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공행상2 >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쑨원.
리위안훙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 내게 말해봐야 소용없소. 입법은 의회의 소관이니."
"하지만 중화민국의 대총통 권한대행이잖습니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셔야지요."
"아, 글쎄. 권한대행이 아니라 정당하게 승계했다니까 그러네."
"어쨌건 지금의 헌법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날림으로 제정된 것이니 무효로 하시지요."
쑹자오런이 여기 없는 것이 다행이다.
그 고생해가며 통과시킨 헌법이 매도당하는 것을 보면 쑨원의 멱살이라도 잡을지 모른다.
리위안훙이 반응이 없자 쑨원은 량치차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량치차오, 자네와는 혁명이 터지기 이전부터 곧잘 다투었었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네도 인정하겠지? 만족이 지배하는 청나라의 봉건 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오직 혁명이 답이었어. 자네가 말하는 점진적인 개혁 같은 건 그저 청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였을 뿐이라고."
"···."
량치차오가 대답이 없자 쑨원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입헌파와 혁명파의 대결 같은 건 이제 다 옛날 얘기일 뿐이야. 이미 혁명은 일어났고 남은 것은 한족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지. 그 점은 자네도 동감할 거야. 그 뭐냐, 자네의 저서에 나오는 세계 4대 문명도 있잖은가.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 또 뭐였지?"
"메소포타미아 문명."
"맞아. 그거야. 자네 말대로 중국은 고대로부터 세계의 중심이었어. 지금은 잠깐 부침을 겪고 있지만 앞으로 더 큰 제국으로 도약할 거야. 내가 그리 만들 거고!"
"자네가?"
"그렇다네. 우리는 함께 갈 수 있어. 예전에 우리가 처음 도쿄의 다락에서 만났을 때, 혁명이니 입헌이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중국의 미래를 두고 청운의 꿈을 펼쳤던 것처럼. 지금이라도 다시 힘을 합쳐 봅세."
쑨원이 손을 내밀었다.
량치차오는 쑨원의 손을 한참 들여다보다 천천히 말했다.
"맞는 말이야. 우리는 함께 갈 수도 있었지.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나?"
"뭔가?"
"내 사상은 학문을 처음 배운 이후로 언제나 같았네. 중국의 평화와 안정만이 내가 몰두하는 바야. 그러나 자네는 언제나 급격한 변혁을 원했지. 한 방의 거대한 충격으로 천지를 개벽하고 싶어 했어. 그 점이 나와는 맞지 않았던 거야."
"흥, 평화와 안정은 기반을 제대로 다진 이후에야 가능한 법. 얼기설기 새운 모래성 정부에서 무슨 평화를 바라나."
"어쨌건 나는 헌법을 지키겠어."
량치차오를 회유하려는 시도까지 실패하자 쑨원은 굳은 얼굴로 실내를 훑었다.
차이어는 조용히 빈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돤치루이는 땅콩을 까먹고 있었으니.
쑨원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한신 장군도 같은 생각이오? 지금의 헌법이 바르다고 보시오?"
"저는 군인입니다. 정치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군인이기 전에 한 성을 담당하는 지방관이잖소. 할 말이 많을 것으로 아는데."
"저는 할 말 없습니다."
문득 쑨원이 이를 갈았다.
마치 으르렁대는 듯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예전의 나는 아름다운 말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지. 양보와 배려의 미덕으로 중화민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요. 이제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세상에 다른 길도 있음을 깨달았소. 나는 중국의 진정한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서약한 몸. 반대의 목소리는 듣지 않을 생각이오. 당신도 각오하시오."
흥겨웠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쑨원이 계속해서 딱딱대며 말했다.
"당신의 음모는 알고 있소. 어째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들어서는 걸 막으며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지. 티베트와 몽골, 신장 등의 소유권을 왜 주장하지 않는지."
"왜입니까?"
"당신은 왕이 되고 싶은 거요. 애초부터 조선인인 당신에게 한족의 민족정신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소. 당신과 같은 지방 군벌들은 중화민국의 암적인 존재요. 세금으로 편성한 군대를 마치 사병인 것처럼 다루지. 내 말이 틀렸소? 세력권 내에 울타리를 치고 재산을 불릴 생각밖에 없잖소? 통일 중국이 오히려 본인에게 해가 되니 저해하려는 거잖소?"
나는 덤덤히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중화민국의 군인입니다. 왕 같은 것은 꿈꾸어 본 적도 없습니다."
"하! 그럼 말해보시오. 저 동북의 장쭤린(張作霖)이 만주에서 어떻게 횡행하고 있는지. 산시성 옌시산(閻錫山)의 왕국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 떠드는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소.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차이어 장군의 윈난성만 해도 이미 북양정부와 선을 긋고 독자적인 행보를 꾸려온 지 오래요. 돤치루이 장군은 또 어떻소? 북양파의 군벌들은 위안스카이 사후 각자 살 길을 찾는답시고 즈리성과 안후이성 등지에서 지역 장악에 목매고 있으니."
쑨원이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설픈 통치로는 어림도 없소. 정부가 군권을 확실히 틀어쥔 채, 지방 군벌들을 말소해야만 하오. 그리하면 자연스럽게 군벌이 장악하고 있는 신장과 몽골 등의 영토 문제도 해소될 거요."
"그렇지 않아도 민권과 군권을 모두 움켜쥔 도독을 해체하여 성장(省長)과 독군(督軍)으로 나누는 방안을 의회에서 논의 중에 있습니다. 지방의 행정은 성장이 담당하고 군사는 독군이 담당하는 거지요."
"임시방편일 뿐이오! 군권이 당신과 같은 자들에게 있는 한 중국의 혁명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거요!"
엄밀히 말해서.
쑨원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동북3성의 장쭤린과 같은 자는 적당히 북양정부에 충성하는 척하며 벌써 독자적인 군대를 운용하고 있다.
장쭤린이 언급되는 이유는 단순히 군벌들 중 세력이 가장 크기 때문.
이미 전국에 크게는 1개 성, 작게는 1개 현을 장악한 군벌들이 수백 명이 된다.
위안스카이의 실책이겠지만, 당연히 이 꼴로 나라를 제대로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은 능사가 아닙니다."
그 많은 놈들을 다 어떻게 족치냐고.
지금 시점에 정벌을 논해봤자 춘추전국시대의 재림밖에는 되지 않는다.
겉으로라도 중화민국 정부를 표방하여 한 테두리 안에 두는 것이 낫다.
내 말에 쑨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흥, 결국엔 그리 나오는군. 그럴 줄 알았소. 나는 이번 공화당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소."
누가 참여시켜 준댔나?
"그럼 뭘 하실 생각입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회담은 결렬이오."
쑨원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돤치루이가 입을 열었다.
"저 인간은 항상 큰 뜻이 있는 것처럼 과장하길 좋아하지만 기실 실제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이번 관동군의 출동을 막은 외교적 성과라는 것도 결국에는 일본에 아첨을 떨어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잘 되었습니다. 저런 인간은 공화정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돤치루이가 미소지으며 뒷담화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표정이 성치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혁명을 위해 같이 달려온 동지였기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을 위하는 쑨원의 진심이야, 누가 의심하겠는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차이나 그레이트 어게인을 주장하는 그와는 항상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눈꼴 시리던 인간이 없어졌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공적을 따져 봅시다."
돤치루이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쑨원이 이번 정부에서 빠지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리위안훙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바라는 게 있나?"
"저는 큰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육군부장관. 딱 그 자리면 만족합니다."
확실히 돤치루이는 이미 육군부장관을 지낸 적도 있고, 그 자체가 과한 요구는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화민국 중앙군의 통솔자로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육군을 양성하는 데에는 최고의 자리이기도 하다.
현시점 북양파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돤치루이에게 그와 같은 권력을 쥐여줘도 되는지 고민이 되는 부분.
리위안훙이 눈으로 내 의견을 물었다.
위안스카이가 죽고, 펑궈장이 몰락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북양파는 건재하다.
돤치루이의 안후이파는 호국전쟁에서 오히려 세력을 불렸고.
펑궈장의 즈리파는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물려받았다.
장쭤린의 펑톈(奉天, 봉천)파는 전란에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참전군과 공화군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나 여전히 북양군에 비하면 부족하다.
아직은 북양파와 척질 수 없다.
내 끄덕임을 보고 리위안훙은 호탕하게 잔을 내려놓더니 술을 가득 부었다.
"그렇게 하게, 돤 장군. 다만 이 승진주를 다 마셔야 해."
"그러지요. 남자가 되어서 어른이 주시는 술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리위안훙이 내린 술은 그가 따로 가져온 고량주였다.
잔을 들이킨 돤치루이는 그대로 뻗어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엎어져 있어야 했다.
비로소 방안에 훈훈한 순풍이 부는 듯 분위기가 따듯해졌다.
지금껏 입을 거의 열지 않던 차이어가 내게 말했다.
"언제 한번 윈난성에 들려주시겠습니까?"
"경치가 좋은가요?"
"하하···. 그것보다는 일전에 말씀드렸던 워게임이 완성되어서 그렇습니다. 헌데 워낙 규칙이 복잡하여 윈난성에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지휘관이 없으니···. 한신 장군께서 직접 시험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지요."
량치차오는 쑨원이 사라진 이후,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장관님, 걱정되십니까?"
"음? 뭐가 말이오?"
"쑨원 선생님이 나간 뒤부터 줄곧 미간의 주름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티가 많이 났나 보군. 미안하오. 내가 실수한 것인지 자꾸 의심이 드는구려."
"편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미심장한 내 말에 량치차오가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전혀 그런 건 아니오. 다만···, 나는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민족주의의 위력을 잘 알고 있소. 저 독일의 아리아인들이 변란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일지니. 중산의 말은 다소 한족 중심으로 치우쳐있긴 하지만,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문명이 발전하는데 그보다 적합한 사상은 없다는 것이 내 솔직한 생각이오."
20세기는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성별, 계급을 초월하여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민족주의는 국가 개혁에 있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양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바로 민족주의였으며.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뉴클리어 아포칼립스를 불러올지니.
중화민족주의는 내게 일종의 달콤한 도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민족의 개념을 억지로 제거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강화하여 선동정책을 펼 생각도 없었다.
"저는 공화를 믿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는 것이 실태인데, 어찌 공화주의와 같은 어려운 사상을 중국 민중들에게 납득시킨단 말이오?"
"차근차근 해나가면 됩니다. 학교를 늘리고 표준중국어를 정비하여 익히도록 하면 점점 괜찮아지겠지요."
"이상론처럼 들리는군. 어느 세월에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지방의 군벌들은 지금도 호시탐탐 베이징을 넘보고 있소. 한신 장군이 말하는 공화가 자리 잡을 때까지 중화민국은 버티지 못할 거요."
"버틸 수 있습니다."
내가 간단히 말하고 입을 다물자 량치차오는 쓸쓸하게 웃었다.
"하긴, 점진적인 개혁은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인데. 이번에는 장군보다 내가 조급했구려. 수양을 더 해야겠소."
그날의 술자리를 마지막으로 호국전쟁의 공로자들은 중국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리위안훙이 대총통.
량치차오가 재정부장관.
돤치루이는 육군부장관이 되었다.
차이어와 나는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민군 분리 원칙에 의해 차이어는 윈난 독군, 나는 후베이 독군이었다.
그리고, 쑨원은···.
뭘 하고 있으려나.
***
쑨원은 상하이에 도착했다.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보내는 이들로만 구성한 중화혁명당.
그러나 까다로운 입당 조건만큼 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상하이에 온 이유 또한, 한 사람을 중화당에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뭐라고?"
쑨원이 랴오중카이에게 물었다.
랴오중카이는 홍콩에서부터 꾸준히 자금을 지원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잠깐만, 적어놨어."
"천치메이가 그리 높이 평가했다면서 어째서 나는 이름도 모르는 거지?"
"듣긴 들었을 걸, 까먹은 거지. 게다가 몇 년 전부터 당의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고 잠적해버렸으니 모를 만도 해. 여기 찾았다."
"말해봐."
"이름은 중정, 자는 제스."
"장제스라. 쓸모있는 녀석이었으면 좋겠군."
쑨원은 장제스가 자주 나타난다고 알려진 도박장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