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08)

< 아시아의 구원자 >

 일본제국 육군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분을 못이겨 내각회의에서 뛰쳐나왔다.

 노년에 이런 시련을 겪게 되다니. 어찌하여.

 문제의 시작은 총리가 고안한 21개조 요구였다.

 칭다오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 대놓고 중국 침략 의지를 드러내는 강압적인 요구.

 그때 분명 기회가 있었다. 야마가타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면 아무리 총리의 의지가 강경하다고 해도 제동을 걸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당시 야마가타는 칭다오에서 한신에게 당했던 수모로 열불이 나 있었다.

 워게임의 추억을 되새기며 뤼순공방전의 전훈이 어떻고, 또 일본 육사의 후배가 어떻고.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한신이 내뱉었다는 발언은 토씨 하나하나가 밉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연유로 옳다구나 총리의 제안에 찬성했다.

 한술 더 떠 한신의 사과를 요구하는 22번째 조항을 추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가간의 중대사에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었을 때부터 분란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

 22개조 요구는 언론에 노출되었고, 도리어 한신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일본이 나서서 놈을 중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준 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베이징에서 터진 복벽사건은 상황을 더욱 꼬아 놓았다.

 총리는 중국의 변란을 다시 없을 기회라며 일본군의 개입을 주장했으나, 야마가타는 걱정스러웠다.

 오늘날 일본이 아무리 욱일승천하는 신흥열강이라 해도, 메이지유신 이후 아직 반세기도 흐르지 않았으니.

 여전히 눈치를 보아야 한다. 제국주의적인 행보를 시도하려면 다른 열강들의 동의를 구하는 무수한 사전 절차가 필요하다.

 조선도 그렇게 해서 어렵게 삼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근육이 좀 붙었다고, 대뜸 한반도의 수십 배가 넘는 중국을 병탄하려 들다니.

 뒷수습을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야마가타는 복벽사건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일본 공사관에 중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몸을 의탁해 왔던 것이다.

 총리는 하늘이 대일본제국의 편에 서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내각의 각료들이 맞장구를 쳐대니.

 야마가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톈진의 지나주둔군이 베이징의 복벽을 진압하러 출병했다.

 그러나 한신의 공화군은 한 발 빨랐고 일본군은 다시 칭다오 공략전의 재탕처럼 헛물만 켤 수밖에 없었다.

 야마가타의 상식으로는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수용할 만한 수준이었다.

 다소 과격한 애국충정의 발로로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총리는 만주의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의 투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야마가타로서는 섬뜩한 이야기였다.

 일러전쟁 당시 야마가타는 일본군 최상위 지휘부인 대본영에 있었다.

 당시의 승전보는 일본이 가진 능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끝에 얻은 기적이었다.

 러시아군이 몇 달만 더 버텼더라면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본국의 전력을 채 절반도 발휘하지 않은 상태였다.

 철도가 완공되지 않은 탓에 러시아 육군이 제대로 동원되지 못하였으며.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발트 함대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항행해 오느라 한껏 지쳐있었다.

 게다가 피의 일요일 사건같은 국내 정치 불안으로 지휘부에서는 통일된 의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일러전쟁은 그야말로 신이 일본을 도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어떻게 지난 번과 같은 운을 기대하겠는가?

 인도를 삼킨 대영제국마저도 먹다가 체할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중국이다.

 아무리 오늘날 중국이 쇠락하였다 해도 조선에서 겪었듯 민족주의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 함부로 자극했다가는 된통 당할 수 있음을 야마가타는 잘 알고 있었다.

 자택에 돌아온 야마가타는 분에 못 이겨 외투를 내동댕이쳤다.

 총리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문관 주제에 어디서 군사를 논해?"

 전쟁이 그저 책상 위에 던져지는 숫자놀음인 줄 아는 머저리들.

 총 한 번 제대로 쏴본 적 없는 주제에 싸움은 또 왜 그리 좋아하는지.

 다음 총리는 무조건 군인으로 앉혀야 한다.

 문관 출신하고는 답답해서 같이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겠다.

 이미 중국의 전쟁에 쓸데없이 개입하였다가 손해를 보았다.

 지나주둔군이 가로막은 베이징과 톈진의 외길을 영국이 나서서 뚫어준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일영동맹 이후 꾸준히 좋은 관계를 맺어온 양국 간에 발생한 최초의 충돌이었기에.

 급선무는 관동군의 출병을 막는 것이다.

 일중전쟁은 이르다. 지금 전쟁이 터지면 일본은 저 서유럽 못지않게 진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하인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공작님, 전에 말씀드렸던 정치단체 현양사의 대표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뭣 때문에?"

 "중국의 변란을 일시에 해결할 계책을 들고 왔다는데요."

 그런 게 있다고?

 야마가타는 귀가 번쩍 뜨였다.

 남자는 자신을 우치다 료헤이로 소개했다.

 매서운 인상에 야쿠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시아의 정세를 장황하게 떠들어대기에 중간에 말을 끊었다.

 "난 바쁜 사람이야. 요점을 말해라."

 "요점은, 중국을 점령해야 할 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우군으로 만드는 겁니다."

 "어떻게."

 "제가 사람을 한 명 압니다. 중화민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혁명가이지요. 그를 내세워 친일 정부를 구성한다면 중국에서 일본의 이름을 드높이고 향후 막대한 권익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나에서 제일 이름이 높다고? 그건 한신이란 놈 아니냐?"

 "음···. 아닙니다. 그깟 애송이보다 훨씬 명망 있는 자입니다. 쑨원, 들어보셨습니까?"

 아는 이름이지만, 애초에 정치가 따위.

 말만 조잘대는 자들은 야마가타가 좋아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쳇, 보나 마나 강성한 대일본제국에 빌붙어서 부귀영화를 노리려는 자겠지. 일본의 지원을 부탁하며 입에 발린 미사여구를 쏟아내는 놈들이야 이미 처치 곤란으로 쌓여 있어."

 "아닙니다. 그는 특별합니다."

 "뭐가 특별한데?"

 "쑨원은 혁명을 바라고 있습니다."

 "말했잖아! 그깟 혁명 어쩌고 떠들어 대며 한자리 차지하려 눈치나 보는 지나놈들은 도쿄에 이미 가득하다고."

 난폭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우치다는 의외로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나직이 말했다.

 "쑨원은 혁명을 바라고 있습니다."

 좀전과 같은 말인데, 의미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혁명? 뭔 혁명을 말하는 거야?"

 "동아(東亞)의 평화와 대아시아주의의 실현을 말함입니다."

 "흥, 어림도 없는 얘기로군."

 "쑨원은 중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면 일본과 함께 세계의 중심을 아시아로 가져올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야망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무늬만 혁명을 표방하며 뒤로는 적당히 자기 잇속을 챙기는 그저 그런 정치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쑨원만의 장점입니다."

 우치다가 그렇게까지 얘기하자 야마가타는 약간 구미가 동하는 걸 느꼈다.

 그래도 말은 퉁명스럽게 나왔다.

 "그놈이 연기를 잘하는 건 아니고?"

 "하하, 연기라니요. 쑨원. 중산 선생을 한 번 보시면 제가 드린 말씀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처럼 순수하고 투명한 사람을 저는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좋아, 한 번 데리고 와 봐."

 ***

 정말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오랜 기간 앉아있던 야마가타는 아첨 떠는 인간이라면 무수히 겪어본 바였다.

 그러나 이 쑨원이라는 자는 우치다의 말처럼 정말 달랐다.

 "···그러므로 남방과 북방이 갈라져 싸우는 것은 동양의 화평과는 동떨어진 얘기입니다. 필요한 것은 중국에 잔존한 혁명파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일한 세력의 출현이니, 저는 진실로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진정한 혁명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광둥은 우리 당의 동지가 오래도록 경영하는 땅입니다. 광둥을 거점으로 2개 사단 이상의 주력군을 구축한다면 남방의 혼란을 평정하고 베이징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원조를 해주십시오."

 원하는 게 있으면 온갖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다 은근슬쩍 털어놓는 것이 이 바닥 장사꾼들의 생리일진대.

 쑨원은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으러 온 것 마냥 당당했다.

 자신에게 원조만 해주면 당장 통일 중국을 이루어 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올 거라는 말을 메시아처럼 늘어놓았다.

 "그···, 자네가 말하는 동양의 화평이란 게 무슨 얘기인가?"

 "공작님은 일영동맹을 지지하십니까?"

 뜻밖에 쑨원이 물어오자 야마가타는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일영동맹은 일본제국이 오늘과 같이 부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네. 영국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처럼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야."

 "그 말씀이 아닙니다. 과거를 묻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와 미래를 여쭙는 겁니다."

 이놈 봐라?

 내 마음을 읽었나?

 야마가타는 세계 최강의 패권국인 대영제국이 어째서 동방의 이름 없는 섬나라와 동맹을 맺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일러전쟁 이후 동맹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했다.

 지금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는 지대한 장벽은 바로 영국이니, 앞으로는 맞부딪칠 일만 남았다는 것이 야마가타의 판단이었다.

 "내 생각은 됐고,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영국은 수백 년 동안 일관된 정책을 펴 왔습니다. 자신들의 희생양을 찾아 우방으로 삼는 것이지요. 일러전쟁을 보십시오. 결과적으로 일본이 승리하였지만 그게 어디 쉬운 전투였습니까? 영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자기들 대신 피를 흘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영국은 새로운 희생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게 중국입니다. 근래에 중국과 영국이 제법 친밀해졌다고는 하나, 그 배경에는 일본의 성장이 두려운 영국이 중국을 키워 같은 황인종끼리 싸우게 만들려는 간계가 숨어있음입니다."

 야마가타는 점점 쑨원의 말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말에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으나.

 확실한 점은 그의 강력한 자기 확신에 마법 같은 끌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일영동맹이 아니라 중일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황인종 세력은 연합하여야 하며 아시아는 유럽인의 예속에 저항해야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운명공동체입니다. 중국의 존망이 곧 일본의 흥망성쇠와 연결되어 있으니, 일본 입장에서도 하루빨리 중국이 통일되어 안정된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은 자네를 지원하라는 얘기군."

 "맞습니다. 

 야마가타는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그럼 그 통일된 중국에서, 대총통은 누군가?"

 "저는 한때 공화정이 공고히 자리 잡을 수만 있다면 정권을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오직 저만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동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런 저를 비난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통일 중화민국의 대총통은 제가 될 겁니다."

 오히려 좋다. 적당히 야심이 있어야 한다.

 기껏 친일 정부를 구성했는데 권력을 포기해 버리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니까.

 "문제는 관동군이야. 출동 명령을 오늘 내리냐, 내일 내리냐 하는 판이니까."

 "위안스카이는 벌써 민중의 지지를 잃었습니다. 그를 더 지원하는 것은 낭비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중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지도자이니 제가 토벌군을 무찌르고 베이징에 들어가 권력을 쟁취해 보이겠습니다."

 "그럴싸한 말이긴 한데, 저 내각의 양복쟁이들은 말을 들어먹지 않아서 말이야."

 "제가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야마가타는 위엄을 잡으며 말했다.

 "이건 어떤가? 그놈들은 종이 쪼가리라면 환장하니. 미래의 대총통 각하께서 일본제국과 지나 양국 간에 동맹 조약을 맺는 걸세."

 쑨원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

 며칠 후.

 중일맹약(中日盟約)의 문서에 쑨원이 서명했다.

 중화민국과 일본은 동아의 영원한 복리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제휴한다는 내용.

 군사와 경제, 정치 등의 긴밀한 협력을 약속하는 11개조로 채워진 조약이었다.

  

 때마침 펑궈장의 토벌군이 한신의 공화군에 패하면서 붕괴했고.

 쑨원을 지원하기로 한 일본 정부는 관동군의 출병을 취소했다.

 이어 도쿄항을 출발하는 여객선 위에 눈을 빛내는 한 사나이가 서 있었으니.

 아시아의 구원자, 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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