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08)

< 논공행상 >

 조용한 독방.

 긴 잠에서 깨어났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던 노인은 문득 깨달았다.

 이곳은 자신의 대저택이다. 이름은 위안스카이다.

 분명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자 중화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인데.

 지금 이 꼬락서니는 뭐지?

 "쿨럭, 쿨럭."

 얕은 기침에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다. 팔을 들어 올리니 앙상하게 말라 있다.

 "아버님!"

 고개를 돌리니 위안커딩이 눈물을 훔치며 내려다 본다.

 위안스카이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어찌된 일이냐···?"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커딩···. 우리 장남 아니더냐."

 "아버님께서 정신이 드셨다!"

 위안커딩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에 따라 방안에 있던 다른 이들도 일제히 반색하며 다가왔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그들의 감정선이 이해되지 않았다.

 관람석에 앉아 경극(京劇)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들의 환호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커딩.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예, 아버님.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안커딩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베이징에 들어온 장쉰의 변자군에게 감금당한 뒤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던 일.

 늑대 굴을 피해 들어간 곳이 호랑이굴이었던 일본 공사관에서의 일

 일본공사관 역시 위안스카이를 감금하다시피 신변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찬물을 잘못 마셨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일. 

 한꺼번에 닥쳐 온 액운으로 사경을 헤매다 일본의 대중국 정책 변화로 얼마 전에야 자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 중국의 정세는 어떠냐?"

 "아버님께서 내리신 조서로 펑궈장 장군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내 조서라니?"

 "모르십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자신이 내렸다는 조서의 내용을 위안커딩이 재잘거렸다.

 한신을 반역도로?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내가 그랬나···? 모르겠다. 그저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예?"

 "펑궈장이 군사를 일으켰다면서."

 "아버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펑궈장은 한신에게 당했지만, 아직 북양삼걸 중 두 사람이 건재합니다. 저번 전투에서 패퇴한 병력은 제7사단뿐입니다. 이제 아버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 다시 북양군을 규합할 수 있을 겁니다."

 "펑궈장이···, 한신에게 졌다고···?"

 위안커딩은 아랑곳하지 않고 돤치루이의 토역군이 군세가 대단함을 설파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신문···, 신문을 줘 봐라."

 "여깄습니다, 아버님."

 <순천시보>.

 북양정부의 강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객관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신문이다.

 그덕에 역설적이게도 위안스카이가 즐겨보는 신문이었다. 국내의 여론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진정한 중화의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언제 돌아오는가? 중국이 기다리고 있다.

 - 호국을 자처하던 남방의 반란군. 결국 갈가리 찢겨 자기들끼리 세력다툼.

 - 한신은 과연 영웅인가? 홍콩에서 시작된 그의 어두운 행적 집중 탐구.

 하나하나가 구미에 쏙 들어맞는 맛깔난 기사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이게 진짜 <순천시보>라고? 자신을 개같이 욕하고 있어야 할 판에.

 날짜를 보니 며칠 전 것이었다.

 "오늘 신문은 없느냐?"

 "어···, 예. 지금은 없습니다."

 "하나 사 와라."

 "아, 그게. 지금 공화군이 베이징을 장악한 탓에 항의의 의미로 신문을 찍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힘이 들었다.

 위안스카이는 방안에 걸린 서화(書畫)를 지목했다.

 "커딩. 저 계곡의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전에 진상품으로 들어온 용이 승천하는 서화가 있었는데, 그걸로 바꿔 달 거라."

 "예, 아버님."

 위안커딩이 잽싸게 나가자 위안스카이는 심부름꾼 아이를 불렀다.

 "거리에 나가서 <순천시보>를 한 부 사 오너라."

 위안커딩보다 아이가 먼저 돌아왔다.

 아이의 손에는 오늘 자 <순천시보>가 들려있었다.

 신문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절로 손발이 떨려왔다.

 -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 위안스카이!

 - 그를 군신이라 부를지니. 차이어, 중국을 구하다.

 - 무쌍장군(無雙將軍)에 봉해진 한신.

 위안커딩이 건넨 <순천시보>를 다시 펴보았다.

 확연하게 활자가 조악하며 내용도 중구난방이다.

 마침 위안커딩이 방안으로 들어오다가 몸이 굳었다.

 "커딩, 어떻게 된 거냐? 이건 <순천시보>가 아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종이 쪼가리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가짜구나! 네가 날 속였어! 지금껏 내가 황제가 되길 원한다는 여론도 죄다 거짓이었구나!"

 "···죄송합니다."

 몸이 더욱 아려왔다.

 으으. 아프다. 너무 아프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황제 자리에 오를 결심을 했고 그것은 인생을 건 최고의 승부수였는데.

 그것이 이런 허술한 조작에 기대고 있었다니.

 헛살았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중국의 일인자에 오르기 여정은 오늘에 이르러 그저 치욕과 모멸이 되어 버렸다.

 "쿨럭, 쿨럭."

 기침에서 피가 묻어나왔다.

 위안스카이는 느낄 수 있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님!"

 위안커딩이 놀라며 다가왔으나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때 막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면면이 보였다.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측근들이었다.

 "왕스전···!"

 "예, 각하. 저는 여기 있사옵니다."

 문제의 도화선이 된 장쉰을 추천한 것이 왕스전이었으나.

 이리되고 보니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찾아와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자네밖에 없군···. 펑궈장은?"

 "그 친구는 감옥에 있어서 올 수 없습니다."

 "돤치루이는?"

 "음···. 바쁜 모양입니다."

 자신이 깨어났는데 이것보다 바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돤치루이 같은 놈을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다.

 "왕스전···. 나는 언제나 중국을 위했어···. 알지?"

 "그럼요, 각하."

 "차기 총통은 왕스전 자네가 맡아."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리위안훙 대총통이 계십니다."

 "그놈은 얼간이야, 술에 취해서 자기 서명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무슨 대총통···."

 "하지만 공화군의 한신 장군이 그를 강하게 밀고 있어 변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순천시보>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어째 한신의 이름은 들을 때마다 울컥하는 것이 있다.

 자신보다 까마득히 어린 조선놈에게 그간 당한 것이 얼마던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 펑궈장을 제압한 것도 그놈이라 들었다.

 "한신···. 한신이라···."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응어리진 회한이 가슴속을 할퀴며 생명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그놈이 나를 망쳤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위안스카이는 눈을 감았다.

 향년 55세. 예순을 넘긴 사람이 없다는 집안 내력이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

 베이징의 고급 요정(料亭) 앞.

 리위안훙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말은 네가 다할 건데 내가 꼭 있어야 하겠냐?"

 "누가 그럽니까? 제가 말을 다할 거라고."

 "그럼 내가 말하라고?"

 "당연하지요. 대총통 각하."

 "제기랄. 아무리 봐도 난 대총통의 그릇이 아니야. 부총통이 딱 좋았다고."

 "위엄 챙기세요."

 망설이는 리위안훙을 대신하여 요정의 문을 열었다.

 점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이미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리위안훙의 얼굴이 환해졌다.

 "량 장관! 차이 장군! 오랜만에 뵙소."

 "오셨습니까, 각하."

 "각하라니, 그깟 허례는 집어치우시오."

 미리 자리한 두 사람은 량치차오와 차이어.

 남방에서 차오쿤의 토벌군 제2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베이징에 올라온 것이었다.

 "크게 번질 것 같던 변란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여기 있는 익무(益武)와 무쌍(無雙), 두 장군의 덕이 컸지."

 익무장군 차이어. 무쌍장군 한신.

 아무리 보아도 나는 이름빨이다. 

 호사가들은 나를 초한쟁패기의 한신과 어떻게든 엮으려 안달이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타난 자는 북양파의 돤치루이였다. 삽시간에 방안에 긴장감이 흘렀다.

 "오호. 호국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여 계시니, 이 사람이 오늘 크게 개안하는 기분이오."

 돤치루이가 거들먹거렸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안했는지 그가 다시 말했다.

 "왜들 그리 굳어 계시오? 이 자리는 공적을 따지기 위함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요. 다들 편하게 즐기는 것이 어떻소?"

 "오냐. 그럼 이리 와서 어른께 술 한 잔 따라 보거라."

 리위안훙이 하인을 부리듯이 손짓하자 돤치루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하느냐? 어서 따르지 않고."

 돤치루이는 내키지 않는 듯 멈칫거렸으나.

 결국에는 주전자를 들고 리위안훙이 내민 잔에 졸졸 술을 부었다.

 "뭐 이리 쥐똥만큼 따르느냐? 배포가 그것밖에 안 되느냐? 하기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전쟁 막바지에 가서야 대뜸 토벌군을 진압한다며 난리 피우는 모양이 우습기는 했다만."

 뭐야, 리위안훙 형님.

 아까는 죽는소리를 해대더만. 잘하잖아?

 역시 그의 진가를 보려면 술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었던 시절.

 그의 위세를 업고 사람을 무시하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 돤치루이였다.

 "토역군의 편성이 완료되지 않아 참전이 늦었던 것이오. 토역군이 전쟁을 끝내기 전까지 반란군의 수괴 펑궈장에게 맞서 싸워준 두 분 장군께는 감사하는 바요."

 "예끼! 돤 장군은 일단 말투부터 고쳐야겠군. 어른에게 말본새가 그게 뭔가?"

 어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

 그러나 어른이 별건가. 대총통이면 어른이지.

 "죄, 죄송합니다."

 "각하 붙이고."

 "예, 각하···."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타박하는 동안.

 새로운 인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있군요!"

 호국전쟁의 승운이 공화군 쪽으로 기울 무렵부터.

 편승해서 콩고물 주워 먹으려는 각양각색의 세력이 나타날 것은 예상했지만.

 쑨원의 출현은 나로서도 뜻밖이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장 위협적이던 소문은 만주의 일본군이 참전한다는 것.

 펑궈장의 토벌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관동군이었다.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쑨원의 외교적 노력으로 출병은 취소되었다.

 그러니 이번 호국전쟁에 있어 나름 그는 지대한 공로를 세운 셈이었다.

 "리위안훙 각하.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돤치루이 장군도 오랜만에 뵙소. 량치차오, 자네는 흰머리가 더 늘었군. 차이어 장군은 처음 뵙소만, 과연 군신이라는 위명이 헛되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그리고···."

 쑨원의 시선이 날 훑는데, 묘한 적의가 느껴졌다.

 "한신. 장군. 좋아 보이는구려."

 "예, 쑨원 선생님도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아내를 새로 맞이하였는데 워낙 내조를 잘한다오. 한신 장군도 만난 적이 있다지? 칭링 말이오."

 "예."

 다양한 세력을 대표하는 4개 진영의 수장들이 한 곳에 모였다.

 돤치루이의 말마따나, 겉으로는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자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음식과 술이 나왔다.

 리위안훙이 건배사를 읊었다.

 "군주의 시대를 넘어, 중화민국에 새롭게 밝아올 공화의 미래를 위해! 건배!"

 쭈욱.

 "돤 장군, 잔에 남은 거 뭐야? 건배가 왜 건배인지 몰라?"

 "죄송합니다."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구박할수록 분위기는 더욱 더 화기애애해졌으니.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주전자를 여섯 개째 주문했을 때.

 돌연 쑨원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서, 대총통의 궐위(闕位)로 인한 선거는 언제쯤으로 잡혀있습니까? "

 리위안훙이 떨떠름하여 대답했다.

 "궐위 선거라니. 나는 법이 규정한 대총통 승계권자요. 차기 선거는 적법한 임기가 끝난 내후년에나 열릴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화민국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아직 위안스카이의 흔적이 정부 곳곳에 남아있으니, 말소하고 아예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 이미 의회에서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되었소. 북양정부의 흔적 같은 건 없소."

 "그 헌법이라는 것 말입니다. 따지고 보니 문제점이 많더군요."

 "그, 그렇소?"

 리위안훙이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날 흘깃했다.

 그러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일단 도입부터 엉터리입니다. 중화민국의 영토를 규정한 부분에서 어찌 티베트와 몽골, 신장이 빠진단 말입니까."

 다시 시작됐다.

 쑨원의 하나의 중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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