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방어전 >
우페이푸는 우렁차게 외쳤다.
190센티가 넘는 장대한 체구에서 나오는 벽력같은 음성이 사령부를 뒤흔들었다.
"남방의 전선이 밀리고 있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3사단을 이끌고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나 토벌군 사령관 펑궈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누가 뭐래도 베이징 전선이다. 군대를 뺄 수는 없어."
"교전다운 교전을 벌이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공화군은 수비 태세를 공고히 할 뿐 참호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습니다. 베이징 전선에 두 개 사단이 주둔하는 것은 낭비입니다!"
"날 믿어라. 한신은 교활한 놈이야. 빈틈을 보이면 진다. 포위의 성과가 슬슬 나올 시점이니, 틈을 주지 말고 계속 강하게 압박하여야 한다."
우페이푸는 참지 못하고 작전 막사를 박차고 나왔다.
각자 참호 속에 처박혀서 겁쟁이처럼 고개만 빠끔 내미는 게 전쟁이라니.
이건 자신이 원하는 싸움이 아니다.
관우처럼 적토마를 타고 전장의 한복판을 질주하고 싶다.
남자답게 전투의 최일선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피와 화약, 강철의 냄새를 맡고 싶다.
입구에 서서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데, 양복쟁이가 막사로 다가왔다.
"안에 사령관 계십니까?"
우페이푸가 1군 진지에서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자식.
일본 외무성에서 온 관료다.
대체 중국군 진지에 일본인이 왜 들락거린단 말인가.
우페이푸는 심술궂은 얼굴로 일본인을 쏘아보곤 쿵쿵 지나가며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일본인이 나자빠졌으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내란을 평정하기 위해 일본군의 도움을 받으라는 대총통의 조서.
22개조 요구를 통해 일본의 음흉한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어떻게 대총통이 되어서 그와 같은 조치를 내릴 수 있는지, 우페이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펑궈장은 또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지시를 따르는 건가?
일본 외교관은 톈진의 일본수비대와 펑궈장의 소통을 담당하고 있었다.
베이징과 톈진 사이의 경로를 차단하고 있는 일본군은 군사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외세의 힘을 빌린 토벌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우페이푸에게는 지금 베이징의 공화군보다 일본군이 오히려 더 큰 적으로 여겨졌다.
거처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쯔위(子玉, 우페이푸의 자)! 잘 지내셨나?"
"으악! 깜짝이야."
돌아보니 육군부장관이었던 왕스전이 막사의 구석에 서 있었다.
"아니, 거기 왜 숨어계시는 겁니까."
"내가 언제 숨었었다고 그러나. 난 자네가 들어왔을 때부터 여기 있었네."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신지."
왕스전이 북양육군에 있을 때, 줄기차게 자신을 찾아와 말동무로 삼았던 것을 기억하는 우페이푸였다.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바쁜 전장에서 그가 즐기는 난화에 깃든 도(道) 따위를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스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페이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돤치루이 장군이 호국을 원하고 있네."
"···뭐라 하셨습니까?"
"나는 지금 돤치루이 장군의 토역군 진지에서 오는 길이네. 그는 호국을 원하고 있어."
"그게 대체 무슨?"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일세."
뭐지?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하다니.
이게 북양의 용···?
그간 보인 허술한 모습들은 허허실실의 전략일 뿐,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너무 달콤한, 너무나 시의적절한 제안.
우페이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는 중국을 지키겠습니다."
***
모든 육로가 끊겨 육지의 섬처럼 고립된 베이징.
보급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연결되었다.
섬이면 해로(海路)를 연결하면 되잖아.
남쪽 변자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산둥성에 주둔한 참전군은 곧바로 출동을 준비했다.
이동은 산둥반도의 영국령 조차지인 웨이하이웨이(威海衞)항을 이용했다.
이미 칭다오 공략전에서 함께 전우애를 나눈 영국군.
항구를 내준 것뿐만 아니라 수송선 또한 지원했다.
각종 식량과 물자를 실은 배는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톈진항에 입항하여 병참로를 열었다.
톈진의 일본군은 강하게 항의하였으나 그 이상의 제스처를 취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톈진에 주둔한 영국 조계 수비대장, 바너디스턴이 영국의 일을 방해하는 거냐고 묻자 그저 깨갱거릴 수밖에 없는 일본군이었다.
아무리 유럽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다고 해도 영국은 영국이었으니.
굳이 영일동맹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본이 영국의 일에 대놓고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펑궈장으로서는 대단히 열불나는 상황.
그간 심혈을 기울여 베이징으로 가는 보급을 차단해 왔는데 죄다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으니.
남쪽의 전세 또한 토벌군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두 배가 넘는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차이어의 호국군은 연일 승전고를 울렸다.
더 시간을 끈다면 자칫 양쪽에서 협공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펑궈장도 알 터였다.
전황은 요동치고 있었다.
항공정찰을 보고 받을 때마다 펑궈장의 군세는 시시각각 변했다.
즈리성에 넓게 퍼져 철도를 점거하던 군대가 베이징 남부 쪽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의 방어전.
참호전에서 수비가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한 수비보다 어려운 것은 어떻게 하면 적이 공격해오도록 만드는가이다.
미리 진지를 다 꾸려놓은 포화망 안으로 적이 알아서 들이받아 준다면야 누구나 승리할 수 있겠지만.
적도 바보가 아니니 불리한 전투를 자청할 리 없다.
그러나 그 불리한 전투에 뛰어들도록 유도하는 것이 결국 국지적 전술과 차별화되는 거시적 전략의 힘이며.
지금 막 베이징 전선에서 그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결판의 날이 가까워온다.
펑궈장의 대공세가 머지 않았다.
***
시간은 언제?
아침? 오후? 저녁?
펑궈장의 선택은 새벽이었다.
동이 트기 이전인데 멀리서 익숙한 폭음이 들렸다.
독일제 크루프 야포.
한정된 중화민국의 무기 제원은 그놈이 그놈이니, 공화군과 똑같은 무기였다.
포격이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 공세의 강도를 유추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다.
새벽부터 시작된 포격은 해가 중천에 솟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포격이 길어질수록 예측되는 공세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펑궈장은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작정인가 보았다.
하지만 75밀리 야포의 태생적인 한계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토벌군의 것과 동일한 크루프 야포를 동원하여 화력 훈련을 했었다.
당시의 결론은 참호를 포격하는 일은 그저 포탄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75밀리의 화력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려면 결국 포물선으로 곡사(曲射)하는 수밖에 없다.
포탄을 높이 띄워 참호 안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크루프 야포의 발사각은 고작 15도에 불과.
게다가 곡사로 목표물을 조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 계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능하지 않은 전법이었다.
쾅! 콰쾅! 쾅!
전장에 폭음이 무성하였으나 넓게 펼쳐진 참호는 무너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몸을 한껏 웅크리고 포격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
"우와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적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포격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사령부는 포격을 중지하고 보병돌격을 명령하는데.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선에서는 포격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물론 포탄에는 눈이 없으니 공화군이든 토벌군이든 가리지 않는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포탄 세례와 함께 토벌군이 일제 돌격을 감행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달음박질은 이파리가 칼날인 철조망의 숲, 검수지옥(劍樹地獄)에 가로막혀 멈췄다.
원래라면 포격으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보병이 돌격할 길을 깔아주는 것이 정석이나.
포탄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드넓은 전선의 철조망을 어떻게 다 제거하겠는가.
어느 정도 길이 열렸다 싶으니 출혈을 감수하고 몸으로 뚫으려 시도하는 토벌군이었다.
그러나 아직 지옥의 길은 끝나지 않았다.
투타타타타타타타.
진지에서 구릿빛 포신이 일어서며 초열지옥(焦熱地獄)의 겁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철조망에 몸을 뜯기며 참호 가까이 접근한 토벌군은 맥심 기관총의 십자포화에 쓸려나갔다.
작정하고 오늘 안으로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토벌군이 끝없이 몰려왔다.
군데군데 돌파된 참호 안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사이로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여전히 귀가 먹먹할 정도의 총성과 폭음이 끊이지 않는데.
아비지옥(阿鼻地獄)과 규환지옥(叫喚地獄)에서 허우적거리는 죄수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 부르짖음은 다른 모든 소리를 뚫고 나왔다.
나는 전선에서 떨어진 벙커에 서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역시 전쟁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
토벌군의 공세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무자비한 기관총의 화력에 전의를 상실한 토벌군이 줄줄이 항복해 왔다.
총을 버리고, 군복마저 벗은 채, 빤스 바람으로 투항해오는 자도 있었다.
공세를 조금만 더 이어갔더라면, 전선이 무너졌을 텐데···. 라고는 해주지 못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투 초반 보병들이 감행했던 용맹한 돌격과는 사뭇 다른 허무한 결말이었다.
의문은 그날 저녁에 풀렸다.
손이 결박당한 펑궈장을 호송하여 온 자는 북양군 제3사단장 우페이푸였다.
"한신 장군?"
"접니다."
"민족을 헐뜯고 외세와 영합하는 한간을 잡아 왔습니다. 그래도 옛 상관이었으니, 군사재판에서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우페이푸를 꼬드겨 토벌군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내 의도는 맞아떨어졌으나.
기껏해야 돤치루이 쪽으로 합류하는 그림 정도를 예상했지, 아예 항명을 통해 직접 펑궈장을 압송해올 줄은 몰랐다.
"구국의 결단을 내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이미 패배가 뻔히 보이는 싸움. 지휘관 자리를 맡은 이후부터 병사들의 목숨은 제 손에 있는 것인데. 어찌 함부로 개처럼 죽어가게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1차 공세로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했음에도 제3사단의 2차 공세를 이어가라는 사령관의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페이푸는 기골이 장대한 거한.
호쾌하게 말하는 폼이 시원시원했다.
"날이 늦었으니, 일단 반란군의 수괴는 감금하고 전쟁의 수습 방안은 차후 논의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우페이푸가 떠난 후.
방안에는 목줄에 매인 개 한마리만 남았다.
개가 날 노려보았다.
독기가 잔뜩 차오른 것이 예전에 총통부에서 돈다발을 앞에 두고 날 무조건 죽일 거라 일갈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이렇게 됐군. 펑궈장."
"···. "
"당신의 예언 중 확실히 몇 개는 이루어졌어. 나는 승승장구했고 우리는 전장에서 맞붙었지. 다만 나는 아직 살아있군."
"···."
펑궈장의 눈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얼굴에 힘을 주었는지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미 오늘 하루 동안,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피를 목도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펑궈장이 천하에 없는 충신인 양, 피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구니 기분이 있는대로 가라앉았다.
"야, 펑궈장. 문무겸비로 이름 높았던 북양의 호걸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본인의 욕심으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네 덕분에 나는 중화민국 제일의 학살자가 되어버렸다."
"···."
"너는 그리 미련한 자가 아니잖아. 제제를 한답시고 위안스카이가 장쉰을 끌어들였을 때, 그때 이미 북양정부는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다.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지. 그런데 너는 왜 끝까지 억지를 부린 거야? 혹시 천성이 개새끼라 그저 개판이 즐거웠던 거야?"
대답 없이 살기만 뿜어내는 펑궈장을 두고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정말 공화군을 섬멸하고 베이징을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위안스카이를 이어 차기 대총통이 되고 싶어서? 아니면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 그저 내가 미웠는지도 모르겠네. 그저 날 죽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맞아."
지금껏 한마디도 없었던 펑궈장이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저 널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확실히 내 예언은 틀렸어. 불행하게도 나는 널 죽이지 못했군."
"다행스럽게도겠지. 네 욕심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다. 수만이 될지도 몰라."
문득 펑궈장이 웃었다.
입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하냐? 혀 깨물었냐? 그런다고 안 죽어."
"다행스럽게도 나는 널 죽이지 못했지만, 너는 곧 죽을 거다."
"뭔 소리래."
"끝까지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잘한 결정 같군."
"뭔 소리냐고."
"흐. 흐. 흐. 토벌군은 관동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지금쯤이면 일본군 2개 사단이 만주 철도를 타고 베이징으로 남하 중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