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정당한 황제4 >
신해혁명 이후 자금성 내정(內廷)은 고요하게 유지되어 왔다.
중화민국 건국 당시 약조한 <청실 우대조건>에 따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외국 군주(청국 군주)로 대우받으며 자금성에서 이전과 같은 삶을 누리고 있었다.
담 너머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청나라 소조정은 베이징 안에 떠 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적막이 깨지고 있다.
장쉰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건청문(乾淸門)을 열었다.
이곳에 중국 유일의 정당한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계신다.
익숙한, 황색과 적색의 휘황찬란한 장식이 펼쳐졌다.
장쉰은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어디선가 꺄르륵 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쉰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건드리지 마! 반칙이잖아!"
"죄송합니다. 폐하!"
"지금 좋아! 잘하고 있어! 그래, 이겨라! 죽여라!"
건청궁(乾淸宮)의 앞마당에서는 한창 귀뚜라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쉰은 몸가짐을 조심하며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부복하였다.
"폐하···!"
"옳지, 잘한다! 밀어붙여! 씹어 먹어 버려!"
아홉 살의 황제는 장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귀뚜라미 싸움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환관이 아뢰자 그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너흰 뭐야?"
"폐하! 소신은 한때 금위군의 지휘를 맡았던 장쉰이옵니다! 일찍이 선황제(先皇帝)께서 제 무위를 칭찬하며 바투루(만주어로 위대한 전사라는 뜻)의 칭호를 하사하셨으니, 그때 이후로 죽을 때까지 청조에 충성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 늙은이입니다."
"땅바닥이 그렇게 좋아? 잘 안 들리잖아. 고개를 들고 말해."
"오늘날의 중국은 도둑놈들이 장악하여 제멋대로 국사를 논하고 국고를 탐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청조의 은혜를 입은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소신이 이미 반역도들을 잡아넣었으니, 남은 것은 폐하가 다시 보위에 오르는 일뿐입니다."
장쉰이 간곡하게 아뢰었으나 황제의 표정은 알쏭달쏭하였다.
"보위가 뭐야?"
"황제의 자리를 말함입니다."
"황제가 되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귀찮은 공부에는 질렸어."
"물론입니다. 황제는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쎈 귀뚜라미도 구할 수 있어?"
"당연합니다. 이 늙은이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진짜? 좋아! 그럼 황제 할게!"
자금성을 나온 장쉰은 곧바로 위안스카이를 감금한 총통부로 향했다.
대총통이 잔뜩 성이 난 몰골로 삿대질을 해왔다.
"장쉰!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민중이 피땀 흘려 이룩한 공화정을 하루아침에 뒤엎으려 하다니!"
"무슨 소리냐, 총통. 나는 분명 군주제가 부활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상한 것인데."
"누,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정당한 절차로 선출된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감금하고 협박한 행위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야!"
"하! 닥쳐라, 매국노야! 어디서 감히 역사를 운운하느냐? 신해년의 변란 당시 너는 분명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 운운하는 벌레들과 야합하여 폐하를 옥좌에서 끌어내렸지. 오늘의 일은 하늘이 네게 업보를 내리신 거다."
손짓하자 3개조의 긴급조치가 적힌 문서가 전달되어 왔다.
장쉰은 큰 소리로 읽었다.
"첫째, 청조의 부활을 헌법에 명시한다. 둘째, 유교를 국교로 정한다. 셋째, 변자군을 금위군으로 재편성하여 전력을 증강한다. 자, 위안스카이. 어서 날인해라!"
닦달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는 도장을 들고 손을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느냐? 어서 찍으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첫째 조항에 문제가 있다. 대총통의 권한은 미약해. 아직 헌법이 제정되기도 전이라고. 헌법에 명시하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날인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국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냐? 후베이성의 한신이 제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국회를 점거하여 엉터리 헌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가히 국회 전제정을 열려는 시도이니, 그쪽을 먼저 제압하지 않고서는 청조의 부활은 요원할 것이다."
장쉰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국회 앞에 진을 친 군대는 군사훈련 중이랬는데···."
"거짓말이다! 놈들은 장군부가 관할하는 훈련이라 둘러대지만, 대총통인 내게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은 독자적인 움직임일 뿐이다! 네놈이 진정 청조를 위한다면 나대신 한신부터 구금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야."
"정말이냐? 지금 국회에서 약법 대신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고?"
"그래! 뒤떨어진 늙은이야! 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한 신헌법이다. 얼른 달려가서 막으라고!"
위안스카이의 다그침 대로 장쉰은 병사를 이끌고 국회로 향했다.
정말 단순 군사훈련이라기에는 국회를 에워싼 경비가 심히 삼엄했다.
한사코 국회 진입을 막는 보초병과 실랑이를 벌였다.
"족발이 뭐 어쨌는데?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양쪽이 총을 겨누며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불현듯 국회 안쪽에서 젊은 놈이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족발은 당수입니다. 장쉰 장군."
"너는 누구냐?"
"후베이성의 한신."
"네놈이···? 어리단 말은 들었지만 놀랍군, 그 나이에."
장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벌이는 군사훈련은 누구의 허락을 받은 사안인가."
"궁금해 하시는 분이 많군요. 장군부 관할입니다."
"대총통은 허락한 바 없다던데?"
"착오가 있으셨겠지요. 고령이니, 깜박깜박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장쉰 장군도 비슷한 연배이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놈 봐라?
이래서 유교를 법으로 정해 가르쳐야 한다.
장유유서도 모르는 놈이 장군 자리에 오르다니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나는 대총통의 인가를 받고 베이징의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거병하였다.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예. 그럼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담백한 한신의 대답에 몰아붙이던 장쉰이 오히려 당황하였다.
"진심이냐? 진심으로 베이징 중심가에서 교전을 벌이자는 거냐?"
"교전을 입에 담은 건 제가 아닌 장쉰 장군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군은 단순 기동훈련 중. 시범이 끝나면 자연히 해산할 겁니다."
장쉰은 위협적으로 어깨를 쭉 펴고 한신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감히 전투 운운해?
"나는 네놈이 엄마 젖을 빨 때 이미 청불전쟁과 청일전쟁 참전 경험이 있으며, 의화단의 난까지 진압한 전력이 있다. 네놈의 일천한 병력으로 상대가 되리라고 보느냐?"
"제가 장쉰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신해혁명 때였지요. 상하이 도독 천치메이가 생각 외로 큰 피해 없이 난징을 점령하였었는데 당시 난징에 주둔하셨던 분이 장쉰 장군 아닙니까?"
당시 일은 장쉰으로서도 답답한 부분이었다.
우창에서 봉기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징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장쑤성의 총독이라는 작자는 벌벌 떨면서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으니.
장쉰은 크게 꾸짖고 북양군 제9사단을 이끌어 혁명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상부에서 난징을 버리고 후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장쉰은 9사단의 병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나마 자신이 이끄는 변자군으로 수비해 보려 했으나 중과부적.
결국엔 천치메이의 혁명군에 난징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훗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는 것을 보고 어떤 야합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대총통을 단호하게 대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거기엔···, 사정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불대다니. 고얀 놈!"
"아무튼 선택은 장군이 하는 겁니다. 자신이 있다면 시도해보십시오."
한신은 마지막 말을 하고는 국회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장쉰은 국회를 둘러싼 군대의 진용을 살폈다.
분명 국회를 점거하고 의원들을 감금하여 국회 전제정치를 펼친다고 들었는데.
살펴보니 오히려 반대다.
모든 시야가 바깥을 향해 곤두선 가시 방패와 같은 진지.
이건 국회를 포위하는 게 아니라, 국회를 보호하는 진형이다.
좀 전에 보초병의 응대만 보아도 쉽게 볼 군대가 아니다.
전투를 벌인다면 양측이 모두 심대한 피해를 볼 거다.
장쉰은 안전하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베이징에 들어온 5,000여 병력은 선발대.
이미 난징에서 2차 출병을 준비하고 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헌법 따위 그저 뭉개도 상관없다.
헌법 위에 있는 것이 바로 황제 아닌가?
공화제를 폐하고 군주제를 복고하면 옛 주인을 그리워하던 백성들이 중국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것임이 틀림없다.
일단은 복벽이 우선이다!
온 대륙에 군주제의 부활을 화려하게 선포하는 거다!
돌아온 총통부에는 좋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감금되어 있어야 할 집무실은 텅 빈 채였다.
"감시를 맡은 놈은 어디로 간 거야?"
"실은 대총통이 자꾸만 금은보화를 약속하며 자신을 풀어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교대한 녀석은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으니. 꼬임에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망할! 대역죄인을 놓치다니! 얼른 병사를 풀어 수색해!"
"예!"
베이징에 도착한 이후로 자꾸만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겨나니.
세상 사람들이 괜히 복마전이라 떠드는 것이 아니었다.
장쉰은 꾹 참고 버티며 내각 대신들을 모아 황제의 즉위식을 준비하였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단 하나.
우국충정(憂國衷情). 청조를 위한 마음뿐이었다.
***
국회의사당 내부.
지켜보는 모든 이가 쑹자오런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개표 결과. 가(可) 602, 부(不) 2, 기권 11, 결석 255인으로 중화민국 헌법대강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쑹자오런이 의사봉을 땅땅땅 내리쳤다.
헌법 제정안이 통과되었다.
의사당 내부에서 의원들이 종이를 집어던지며 환호했다.
쑹자오런이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결국엔 성공했군요."
"아니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뭘 또 시작을···?"
"총리님이 국회에 갇혀있는 지난 며칠간, 바깥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거든요."
쑹자오런과 함께 국회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했다.
"이, 이게 대체?"
"방금 국회에서 입헌정치의 개시를 알렸는데, 자금성에서는 군주정치를 복고하려 합니다. 듣기로는 오늘 태화전에서 즉위식을 치른다더군요."
베이징의 거리에는 즉위식을 준비한답시고 변자군이 달아놓은 황룡기가 온통 휘날리고 있었다.
변발을 한 병사들이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니 쑹자오런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꼴을 보고만 있을 겁니까?"
"지금껏 제 최우선 목표는 입헌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는 방금 이루어졌으니 이제 다음 우선순위를 따져야지요."
"이미 공화정체가 중화민국에 단단히 자리 잡았는데, 황제 즉위식이라니. 이 무슨 희극이란 말입니까! 당장 중지시켜야 합니다."
"장쉰이 이미 베이징의 요충지에 변자군을 배치하여 장악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공화정은 그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것이라 그럴까.
무척 흥분한 쑹자오런이었다.
"우창에 전보를 쳐 놨습니다. 의회의 의결이 떨어지면 참전군 제2사단이 출동할 겁니다."
"그 말은···?"
"위안스카이는 총통직을 내팽개치고 도주했으며, 자금성에는 장쉰과 같은 작자가 시대착오적인 복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제가 수습할 테니, 총리님은 이후의 정치에 집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의회에서 참전군의 출병을 의결해야겠군요. 참전군이라는 말은 맞지 않으니 공화군으로 하지요."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베이징에 난위안항공학교(南苑航空學校)가 있는데 그곳의 전투자원을 공화군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쑹자오런과 헤어지고 보병대를 이끌어 베이징 남쪽으로 향했다.
장쉰의 변자군은 우리 군의 움직임을 그저 지켜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질하며 낄낄대는 변발 병사들이 보였다.
겁을 먹고 달아난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볼썽사나운 겁쟁이 꼬락서니는 너희들이 보여주게 될 거야.
난위안항공학교는 중국 최초로 항공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
수석 비행교관 리루옌(厲汝燕)은 다부진 체격의 내 또래였다.
의회의 비준을 보여주자 별다른 저항 없이 공화군의 지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작전 지시를 듣고는 적잖이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자금성을···, 폭격하란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