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08)

< 아시아의 구세주 >

 "여보, 일어나세요. 파티에 늦겠어요!"

 쑨원은 퍼뜩 잠에서 깼다.

 단순히 눈꺼풀 두 개를 올리는 일이 이리 어렵게 느껴지니.

 안락한 물소 가죽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초인적인 각오가 필요했다.

 낮잠에서 깬 쑨원은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미국식 가정집의 구조를 차용한 단정한 실내.

 창밖에는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고 마당 너머 과수원이 보인다.

 "여보! 어서!"

 "···응."

 잠긴 목으로 겨우 대답한 쑨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준비를 하곤 쑹칭링이 기다리는 2인승 인력거에 탑승했다.

 야유회장으로 가면서 쑹칭링은 거리의 풍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처럼 좋아했으나, 쑨원은 꿈속처럼 멍할 뿐이었다.

 도착해서도 쑨원은 왈츠를 추자는 쑹칭링을 거절하고 홀로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쑹칭링은 토라진 듯 하였으나 곧 잘생긴 오스트리아 대사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쑨원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질투라든가 하는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보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은 열병에 걸린 듯 먹먹하였다.

 젊고 아름다운 와이프.

 벽돌식 2층집. 생활하기에 넉넉한 자금.

 분명 은퇴 이후 자신이 꿈꿔왔던 생활이다. 

 그런데 이 허한 마음은 무엇인가?

 어째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토록 우울한 것인가?

 필생의 위업으로 생각해왔던 혁명은 이루어졌다.

 비록 100퍼센트 자신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세상일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위안스카이는 현명한 자이고 공화정체의 뜻을 받들어 중화민국을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분명 중국은 새롭게 태어나리라···.

 "중산(쑨원의 호) 선생,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말을 건 자는 우치다 료헤이.

 중국동맹회가 도쿄에 처음 설립될 때부터 지대한 도움을 준 정치인이었으며 지금은 현양사(玄洋社)라고 하는 우익단체를 운영 중이었다.

 "그렇소."

 "그렇다기에는 어째 말과 표정이 따로 노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던 쑨원은 대답 없이 잔을 들이켰다.

 문득 우치다가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위대하고 고결한 중화민국의 영웅이 이런 시골의 파티장에 한가로이 앉아계시다니. 중국의 크나큰 손실 아닙니까?"

 "허허."

 뻔한 칭찬이지만 기분은 좋다.

 쑨원이 웃자 우치다가 더욱 은밀하게 말했다.

 "조만간 중국에서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오?"

 "위안스카이가 공화정을 뒤엎고 군주정을 부활시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본인이 황제가 되려는 속셈이겠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쑨원이 느낀 감정은 강렬한 희열이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피땀 흘려 이룩한 공화정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감지되었다는데 왜 기쁜 것이지?

 곧이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는 맞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나 복귀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사실이오?"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에게서 나온 정보이니 믿을 만할 겁니다."

 "당장 중국으로 가야겠소. 혁명군을 다시 꾸려 위안스카이를 응징해야 할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우치다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무턱대고 중국으로 간다고 해도 이미 옛 동맹회의 세력은 갈가리 찢겨나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군대와 자금을 어디서 구하실 겁니까?"

 쑨원의 뇌리에 떠오르는 자는 한 사람 뿐이었다.

 한신! 

 철도 시찰을 위해 후베이성에 방문한 경험은 쑨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근대화의 절차를 우한3진(한커우, 한양, 우창)은 착실히 밟아나가며 공업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후베이성 도독 한신이 동맹회 간부요. 힘과 재력이 있으니 혁명군을 꾸리도록 도와줄 거요."

 "이런, 이런. 이렇게 우스울 데가. 중산 선생,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내가 뭘 모른단 거요?"

 "한신의 검은 속내 말입니다. 그자가 획책하는 더러운 음모를요."

 우치다가 꺼림칙하게 웃었다.

 쑨원은 기분이 상하여 중얼거렸다.

 "내가 비록 한신과 혁명파 내에서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특별히 사악한 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모함이라면 거두어 주시오."

 "신해혁명이 마무리된 후, 위안스카이의 주관 아래 펼쳐진 논공행상에서 우창파와 난징파 중 어느 쪽이 이득을 보았습니까? 대총통은 그렇다 쳐도 부총통은 누가 되었습니까? 혁명의 상징인 후베이성의 도독은 또 누가 되었는지요?

 "잘못 짚었소. 나는 당시 혁명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여 일부러 감투를 양보한 거요."

 쑨원은 점잖게 말했으나 우치다는 점점 가까이 몸을 밀착하며 혓바닥을 놀렸다.

 "그럼 뒤이어 벌어진 전국 총선거는 어떻습니까? 분명 중국동맹회는 공식적으로 국민당을 창당하여 정책목표를 실현할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리위안훙을 위시한 우창파는 따로 공화당을 창당하여 국민당을 배격했습니다."

 거기부터는 쑨원이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한창 전국을 순회하며 철도유람 다니던 시절. 기억나는 것은 쑹아이링의 엉덩이···.

 그때만 해도 행복하였는데···.

 "그리고 이어진 선거에서 공화당은 대승을 거두고 국민당을 뒷방으로 밀어냈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모르오."

 "천치메이."

 우치다가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쑨원은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는 많지만 진짜 충신은 평생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천치메이는 적어도 세 손가락 안쪽의 인재였으니.

 "잉스(英士, 천치메이의 자)가 뭐 어쨌단 말이오?"

 "그는 상하이 폭력배들의 항쟁에 휘말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암살당한 거지요."

 "누구에게···?"

 "천치메이는 국민당의 선거본부장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아시지 않겠습니까."

 쑨원은 눈을 깜빡거리는 자신을 의식했다.

 마치 미몽에 빠져 허우적대다 방금 깨어난 것처럼 아득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일이 천근 돌덩어리가 눈썹에 얹힌 것처럼 힘겹게 여겨졌다.

 "공화당에서···?"

 "엄밀히 말하면 공화당 한신의 짓입니다. 신해혁명 때부터 그자는 언제나 권력욕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고작 위관급 장교에 불과했던 자가 벼락출세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감투를 쓰니 더 큰 탐욕에 눈이 먼 모양이지요."

 한신이 그랬다고? 한신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하였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아! 천치메이!

 네가 혁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상관이 되어서 그저 안온한 몽상 속에 빠져있었다니!

 미안하구나! 원통스럽구나!

 "위안스카이의 제제 시도는 이미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신이 이번 일을 진압하도록 두었다가는 오히려 놈의 명성만 더욱 높여주는 꼴이 될 테니 그와 손을 잡는 건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중산 선생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말하시오."

 "일본에도 중산 선생을 지지하는 분들이 상당수 계십니다. 몇 가지 사항만 합의되면 곧바로 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쑨원은 띄엄띄엄 말했다.

 "무슨 사항이오?"

 "자세한 것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입니다. 다만 길게는 드리지 못합니다. 언제고 중국에서 일이 터질지 모르니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우치다 료헤이는 파티장의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쑹칭링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여보,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창백해요."

 "요근래는 계속 그랬잖아."

 "아니에요. 지금 더 심해요. 어머,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칭링, 당신은 나를 왜 사랑하는 거지?"

 "갑자기요?"

 "말해봐."

 선선한 저녁 바람이 과부하가 걸린 머리를 식혀주었다.

 쑨원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 쑹칭링.

 그녀의 대답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기로.

 쑹칭링은 멈칫하더니, 까만 머리칼을 흩날리며 예쁘게 웃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영웅이에요. 중국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저는 중국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쑨원은 가만히 앉아 흔들리는 인력거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군."

 결정되었다. 

 혹시 쑹칭링이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도쿄의 장원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제가 만든 계란후라이를 먹는 당신의 모습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더라면.

 자신은 그 말을 들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화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는 것.

 쑨원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며 진정으로 삶을 산다는 느낌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죽음에서 부활한 기분이었다.

 ***

 쑨원은 옛 중국동맹회를 버리고 새로이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창설했다.

 오직 쑨원의, 쑨원에 의한, 쑨원을 위한 조직이었다.

 동맹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은 것은 몸집만 불릴 줄 알았지, 동맹회 내의 파벌을 정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쑨원을 당수로 하여 강력한 1인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으니.

 중국동맹회보다 훨씬 결속력이 강하고 효율적인 조직이었다.

 과연 우치다 료헤이의 정보는 틀림없었다.

 물론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맞추지는 못하였으나 청조의 복벽이라니. 그걸 누가 예측하겠는가.

 베이징에서 복벽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쑨원은 우치다를 호출했다.

 그런데 저번에 매달렸던 것과는 달리 태도가 냉랭하였다.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조급해진 쑨원은 우치다의 집 앞에서 대기하다가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치다는 주변을 살피며 은밀히 말했다.

 "중산 선생은 믿을 수 있는 분이지요?"

 "당연하오!"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신변이 지금 일본제국의 손에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중국에 침략의 손길을 뻗으려는 작자들이 정부에 있습니다. 위안스카이를 이용하여 이권을 획득하고 중국의 소란에 일본이 직접 군대를 개입할 생각인 듯 합니다."

 쑨원은 애가 탔다.

 한번 혁명의 불길이 가슴속에서 붙자 몇 날 며칠 동안 타올라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산불로 번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중국과 일본은 동방의 화평을 위해 함께 노력해 가야 할 동반자일진대 어찌 그런 수단을 쓴단 말이오."

 "그 일로 인해 내각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총리는 본토에서 군대를 출병하는 방안까지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중국은 일본과 오랜 친목을 다져왔는데 그처럼 강압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에 반대하는 각료들도 상당수입니다."

 "하면 우치다 선생의 생각은 무엇이오?"

 "저는 물론 일본이 중국의 영원한 우방으로 남기를 원합니다. 중산 선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씀이오."

 우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총리의 의견이 확고하니, 지금으로서는 쉽사리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더 지켜볼 밖에요. 다만 언론에 그 22개조 요구라는 것이 뿌려졌으니 중국에 반일 감정이 퍼져나가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내게 생각이 있소."

 쑨원은 우치다를 정면으로 보고 말했다.

 눈앞에 있는 자는 단 한 사람 뿐이지만.

 마치 4억 중국 민중을 앞에 둔 것과 같은 웅혼한 음성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이미 젊은 시절에 벌어들인 명망을 잃어버렸소. 하지만 나는 다르오. 여전히 중화민국에서 가장 추앙받으며 사랑받는 지도자요. 일전에 우치다 선생은 사업가들의 자금지원을 약속하였지. 하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는 부족하오. 일본 정부에 말하시오. 나를 지지하라고. 나를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세우라고 말이요. 위안스카이는 썩은 동아줄일 뿐, 내가 바로 천국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니. 나야말로 아시아의 구세주가 될 사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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