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판2 >
장쉰의 변발 군대.
나름대로 서구식으로 편제를 바꾸고, 손에 볼트액션 소총을 쥐여줬다지만.
그 바탕이 되는 병사들은 결국 구군(舊軍)이다.
청나라 시절부터 국고를 좀먹던 순방영과 팔기군을 재편한 군대에 불과하다.
베이징 성곽에 대치한 변자군이 5,000명, 여기에 난징에 주둔한 본대가 25,000명.
그러나 허울뿐인 숫자다.
나는 일전에 참전군을 조직하면서 기존 후베이성 신군의 병사들을 그대로 데려와 썼던 일이 있다.
그후 후베이군의 빵꾸난 병력을 순방영과 팔기군의 구군으로 채워 기존 지휘관들과 적폐 vs 적폐 대결을 유도했었다.
그런 식으로 적당히 숫자만 채워 만든 후베이군 병력도 20,000에 달한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그저 보여주기식 땜빵에 불과할 뿐.
기초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 1개 대대에 500명이 있다 치면.
그중 10초간 차려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인원이 채 10명이 되지 않았으니.
군대라기보다는 그냥 양아치 집단이다.
싸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고대로부터 유구하게 증명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사기다. 전투의지다.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는 순간 게임은 끝이다.
그리고 베이징 성곽에서 웅성거리는 돼지꼬리 양아치들은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슈우우웅.
날개가 위아래로 두 쌍씩 달린 초기형태의 복엽기 한 대.
공중폭격이라고는 하지만 조종사가 직접 수류탄을 들고 땅으로 던지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효과는 대단하였다.
"저, 저게 뭐냐?"
"악마다! 악마! 하늘의 악마다!"
비행기를 처음 보는 변자군들이 괴성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다.
난위안항공학교 수석교관 리루옌은 숙련된 비행을 보여주며 창공을 활보했다.
자금성 경내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전략목표를 파괴한다든가 인명을 살상한다든가 하는 전공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위축된 변자군을 두렵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역할은 충분하다.
성문이 열리더니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군이 총을 겨누었으나, 뛰어나온 변자군들은 흰옷을 찢어 만든 백기를 흩날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멍청이들아!"
장쉰의 고함이 들리는 듯하였으나 비행기 엔진소리에 묻혀 희미했다.
정양문에 걸려있던 황룡기는 어느새 오색기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돌입한다."
총 한 발 쏘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투항한 변자군은 아무런 저항 의지도 없었다.
오히려 공화군에 합류에 자금성으로 진격하려드는 병사도 있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항복할 근거였다.
그리고 공중폭격은 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본군이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과연 일본 지휘관 또한 진입 명령을 내렸다.
나는 선발대를 먼저 들여보내고 일본군을 막아섰다.
"비켜라! 한신!"
"타국의 변란에 관여하여 이만큼 수고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여기서부터는 중국이 알아서 하겠소. 일본군은 돌아가도 되오."
"그럴 수는 없다! 칭다오에서처럼 공적을 가로채려는 거냐?"
"공적이라니. 불순한 마음을 스스로 털어놓는군."
이번 베이징 수복전은.
저번 칭다오 공략전보다 더한 속도전이다.
베이징을 지키는 변자군은 칭다오 독일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허약하지만.
수도 베이징을 장악했을 때 얻을 이득은 물맛 좋은 칭다오 맥주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번 일은 일본군으로서도 무리한 기동.
다른 나라의 정치에 간섭한다는 외교적 압박을 감수하고도 끼어든 것을 보면 칭다오에서 놓친 과실을 이번에는 어떻게든 얻어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일본군 지휘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쨌건 지금 전세가 급박하니 중국은 일본군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전세가 급박하다고? 어딜 봐서?"
20여분 동안 공중곡예를 하며 수류탄 투하를 마친 비행기가 항공학교로 복귀해갔다.
투항하려는 변자군을 제지하며 장쉰 쪽에서 몇 발의 총성이 터졌지만 양측에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2월임에도 어째 날씨까지 따듯하니 전투라기보다는 좀 일찍 봄 소풍을 나온 기분이었다.
"정 돕고 싶으면 일본군은 시내의 치안 안정에 힘써주시오."
"아니야, 우리는 안쪽에 용무가···."
"자, 뭐하냐! 들어가자!"
내 지시에 따라 공화군이 성곽을 에워싸고 일본군의 진입을 막았다.
뒤에서 일본 욕설이 들려왔으나 상관치 않고 돌입했다.
탕! 탕! 탕!
자금성 주위에 흙으로 쌓아 만든 임시 진지가 보였다.
그곳에서 변자군이 소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베이징 입성이래 첫 교전.
하지만 그마저도 산발적일 뿐, 총을 내던지고 도주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일본 지휘관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으니.
특별히 걸음을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았는데 자금성 앞에 도착하니 자연스레 정문이 열리며 공화군의 병사들이 양옆으로 도열했다.
나는 그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태화전 앞까지 다다르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아이.
그 앞에는 부복한 장쉰이 있었다.
"폐하! 울음을 멈추시옵소서!"
"으아아아앙."
"폐하···!"
이 무슨 기이한 광경이란 말인가.
태화전을 장악한 공화군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춘 채였다.
"내 귀뚜라미! 내 귀뚜라미! 쟤가 밟았어! 으아앙."
청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
전에 봤을 때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였는데 그새 많이 컸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애인 건 똑같다.
"장쉰."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장쉰이 허겁지겁 일어나 내 쪽으로 달려왔다.
"한신! 폐하께서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으셨다. 복벽은 황제 폐하에 대한 내 경외심에서 비롯된 일탈이었으니. 이 늙은이가 부탁하건대, 폐하께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끔 조치해 줄 수 있는가? 너도 한때는 청의 신하였으니 군주께 예를 다해야 하지 않느냐!"
"본인이 원했든, 등을 떠밀렸든 푸이가 잘못을 저지른 건 사실이오."
"안돼, 안돼! 제발 이렇게 부탁하마. 모든 죄는 내가 안고 가겠다. 내 재산을 압류하든 연좌로 처자식을 함께 처벌하든 모두 달게 받겠으니, 폐하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금성의 내성에서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배려를 부탁한다!"
자기 마누라와 자식을 팔아서 황제의 목숨을 사겠다니.
이걸 충신이라 해야 하나.
"장쉰 장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소. 나는 비록 공화군의 사령관으로 베이징을 수복하긴 했으나, 관련자들의 처벌은 내 소관이 아니오. 의회에서 알아서 하겠지. 나는 다만 복벽에 관련된 자들을 체포하러 왔을 뿐이오."
"그, 그렇다면 폐하는···?"
"푸이는 아직 어리지만, 그렇다고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일. 체포는 하겠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을 테니 걱정마시오. 안전한 곳에서 처분을 기다리면 될 거요."
병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장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직 푸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어린 황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해를 등지고 서자 그림자가 푸이에게 졌다.
"울음을 멈춰라."
뚝.
그때까지도 땡깡을 부리던 푸이가 놀랍게도 눈물을 그쳤다.
내가 카리스마가 있나?
"왜 울었느냐?"
"저, 저자가 내 귀뚜라미를 밟았어!"
푸이가 가리키는 자는 공화군의 병사였다.
지목당한 병사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귀뚜라미를 좋아하느냐?"
"응. 내 귀뚜라미는 천하에서 제일 셌었단 말이야."
"그렇군. 천하에서 제일 셌구나. 마치 황제처럼···."
"황제? 맞아! 내가 황제야!"
나는 푸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맞았다.
"네 강력했던 귀뚜라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마치 황제처럼."
"어···?"
"잘 지내라."
나는 푸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섰다.
리페이양이 다가와 전투보고를 했다.
"확인된 전사자는 9명. 모두 변자군입니다."
"아군 피해는?"
"정문을 열다 손등을 찧은 녀석이 한놈 있습니다."
"사상자는 사상자군."
별 피해 없을 거라고는 여겼으나.
생각보다도 더 경미한 피해.
이미 베이징 시내에 공화군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변자군의 전투의지는 바닥이었는데.
거기에 공중폭격이 시작되자 즉시 절반 이상이 투항해왔다.
1개 사단이 동원된 작전이라기에는 싱거울 뿐이지만.
손자병법에서 말하듯이 전투는 싱거울수록 상등으로 치지 않는가.
완벽한 승리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한입만을 시전하는 일본군이 호시탐탐 안쪽을 엿보고.
베이징의 동서남북에서는 북양군이 진군해 온다.
공화군은 기존의 국회의사당 점거 경험이 있는 보병연대를 중심으로 베이징 중심가를 빠르게 장악해갔다.
닫혔던 국회의 문은 다시 열렸고, 공화정의 복구와 복벽사건 수습을 안건으로 회의가 개시되었다.
그리고 우리 말 잘 듣는 모범 시민 각하.
사태가 끝날 때까지 자택의 침대 밑에 숨어있던 리위안훙은 마침내 중난하이의 총통부 집무실에 들어섰다.
위안스카이의 부재로 부총통이 임시 대총통직을 맡게 된 것이었다.
"우창의 그날 밤에 네가 대총통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한 목숨 건사하려 일단 협력하는 척만 하자고 생각했었지."
"정말요? 전혀 몰랐습니다."
"내가 연기를 잘하거든."
"연기라기에는 꽤 필사적이었던 기억이."
"응. 하다 보니 내가 진짜 혁명의 투사가 된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몰입을 좀 했지."
메소드 연기를 하다 이제는 혁명 그 자체가 되어버린 리위안훙 대총통 각하!
"내가 대총통이라니. 세상일 참 몰라."
"아직 위안스카이의 행적이 오리무중이니,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리위안훙이 거만하게 총통부 집무실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방문객이 왔다. 일본 공사관에서 온 자였다.
"지금 뭘 하는 거요!"
나타난 일본 공사는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뭐가 말입니까?"
"총통의 집무실을 차지하고 제멋대로 정치를 어지럽히다니. 대체 무슨 권한으로!"
"무턱대고 나타난 타국의 공사가 지금 우리에게 권한을 묻는 겁니까? 궁금하다면 말해드리지요. 저는 이번 복벽사건을 진압한 공화군의 사령관, 한신입니다. 이쪽은 대총통의 부재로 임시 대총통직을 맡은 리위안훙 각하이고. 이미 의회가 열려 사태를 수습 중이니, 일본은 중국의 내정에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쯤 설명하면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일본 공사는 오히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모르오? 지나의 대총통은 일본 공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소."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다.
별 놀랄 거리도 아니다.
"과연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군요. 신변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상황이 수습되었으니 이제 총통부로 귀환하셔도 된다고 전해주시지요."
"그게 문제요. 위안스카이는 아직 베이징에 반역도가 우글거린다며 일본군에 도움을 청하였소."
"반역도는 우리가 모두 진압하였는데?"
"대총통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오."
아무리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이미 공화군이 베이징을 장악한 상황에서 나와 척을 져 고립을 자초할 필요는 없을 텐데.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증거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후후. 그 말을 기다렸소. 보시오. 대총통의 서명과 날인이오."
일본 공사가 하늘거리는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서명과 날인은 확실했다.
안에 담긴 내용은 더욱 골치 아팠다.
「 1. 중화민국의 국체가 심대한 위기에 몰렸으니,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일본의 정치적 지원을 받는다. 일본은 중국의 잘못된 통치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2. 중화민국 의회는 1915년 2월 7일 부로 해산되었으며, 이후 국회의사당 안에서 행해진 정치 행위는 법적 효력이 없다.
3. 후베이 도독 한신이 조직한 공화군은 앞선 2호에 따라 법적 근거가 없는 군대이다. 그러므로 공화군은 즉시 해산하여 기존의 위치로 복귀한다. 복귀하지 않는 공화군은 모두 반역도로 규정한다.」
"다 읽으셨소?"
일본 공사가 빙글거렸다.
"예."
"그래서, 해산하시겠소?"
나는 뒤에 앉은 리위안훙을 힐끗 보았다.
여전히 책상에 두발을 올린 모습으로 입을 헤 벌리고 얼어붙어 있었다.
다시 일본 공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니요."
"알겠소. 그럼 당신들은 지금부터 반역도요."
***
며칠 후 다시 나타난 일본 공사는 지난번보다 훨씬 큰 웃음을 지으며 새로운 대총통령을 보여주었다.
단 한 개의 조치.
「1. 중화민국 중앙군은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펼쳐 공화군을 섬멸한다.」
새로운 조치는 곧 북양군과 일본군의 연합을 말하는 것.
장쉰의 변자군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였을 때는 날씨가 그리 좋았었는데.
누가 창문 열어놨어? 밖에서 들어온 찬 공기에 방이 쌀쌀하다.
늦은 한파가 몰아치며.
베이징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