에 있어 첫손가락에 꼽을 만하다. 산둥과 만주, 몽골의 권익을 한꺼번에 노리는 흉악함부터. 중국의 이권을 독차지하려 일본을 제외한 타국에 대한 영토불할양을 요구하고, 나아가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일본인을 초빙하라는 것은 결국 중국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막후에서 조종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
···화룡점정은 마지막 제22조다. 그간 독일은 키아우초우를 점령하고 중국 시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해 왔으나 한신 장군은 참전군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지난 일백 년간의 중국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쾌거이다. 감히 국사무쌍을 들먹이며 칭송하는 호사가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그러한 한신 장군을 특정하여 일왕에게 사죄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중국을 얕잡아보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신 장군이 난데없이 베이징으로 불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연유를 궁금해 했다. 기동훈련시범을 위해서라는 명목이 있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저 신해혁명의 기수이자 칭다오 공략전의 영웅인 한신을, 바로 일본의 22개조 요구가 날아온 직후 베이징으로 호출한 정부의 저의는 무엇인가? 정부는 타국의 압력에 굴하여 국사무쌍의 영웅을 일제의 발아래 무릎 꿇리려는 것인가? 천하대장부를 칭송하던 중국의 호협지기(豪俠之氣)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본지는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바이다···.」
나는 신문을 접었다.
벌써 거리에는 신문팔이 소년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빨아달라고는 안 했는데.
날 아주 구국의 애국지사로 만들어 놨어.
하지만 썩 유능하다고 해야겠지.
선전 효과는 과장할수록 커지니까.
보지 않아도 <베이징 타임즈> 특별 증보판의 효과는 대단하리라 짐작이 갔다.
건너편 거리에서 일단의 무리가 바삐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위안스카이와 그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장 국회로 진입하려 시도하였으나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지, 정지!"
"비켜!"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이 자식이, 내가 누군지 알고? 야, 너 뭐야? 한신이 시켰냐?"
위안스카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자 보초병이 총을 겨누었다.
놀란 위안스카이가 자리에 우뚝 섰다.
좋아, 잘 하고 있어.
가히 FM다운 수하(誰何)다.
대총통 따위, 경계근무 앞에서는 거동수상자일 뿐이라고.
그 다음엔 암구호를 물어볼 차례.
"족발!"
"뭐?"
"족발!!"
"이 새끼, 뭔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 누군지 몰라? 총통이다! 얼른 가서 너희 대장이나 불러와라!"
위안스카이의 호통에도 보초병은 아랑곳 않고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총을 들어 올렸다.
저 친구, 너무 충실해서 이번 작전 끝나면 휴가라도 줘야겠네.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잠깐!"
정문에 다가가자 위안스카이 일동이 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초병은 내게도 똑같이 총을 겨누었다.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자, 손들었습니다."
"족발!"
"당수."
"누구냐?"
"군단장이다."
"용무는?"
"밖에 있는 민간인들과 나눌 얘기가 있다."
"신원확인을 위해 앞으로 3보 이동."
"네에."
"확인."
내가 한바탕 수하를 끝내고 정문 앞에 나오자 위안스카이가 툭 쏘아붙였다.
"족발당수라니, 이게 다 뭔 지랄이냐? 일단 저 새끼부터 끌어내! 감히 중화민국 대총통에게 총을 들이밀어?"
"초병은 군령대로 한 것뿐입니다."
"닥쳐! 야, 뭐해! 저 새끼 끌고 와."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단순 행정관처럼 보이는 자가 쭈뼛쭈뼛 움직였다.
나는 행정관을 멈춰 세웠다.
"각하는 손자의 고사를 모르십니까?"
"뭐?"
"오나라의 합려는 일찍이 궁녀를 시켜 손자를 시험한 적이 있지요. 궁녀들이 군령을 따르지 않자 손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이 총애하는 궁녀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만큼 군령은 지엄한 것입니다. 우리 군은 지금 전시를 대비하여 훈련 중에 있습니다. 초병은 야전교범에 따랐을 뿐입니다. 모욕 받았다는 단순한 앙심으로 저 친구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네가 손자라도 된다는 거냐?"
"각하께서는 합려라도 되십니까?"
위안스카이는 씩씩거리더니 초병에게서 눈을 뗐다.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지금 짓거리가 훈련이라고?"
"예."
"누가 국회 앞에서 군사훈련을 하냐!"
"모르셨습니까? 현대전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것이 시가전입니다. 시내 한복판의 주요 지역을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하는 훈련은 꼭 필요합니다."
"무슨 헛소리를! 대총통령으로 당장 중지를 명한다! 이건 허가받지 않은 훈련이다! 불법적인 국회 점거 쿠데타다!"
"허가받지 않았다니요. 장군부의 회의록에 보시면···."
"자, 봐라! 네놈이 말하는 회의록이다. 어디 기록이 있느냐?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해!"
위안스카이가 검은 서책을 눈앞에 들고 흔들었다.
받아서 확인해보았다.
왜 없어?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갈 거야?
"서기가 실수했나 봅니다. 불러서 증언을 들어 보지요."
"닥쳐라! 반란군의 수괴야! 지금 당장 군사를 물리지 않으면 강제로 진압하겠다!"
점점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는 위안스카이.
국회의 내부를 연신 흘낏거리는 것으로 보아 헌법대강이 통과될까 봐 초조해 하고 있다.
이미 위안스카이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의 압력에 굴복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장수가 군대를 운영할 때는 왕의 하명도 받지 않는 법. 훈련은 끝까지 마칠 겁니다."
위안스카이는 날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그는 위협적인 상대다.
북양군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화중과 화남이 모두 연합하더라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명분이 중요하다.
22개조 요구를 폭로하여 여론을 내 쪽으로 돌리고.
의원내각제를 뼈대로 삼는 헌법을 제정하여 대총통의 지위를 식물로 만든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민의(民意)와 헌법에 있다.
그 두 개를 모두 내 편으로 돌린다.
***
위안스카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총통부로 돌아왔다.
"대체 장쉰은 언제 오는 거냐?"
"톈진을 출발했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도착했으면 째깍째깍 움직일 것이지 느려 터져서는."
한신. 그 자식.
이제 막나가겠다는 건가?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면박주기까지 한다.
조선놈 주제에 손자가 어쩌고저쩌고.
자신의 반 밖에 살지 않은 놈이 뭘 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장남, 위안커딩이 집무실에 나타났다.
얼굴만 보아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아버님···."
아들 녀석의 손에 신문이 한 부 들려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22개조 어쩌고 하는 기사 제목이 보였다.
위안스카이는 바로 직감했다.
젠장, 또 한신이다!
"기사가 사실입니까?"
"···그래."
"지금껏 군주제 복고에 신중하였던 아버님이 왜 갑자기 제제를 결심하였는지 오늘에야 알겠군요. 황위에 등극하시어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로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려는 거였군요!"
"뭐···, 그런 셈이지."
"소자, 감복하였습니다! 미리 황제 폐하께 절 올리나이다!"
<베이징 타임즈>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뒤늦게 접한 다른 언론지들도 제각기 사설을 싣기 시작하니 위안스카이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신문이 일본을 규탄할 뿐이지만.
자신이 22개조 요구 대부분을 수용할 뻔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비난의 화살은 북양정부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정오를 넘긴 시점.
일본 공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각하! 각하!"
"나 여깄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분명 이야기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걸로 알았는데, 이리 뒤통수를 치시다니. 각하 또한 그저 비열한 지나인일 뿐이었던 겁니까? 어떻게 언론사에, 그것도 미국 언론사에 정보를 흘릴 수 있습니까!"
쪽바리 새끼가.
감히 어느 면전에.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위안스카이는 일단 굽히고 들어갔다.
이자가 입을 열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자신의 편으로 두어야 한다.
"정보를 흘린 건 내가 아니야. 오히려 일본 공사관 측이 의심스러운데? 공사관 직원들을 모두 믿을 수 있는가?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니고?"
"무슨 그런! 절대 아닙니다!"
"어쨌건 나는 모르는 일일세."
탐탁지 않은 표정의 일본 공사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여론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만일 중국 민중이 반발하여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일본군이 진압해드릴 테니까요."
위안스카이는 대답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비록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는 했으나.
본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다.
"한가 놈에게는 말 해보셨습니까?"
"그래."
"사죄하겠답니까?"
"아니."
"그럼 그렇지. 찢어 죽일 새끼 같으니라고."
위안스카이는 충고하듯 말했다.
"이봐, 제22조는 아무래도 어렵겠어. 한신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다고. 한신이 일본에 고개 숙인다면, 민중들은 곧 중국이 일본에 고개 숙이는 것으로 받아들일 거야."
"뭐, 잘못한 게 있으면 중국이 일본에 고개 숙일 수도 있는 거지요."
대관절 뭔 잘못을 했는데?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황급히 삼키는 위안스카이.
"일단은 알겠습니다. 여론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상황이 바뀌는 기척이 있으면 지속적으로 알려주십시오. 각하께서는 일본제국과 협력의 길을 걷기로 하셨으며, 그건 최고의 선택입니다. 톈진의 조계에 지나주둔군 1,500명이 대기 중입니다. 유사시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일본 공사가 방을 나간 후에 위안스카이는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을걸. 아무리 염치가 없기로서니 중화제국의 황제가 일본군의 도움을 받을까 봐?
장쉰의 병력만 도착하면 만사가 해결된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기다리다 깜빡 졸았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둥···!
둥···!
둥···!
북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청나라의 전통 북소리였다.
위안스카이는 재빨리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열의 선두에 갈색 말을 타고 청나라 전통 장삼을 걸친 장쉰이 보였다.
그 뒤로는 변발을 하고 총과 대도를 든 고색창연한 군대가 의기양양하게 행군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오와 열이 맞지 않고 무장도 빈약하다.
위안스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저런 꼴이라니, 내가 기다리던 부대가 이 녀석들이란 말이야?
이미 북양군은 10년 전부터 군개혁을 통해 서양식 군제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해 왔다.
으레 군대라 하면 그런 북양군을 기본으로 생각해 왔는데.
창밖의 풍경은 19세기 청나라 팔기군이 관을 박차고 튀어나온 것만 같다.
덜컥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저 자식들, 싸움은 잘 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다행인 건 보고받은 대로 병력의 수가 많았다.
5,000에 이르는 군대. 베이징의 대로가 변발한 병사들로 가득 찼다.
장쉰은 군대를 멈추지 않고 중난하이 앞까지 진군해왔다.
위안스카이는 급한 나머지 길 앞까지 마중 나갔다.
"장쉰 장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네! 지금 중화민국에 장군의 힘이 꼭 필요하다네!"
장쉰은 대꾸 없이 말 위에 앉은 채 위안스카이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키에 열등감이 있는 위안스카이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장쉰 장군? 뭐하나? 내리지 않고."
"신해년에 북양정부에 간했었소. 천자에 대한 신하의 의무를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뭐라고?"
"하지만 총통은 폐하를 자금성에 유폐하고 그저 본인의 안위 지키기에만 골몰하였지."
위안스카이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장쉰은 드높은 자금성의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가 젖어 들더니 금세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졌다.
"아! 무슨 일인가! 300년 대청국의 사직(社稷)이 이렇듯 자금성의 내조(內朝)에 건재한데, 세상은 천자의 은총에 담겼던 따듯한 밥 한 숟가락의 온기를 벌써 잊어버렸단 말인가! 폐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장쉰이 왔습니다! 대청제국은 잠깐의 부침을 거쳐 작금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다시 세계의 중심을 회복할 것입니다!"
꺼이꺼이 울어대는 장쉰을 보고 위안스카이는 뒷걸음질쳤다.
슬금슬금 걷다 종래에는 총통부 건물로 마구 내달렸다.
미친놈이란 건 확실한데 미쳐도 아주 체계적으로 미친놈이다.
"반역도를 잡아라!"
장쉰의 외침에 변자군(辨子軍, 변발군대)이 질풍처럼 달려와 위안스카이를 포박했다.
"북을 세게 쳐라! 온 천하에 대청국의 부활을 알려라!"
위안스카이는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씨발. 왕스전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