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국전쟁 >
톈진 남쪽의 군사기지 마창.
붉은 줄에 금색별을 단 장군들이 막사에 모여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북양파의 내로라하는 장성들.
그러나 상석은 비어있다.
"총사령관은 언제 오는 거야?"
펑궈장은 말을 해놓고도 자신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짜증이 잔뜩 묻어난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좀 전에 일어나셨으니, 곧 오실 것 같습니다."
"젠장, 해가 중천인데 사령관이란 자를 우리가 기다리는 이 상황이 맞냐?"
장쉰의 복벽을 토벌하기 위해 북양군을 규합하여 조직한 토역군이었다.
그러나 토역군과는 별개로 후베이의 한신이 공화군을 편성하여 일사천리로 복벽을 토벌해버리니.
지금 꼴이 닭 쫓던 개처럼 우스워졌다.
막사의 휘장이 걷히며 돤치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지막이 나타나면서도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다.
펑궈장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돤치루이! 뭐 하다 이제 오는 거냐! 기생이라도 들였냐?"
돤치루이는 느릿느릿 걸어가 상석에 앉았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총사령은 나야. 공식적인 자리니까 말조심해."
"좋아. 그럼 말해봐라. 어째서 토역군은 뭉그적거리기만 하는 거냐. 저 한신이란 놈은 수비의 귀재란 말이다. 그 허접한 한커우에서도 북양군의 정예병을 세 달 동안 막아냈어. 방어진지를 꾸릴 시간을 주면 베이징은 영영 적의 손에 넘어갈 거란 말이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돤치루이가 남일 말하듯이 굴자, 화가 난 펑궈장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책상에 찍었다.
"모를 게 뭐 있어! 각하의 조서를 봐라! 대총통령으로 명하니, 중화민국 중앙군은 공화군을 섬멸한다! 명명백백하지 않으냐!"
"중간에 뭘 빼먹었잖아."
돤치루이가 책상에서 위안스카이의 조서를 집어 들었다.
"일본군과 연합하라고? 내가 베이징에 없는 동안 각하가 노망이 나셨나봐. 이런 한간(漢奸, 민족의 반역자) 같은 소리를 다 하고 말이야."
"뭐? 돤치루이! 그 말 취소해라!"
"취소를 왜 해.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펑궈장은 목구멍까지 욕이 올라왔으나 겨우 삼켰다.
"중국 영토의 일본군은 톈진 수비대 1,500명뿐이다. 대단한 숫자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반역도에게 점령당한 베이징을 하루빨리 수복하여 각하를 구출하는 거다!"
"뭐가 반역도라는 거지?"
"무슨 말이냐! 대총통 긴급조치에 의해 베이징의 공화군은 반역도로 규정되었을 터!"
"이봐, 펑궈장. 좀 유해지라고. 넌 항상 너무 심각해. 그 출처도 불분명한 조치란 걸 꼭 따를 필요는 없어."
돤치루이는 느긋하게 성냥을 태워 담뱃불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이 너무 밉살스러워 펑궈장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알겠구나. 너는 일부러 각하가 실각하기를 바라고 있어. 이미 각하의 신임을 잃었으니 북양파의 실권을 잡으려면 각하가 몰락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 거야. 그래서 기다리는 거지? 이 비열한 자식아."
돤치루이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다 손을 휘휘 저었다.
의미를 알아차린 토역군의 지휘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막사는 금세 조용해져 돤치루이와 펑궈장만이 남았다.
"내가 위안스카이가 몰락하길 바란다고?"
"아니, 돤치루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맞아. 난 그걸 바래."
"뭐야?"
펑궈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한 말 진심이냐, 돤치루이?"
"일전에 너는 끝까지 애새끼 푸이에게 충성하는 장쉰을 비웃었었지. 그때 나는 너와 같이 웃지 않았다. 이유를 아냐?"
"내, 내가 장쉰과 같다는 거냐···?"
"너도 대가리가 있으면 알잖아. 위안스카이는 북양파에 애착 따위 없어. 그저 자기 가문을 융성하게 만들고 자기가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밖에 없단 말이야. 그런 야욕을 위해 외세와도 영합하는 매국노에 불과한 자가 위안스카이야. 저 옛날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던 젊은 총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런 자를 끝까지 추종하는 네가 장쉰과 뭐가 다르단 말이냐?"
물론 돤치루이의 지적은 펑궈장도 생각하는 바였다.
자신 역시 황제가 되겠다는 위안스카이에게 실망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장쉰이 복벽 소란을 일으키고, 한신의 공화군이 중국의 정치 수뇌부를 장악해 대총통이 베이징에 고립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펑궈장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쳤다.
군주가 잘못된 길을 가려 하면 마땅히 옆에서 충언으로 바로 잡는 것이 신하된 도리인데.
자신은 그저 문제를 회피하려 했었고 결과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펑궈장은 지금이라도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아니, 나는 장쉰과 다르다. 베이징을 점거한 반역도를 몰아내고 중국의 국체를 회복할 거야."
"이미 국체는 회복됐어. 한신이란 놈이 정치를 잘하던데? 베이징 점령 이후 자기는 전면에서 싹 물러나 총통부에는 리위안훙을 내세우고, 의회에는 쑹자오런을 내세워 공화정체를 바로 세우니. 민중들이 깜박 넘어갈 만도 해. 권력욕이 없잖아. 청렴해 보인다구."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리위안훙이나 쑹자오런이나 둘 다 한신의 꼬붕일 뿐이야. 이미 베이징의 정치는 그놈이 장악한 거나 다름없다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중국 전체가 그 출신도 불분명한 조선놈에게 넘어가게 생겼단 말이다!"
"글쎄. 그래도 인기가 좋으니, 뭐."
더 말해도 들어먹을 것 같지 않다.
펑궈장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나는 존립 목표 자체가 불분명한 이깟 토역군에서 빠질 거다. 혼자 잘해보던가."
막사를 빠져나온 펑궈장은 바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소집했다.
즈리성 도독 차오쿤.
제3사단장 우페이푸.
제16혼성여단장 펑위샹.
그중 차오쿤이 자신과 같은 북양파 1세대로서 명실상부한 자신의 오른팔이라면.
우페이푸와 펑위샹은 연배가 한단계 아래인 2세대 유망주들이었다.
모두 모이자 펑궈장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우리만의 길을 간다. 차오쿤, 너는 즈리군을 모아라. 바오딩에서 집결하여 편성을 마무리하면 곧바로 베이징을 치는 거다."
우페이푸와 펑위샹이 서로를 돌아보는데.
차오쿤이 말했다.
"그럼 토역군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돤치루이 총사령은 이미 북양파를 배반했다. 그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게 무슨···?"
"토역군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분명 육군부장관은 나고 병사들을 끌고 온 것은 너희들인데, 어째서 돤치루이가 총사령관이냔 말이다."
"돤치루이 총사령이 가장 먼저 장쉰 토벌을 선언하고 토역군을 조직하였으니까···"
차오쿤은 대답하면서도 특별히 자신 있는 투는 아니었다.
"그럼 말해봐라, 차오쿤. 지금 토역군의 1군단장이 누구냐?"
"돤즈구이입니다···."
"2군단장은?"
"쉬수정이지요."
"이상하지 않으냐? 돤치루이의 심복들은 요직을 꿰차고, 훨씬 우수한 너희들은 놈들의 지휘를 받는다. 돤치루이 저놈은 벌써 북양파 내에서 파벌을 가르며 자기 부하들만 챙기고 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차오쿤을 보며 펑궈장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부로 놈들과는 더 이상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돤치루이는 각하를 배신했어. 이제부터는 우리 즈리파(直隸派)가 베이징을 차지하고 대권을 얻는 거다."
펑궈장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비로소 손끝이 떨려왔다.
지금껏 북양파 내에서 돤치루이의 위세에 가려 양보만 해왔으나,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털어놓자 새삼 고양감이 차올랐다.
분명 베이징에 고립된 각하를 구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눈앞에 떠오르는 얼굴은 위안스카이의 것이 아니다.
대신 자신의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젊은 조선놈. 한신의 얼굴이 보인다.
그놈의 숨통을 직접 끊겠다고 맹세한 것이 저 신해년의 한커우에서였다.
이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놈의 위험성을 몇 번이고 경고해왔었지만.
결국 오늘까지 왔다.
상관없다.
전장에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최고의 결말이니까.
***
베이징의 먹구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지리적 위치였다.
"···한신. 내가 어지간해서는 네 행사에 토를 달지 않는 거 알지?"
지도를 펴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리위안훙이 다가왔다.
"예. 말하세요."
"이대로면 우린 다 죽을 거다. 한쪽 방면만 수비한다면 그런대로 어떻게든 되겠는데, 사방에서 군대가 덮쳐들면 우리 군이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무슨 수로 막겠냐?"
언제나 자신만만한 나였으나 이번만큼은 리위안훙의 지적에 무어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북양군이 분열하여 돤치루이의 안휘파(安徽派)와 펑궈장의 즈리파로 나뉜 것은 다행.
안휘파의 토역군은 여전히 톈진 남쪽에 몸을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데.
즈리파의 토벌군은 즈리성 곳곳에서 병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펑궈장의 즈리파 자체가 즈리성이 본거지이니 베이징을 감싼 토벌군의 군세는 어지러웠다.
지도만 보았을 때는 이미 잡아먹힌 것 같기도 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지요."
"그러다가 완전히 포위되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탈출하여 후베이성에서 다시 병력을 가다듬자고."
"수도를 버리고 튀자고요?"
"에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 수도를 버리는 게 아니라 옮기자는 거지. 의회와 행정부 주요 시설 몇 개만 이전하면 되지 않겠냐? 이 기회에 우창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삼는 거야."
나는 말없이 지도만 들여다보았다.
리위안훙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펑궈장의 토벌군이 전면적으로 공격해온다면.
참호전의 교리를 살린 방어전에서 교환비의 이득은 보겠지만.
포위된 베이징의 식량과 물자는 한정적이니, 장기전으로 흘러갈 경우 빈말로라도 공화군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처지이다.
하지만 나는 리위안훙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뭐? 아냐? 왜?"
"시간이 꼭 적의 편인 건 아닙니다."
"무슨 말이야?"
나는 즈리성의 전도를 접고 새롭게 중국 전도를 펼쳤다.
즈리성만 놓고 보면 베이징이 외톨이 섬처럼 보이지만 대륙 전체에서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이미 위안스카이의 두 차례 조서는 <베이징 타임즈>에 의해 중국 전역에 소식이 전해졌으니.
정당한 의회의 절차에 따라 장쉰의 복벽을 진압한 공화군이 반역도로 몰리는 부당함에 더해.
일본의 턱도 없는 22개조 요구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반일 감정이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을 명하는 이번 대총통령에 의해 크게 폭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결정타로 장쉰을 끌어들인 것이 대총통 위안스카이였다는 것.
변자군을 끌어들인 데에는 공화정을 군주정으로 되돌려 황제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위안스카이의 야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까지 폭로되자 중국의 여론은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다.
베이징만 보아도 민중의 분위기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철도가 끊긴 베이징 외곽에 공화군이 참호 진지를 파며 전쟁 준비 태세에 돌입하니 거리의 분위기가 흉흉할 만도 하건만.
오히려 시민들은 공화군에 의복과 식량을 가져다주며 응원의 말을 쏟아내곤 했다.
"이번 전쟁의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입니다. 시일을 기다리면 분명 적은 베이징에 집중할 수 없을 겁니다."
리위안훙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내 예측은 3일 후에 현실이 되었다.
***
- 한간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고 중국을 수호하자! 윈난 도독 차이어의 외침.
- 우리가 쟁취하려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중화민국 4억의 인격이다!
베이징에 속보가 쏟아졌다.
남방에서 차이어가 거병했다.
들고 일어난 윈난군은 2만 병력. 스스로 일컫기를 호국군(護國軍)이라 칭했다.
외세와 야합하여 국체를 어지럽히는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지켜내겠다는 의미였다.
차이어의 호국군은 파죽지세로 광시성을 장악하고 쓰촨성으로 진격해 나갔다.
여기에 구이저우성이 호응하니, 후베이성에 남은 내 군대와도 연합이 가능하여 전쟁은 삽시간에 중화민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자연히 토벌군 또한 남방에 전선을 새로이 짜야 했다. 덕분에 베이징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펑궈장의 토벌군은 나와 차이어를 역적이라 칭하며 군세를 규합하였으나.
내쪽에서 보기에는 의회를 무시하고 군대를 일으킨 펑궈장이 오히려 반란군의 수괴였다.
신해년 이후 다시 한 번 중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으니.
다른 점이 있다면 북쪽에 조그만 점처럼 고립된 베이징의 공화군.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는 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전세를 뒤흔들 한 장의 조커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