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08)

< 아군은 늘리고, 적군은 줄인다 >

 세계사에서 20세기 초는 매우 특이한 시기였다.

 철조망, 기관총, 참호의 조합은 근대적 방어기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역사상 어느 시기에도 이처럼 수비 쪽이 유리했던 적이 없었다.

 맥심 기관총을 발명한 영국의 발명가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은 자신의 발명품으로 전쟁이 종말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다.

 요지에 기관총 사수 한 명이 버티고 있으면 혼자서 수백의 병력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하였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죄다 수비만 하려 들지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려 들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악의는 끝이 없으니.

 이미 서유럽은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비슷한 양상이 베이징에서도 벌어졌다.

 투타타타타.

 복엽기가 요란한 프로펠러음과 함께 착륙했다.

 난위안항공학교의 비행교관 리루옌이 가뿐한 걸음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어때?"

 "저번 정찰 때와 똑같습니다. 움직임이 없어요."

 "수고했다."

 차이어가 호국전쟁을 개시한 지 한 달째.

 베이징 전선은 교착상태였다.

 펑궈장의 토벌군은 개전 초기 몇 번 돌격을 감행해왔으나 참호는 뚫리지 않았다.

 질펀한 피 웅덩이 수십 개를 남긴 뒤 토벌군은 전략을 바꾸었다.

 베이징의 남쪽 도시 랑팡을 거점으로 넓게 전선을 드리우고 쉬이 공격해오지 않았다.

 천천히 말려 죽이겠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는 보급.

 철도를 장악한 토벌군 때문에 물자가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당연하지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식량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군의 사기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나는 참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높은 지위에 올라오니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단순히 내 모습을 보여주고, 앙다문 입으로 병사와 눈을 맞추며, 굳건하게 고개 한 번 끄덕여주는 것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다는 것이 체감이 되었다.

 그래서 더 자주 순시를 나갔다. 요즘은 거의 일과와도 같았다.

 아직까지는 경례를 빠릿빠릿 올리는 병사들이었으나, 얼마나 지금 기세를 더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도독님, 드릴 말씀이."

 "뭔데?"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부관 리페이양이 속삭였다.

 참호 뒤편의 흙구덩이로 향했다.

 앉아서 노가리 까던 위관들이 날 보고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켰다.

 "할 말이 뭔데? 혹시 순시를 그만 나오라는건 아니겠지. 병사들이 불편해한다고."

 리페이양은 말없이 애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정말? 분명 날 보면 병사들이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이라고? 내가 꼰대가 되어버린 건가?

 "아니오. 병사들은 도독님을 좋아합니다."

 "휴."

 그럼 그렇지. 

 난 인기가 좋다니까.

 "그보다 식량 배급을 줄여야 합니다."

 "지난주에 줄였잖아."

 "그때는 장자커우(張家口) 쪽에서 보급이 들어올 줄 알았으니까요. 적이 징장철도(京張鐵道)를 장악하였으니 계산을 새로 해야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대로는 안 된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지도 있나?"

 "예."

 "꺼내 봐."

 펄럭. 리페이양이 주머니에서 접혀있던 지도를 꺼내 빨래 말리듯 넓게 폈다.

 한눈에 중국 대륙이 눈에 들어왔다.

 펑궈장의 토벌군은 총 3개 부대로 편성되어 있다.

 제1군은 펑궈장의 제3사단과 제7사단.

 제2군은 차오쿤의 제8사단과 제11사단이 중심이었다.

 제3군은 별동대 개념으로 펑위샹의 제16혼성여단이 따로 움직였다.

 제1군은 베이징에서 공화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제2군은 쓰촨성과 후베이성 쪽으로 진격해 남방의 호국군과 전투 중이었다.

 제3군은 아예 광둥쪽으로 크게 돌았다. 차이어의 윈난성을 직접 노리는 모양새였다.

 돤치루이의 군대가 갈라져 나왔다고 하여도 토벌군의 군세는 도합 6만이 넘었다.

 공화군과 차이어의 호국군을 합쳐도 3만이 채 안 되는 정도였으니.

 공세는 어려웠다. 그저 수비뿐이었다.

 남방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차이어의 호국군은 쓰촨에서 일단 멈추어 섰다.

 넓어도 너무 넓은 사천지방.

 기세만 믿고 무작정 진격하다 허리가 끊기면 낭패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한편 일본도 서서히 준동하고 있었다.

 톈진의 일본 수비대는 베이징과 톈진 사이를 가로막고 해상보급을 차단하였으며.

 만주의 관동군 또한 출동 준비를 완료해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토벌군과 일본군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나 합동작전이라도 펼쳐온다면 낭패였다.

 지도를 아무리 들춰봐도 죄다 적인 것 같은 기분.

 "리페이양, 수작질을 좀 쳐보자."

 "예?"

 "대총통 각하께 말해서 면회권을 얻어와라."

 "누구의 면회권 말입니까?"

 "돼지 꼬리와 용."

 나는 차근차근 해결하기로 했다.

 아군은 늘리고.

 적군은 줄인다.

 ***

 정치범을 수감하는 베이징감옥.

 복벽사건 관련자들이 수감되어 있다.

 나는 성큼성큼 죄수들을 지나쳐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걸어갔다.

 창살 안쪽을 들여다보자 나무 침대에 장쉰이 누워있었다.

 "장쉰 장군."

 자는 줄 알았는데 장쉰이 벌떡 일어나 창살에 달라붙었다.

 "한···, 신···!"

 "고생이 많으십니다."

 "폐하는···?"

 "푸이는 잘 있습니다."

 "자금성에···?"

 "청나라 소조정을 그대로 둘지 어떨지는 의회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제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지요."

 장쉰이 깊이 탄식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의회의 판단은 장군이 중화민국에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슨 말이오?"

 "장군이 갇혀 계시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펑궈장이 토벌군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격해오고 있어요.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황제 폐하는 천하에 단 한 분뿐이오."

 "알지요. 압니다. 마지막 황제는 푸이로 족합니다. 다른 사람을 내세워 그림을 망칠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말인데, 장쉰 장군.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청나라 소조정을 유지하고 펑궈장을 쳐부숴 드리겠습니다."

 장쉰이 귀를 쫑긋했다.

 "어떤 부탁이오?"

 "명령서를 써주십시오. 난징의 변자군을 의회에 귀속하여, 산둥성 참전군의 지휘를 받도록 말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도 구원의 태양처럼 강렬하게 느껴질 터.

 장쉰이 말없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종이를 달라는 표시였다. 일사천리로 명령서가 쓰였다.

 칭다오 공략전 당시 산둥에 남겨두었던 참전군.

 장쉰의 변자군이 북상하지 못하도록 지난에 주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 명령서를 통해 변자군이 예하 부대가 되면.

 활동이 자유로워져 상황에 따라 펑궈장의 제1군을 상하에서 협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장쉰과 같은 구조의 감옥.

 의자에 앉아 의복을 가지런히 포개는 노인이 보였다.

 북양삼걸의 용. 왕스전이었다.

 "장관님. 여기 계셨습니까?"

 "오, 한신 도독이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여기 꽤 오래 있었는데 이만 나가고 싶군요. 담당자에게 말씀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특별 사면이라도 맡겨 놓은 것 같은 말투.

 왕스전은 언제나 그랬다. 

 항상 술에 취한 듯 몽롱한 눈을 하고 신선인듯 매사에 초연해 보였다.

 "사정을 알아보지요. 감옥에 들어올 때 죄명은 뭐였습니까?"

 "뭐더라? 아, 참. 그렇지. 장쉰 장군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 죄라더군요."

 육군부장관께서 중앙군이 아닌 다른 군대를 소환하다니.

 새삼 느끼지만, 참 개판이다.

 왕스전이 계속 입을 놀렸다.

 "게다가 복벽이 되었던 당시 내가 북양대신(청나라의 외교 및 군사를 담당하는 관직)을 맡았었지요. 그래서 가둔 것 같습니다."

 "그런 고위관직을 얻었다면 사건의 핵심 당사자셨군요."

 "아니,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정치 안정을 위해, 주겠다는 관직을 받았을 뿐. 복벽에 깊이 관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푸이의 황제 복위 당시에도 식만 보고 집에 돌아와 난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쳐 날 체포해 간 겁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거다.

 실제로 장쉰이 푸이를 앞세우고 어전회의를 열었을 때 왕스전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마치 구름 속에 몸을 숨긴 용처럼 왕스전의 행적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정치통합을 위한답시고 정치인을 사면하는 행위 같은 건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보니 사면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확실히 왕스전은 감옥에 갇혀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북양군에서 수십 년간 버텨낸 그의 군경력을 보라.

 그에게 충성을 보내는 자는 없어도, 특별히 그를 적대하는 자도 없으니.

 이간질을 획책하기에는 제격이다.

 "장관님, 북양파가 분열한 사실을 아십니까?"

 "분열이라니요?"

 나는 장쉰의 복벽 이후 돌아가는 정세를 알려주었다.

 베이징을 장악한 공화군. 그런데 일본 공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위안스카이의 조서.

 왕스전은 눈을 가만히 감고 듣기만 했다. 얼핏 봐서는 조는 것 같았다.

 "왕스전 장관님, 북양군의 존립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중국의 자강(自強)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과 결탁한 위안스카이의 조서를 수용해야 하겠습니까? 일본은 22개조 요구라는 말도 안 되는 강압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저번 칭다오 공략전에서 한신 도독의 활약상을 아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일본은 무찔러야 할 외세지요."

 원하는 대답이 너무 싱겁게 나오자 오히려 김이 빠졌다.

 아니, 이 사람,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 맞나?

 혹시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건가? 속을 알 수가 없다.

 "돤치루이 장군은 역시 북양의 호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외세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며 조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암. 그렇지요. 돤치루이는 호랑이지요."

 "그런데 개가 문제입니다."

 "펑궈장 장군 말씀이요?"

 "예."

 "펑궈장은 바로 그 외세와 영합하여 도리어 중화민국의 심장부에 칼을 꽂으려 들고 있으니. 중국의 앞날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합니다."

 왕스전은 갑자기 귀를 파기 시작했다.

 파낸 귀지를 입으로 호호 부는 왕스전을 보며 나는 다시 말했다.

 "장관님은 아까 사면을 말씀하셨지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푸이의 청나라에서 맡으셨던 북양대신의 역할을 해주시면 바로 빼내 드리겠습니다."

 "북양대신이라면···."

 "북양파의 외교 사신으로 움직여 주십시오. 돤치루이 장군에게 가서 호국의 약속을 받아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톈진 남쪽에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는 돤치루이의 속내는 짐작이 간다.

 펑궈장과 내가 서로 다투는 동안 자신은 힘을 보존하여 이후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거다.

 그에게는 채찍이 필요 없다. 그저 당근만 있으면 넘어올 자다.

 어느 한쪽의 승세가 완연해진다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공세에 참여해야지만 공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니.

 돤치루이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로 하여금 공화군이 이길 것 같다는 예측을 하게 만들면 된다.

 "단순한 호국의 약속이면 됩니까?"

 "예. 그다음에는 펑궈장의 토벌군 진지로 향해주십시오."

 "펑궈장에게는 뭐라 말하면 되는지요."

 "말을 전할 사람은 펑궈장이 아닙니다. 제3사단장 우페이푸에게 전해주십시오. 돤치루이가 호국을 원하고 있다고."

 "우페이푸! 과거에도 급제한 경력이 있는 아주 유식한 친구지. 나와는 매우 친한 사이요."

 이미 위안스카이는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그나마 충성스러운 것이 개라고 할까. 베이징에 갇힌 대총통을 구하고, 반란군을 토벌한다며 펑궈장이 혼자 날뛰고 있지만.

 휘하 장군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우페이푸는 훗날 대군벌이 되는, 야망이 넘치는 자.

 몰락하는 펑궈장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왕스전에게 바라는 것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구름을 누비는 용처럼,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존재감을 이용하여 돤치루이와 우페이푸 간에 커넥션을 만들면 된다.

 우페이푸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돤치루이는 태세를 바꿔 전장에 뛰어들 것이고.

 그리되면 펑궈장의 토벌군은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

 이로써 계략은 던져졌다.

 통할지는 두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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