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08)

< 참전2 >

 대총통의 주선하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회담의 목적은 중화민국의 세계대전 참전 시나리오 검토.

 중화민국 측에는 대총통 리위안훙을 중심으로 육군부의 장군들이, 대영제국 측에는 영국 공사와 영국 외무부의 아시아 지역 총책임자가 참석하였다.

 커다란 테이블에 양국 인사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 거창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회의장.

 몇 명의 통역을 배석하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가벼운 인사말이 오간 후. 영국 외무부 고위 관리가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지금 정부의 국제 승인이요?"

 "어···, 무슨 말씀이신지?"

 "참전을 결의하고 나설 정도면 본국에 바라는 것이 있지 않겠소. 지난 정부의 대총통이···, 위안스카이였지? 그는 아주 합리적인 인물이었소. 중국의 역량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쓸데없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 괜히 본국에서 북양정부를 승인했던 게 아니었소. 지금 정부도 위안스카이 만큼 성의를 보일 수 있소?"

 아시아 방면 책임자라더니.

 중국의 사정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니면 저 반응이야말로 제국주의 시대 혐성국의 현실 인식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일지도.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이 위안스카이 정부를 인정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청나라 정부와 맺은 각종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며 따까리 노릇을 자처했으니. 좋아할 수밖에.

 리위안훙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외무부 관리의 태도에 기가 죽어 겨우 입을 떼었다.

 "물론 바라는 것은 있지만, 말을 해도 어찌 그렇게."

 "길게 회담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본국의 제안을 알려드리지. 서부전선에 대략 3차례에 걸쳐 20만명 규모의 파견이 어떤지?"

 "20만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그러시오. 중국의 인구가 4억이라 들었소. 20만이 부담스럽소?"

 "그 규모는 우리 중앙군 병력의 반이오. 20만을 유럽에 파병했다가는 중화민국은 곧 재정난으로 쓰러질 거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이오."

 영국의 외무관은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을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오해가 있소이다. 중국의 현실은 잘 알고 있소. 아무렴 본국이 20만 군대를 요청하는 거겠소?"

 "그, 그럼?"

 "당연히 비전투 노동자를 말하는 거요. 동방의 중국이 유럽에 군대를 파병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하지만 서부전선의 싸움은 중국군에게는 지나치게 흉험하니, 사실 파병한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요. 마음만 받겠소."

 중국을 위하는 척하면서 묘하게 낮잡아 보는 말투.

 흔하디 흔한 혐성국의 인성이긴 하다.

 게다가 노동자라니.

 회담에 나오면서 안건 공부 안 했나? 예습 안 했어?

 나는 반대편에 앉은 영국 공사를 노려보았다.

 아, 상관 교육 똑바로 안 시키냐고.

 시선을 알아차린 영국 공사가 난처한 듯 소곤거렸다.

 "사실 노동자가 아니라 군대의 파병을 결의하기로···."

 "뭐? 중국군을 어디다 써먹어?"

 "그게···, 제가 여러 차례 보고드렸지만, 전력이 나쁘지 않습니다. 칭다오에서는 독일군을 상대로 싸워보기도 했고요."

 "칭다오는 일본군이 점령한 거 아니야?"

 "아닙니다. 중국이 소곤소곤···."

 영국 공사의 속삭임을 듣는 외무관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오늘부로 더 이상 리위안훙을 무능하다 욕하지 마라!

 그는 최소한 자기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림을 마친 영국 외무관이 험험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하, 전쟁을 대비한 참전군이 따로 편성되어 있으시다고. 진작 말하시지."

 이미 보고서에 써서 영국 공사에 다 넘겼거든요.

 "그렇다면 참전군을 맡을 장수와 이야기를 해보아야겠군. 어떤 분이시오?"

 "예, 접니다. 한신입니다."

 "참전군의 전력을 말씀해보시오."

 그것도 다 문서에 있지만.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병력 규모와 편제, 작전실행능력 등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방금 말씀드린 바는 지금의 편제일 뿐. 참전이 결정되고 나면 6개 사단 규모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과연 그렇단 말이군. 서부전선의 전황은 매일매일이 급박하니 큰 도움이 되겠소."

 "아닙니다. 서부전선은 희망하지 않습니다."

 거긴 지옥이다.

 힘들게 편성한 군대를 비좁은 참호전의 구렁텅이 속으로 처박고 싶지는 않다.

 이번 참전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중국군의 실력 양성도 있다.

 하지만 참호전에는 작전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니.

 그저 어느 쪽이 더 개지랄 같은 흙구덩이 속에서 오래 버티는가 하는 싸움일 뿐이다.

 서부전선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는데?"

 "말씀하셨다시피 중국군의 역량으로 서부전선에서 제 몫을 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대신 활약할 수 있는 다른 전선이 있습니다."

 "어디?"

 "중국의 넓은 영토에는 사막지대가 많으며 중국인은 더운 기후에도 잘 버팁니다. 중동 전역은 가까우며 중국군의 전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으니 적절하다고 판단합니다."

 이건 문서에 없는 내용이라 영국 공사도 놀란 듯 하였다.

 "중동이라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거요?"

 "갈리폴리의 대실패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한 치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수비가 견고한 갈리폴리 대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치고 올라가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갈리폴리란 말이 나오자 영국 외무관이 움찔했다.

 그만큼 1915년 현재 진행 중인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 최악의 실수로 기록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단번에 점령하여 중동 전역의 전투를 조기에 끝낼 생각이었던 영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멀지 않은 갈리폴리 반도에서 수십 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성급한 작전의 결과는 참담하였으니.

 상륙 과정에서 산화한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은 차치하더라도.

 상륙 이후에도 영국군은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채, 해안가에 발이 묶여 지옥 같은 참호전을 겪고 있었다.

 "돌아가는 전황을 매우 잘 알고 계시는구려."

 "장수라면 투입될지 모르는 전장의 상황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장군은 염려할 필요 없소. 아직 갈리폴리가 실패라기에는 이르오. 영연방의 병사들이 한 마음으로 항전 중이니 늦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유니언 잭(영국 국기)이 휘날리게 될 거요."

 올해가 갈 때 즈음이면.

 영국은 갈리폴리 전역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어떻게든 병사들을 후퇴시킬 방안을 찾으려 골몰하겠지만.

 지금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요. 다만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육군이 치고 올라간다면 오스만을 양방향에서 압박할 수 있으니 훨씬 효율적인 전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영국 외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군. 원하는 것이 있소?"

 나는 대답 대신 리위안훙을 바라보았다.

 누가 뭐래도 이 자리의 주재는 대총통. 

 턱을 괴고 있던 리위안훙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중국 전역에 설치된 수십 개에 달하는 조계(임대한 외국인 거주지)를 반환받고자 하오. 또한 의화단 운동 때 청조가 맺은 신축조약의 폐기를 원하오."

 지금껏 긍정적이던 외무관의 눈살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확실히 리위안훙이 말한 두 가지는 서구 열강이 확보한 중국 이권의 핵심.

 모든 굴레를 단번에 벗으려는 시도는 다소 성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다른 나라들의 권리가 섞여 있는 사안이라, 본국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아쉽지만 다른 방식의 보상을 생각해보는 게 좋겠소. 예컨대 군사 기술의 지원이라든가···."

 "물론 다른 열강의 의견들이 모여야만 가능하겠지. 중화민국은 다만 전후 회담에서 영국이 절대적으로 중국의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험. 그런 것이라면···."

 속내야 모르지만, 일단은 그럴싸하게 받아들이는 영국 외무관이었다.

 이거 나중에 전쟁 끝나고서 대충 입 싹 닦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하지만 확실한 전공을 올린다면 아무리 혐성국이라도 중국을 무시할 순 없겠지.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시게."

 "아편은 어쩌면 전쟁 이상으로 중국에 해악을 끼치고 있으니, 아편 판매를 중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갈리폴리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국 외무관이 뜨끔한 표정이 되었다.

 반세기 전의 아편전쟁은 중국에 아편을 팔겠다고 영국이 일으켰던 전쟁.

 누가 영국인을 신사라 했던가. 누가 영국인을 명예롭다 했던가. 

 "그건 확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소. 파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중국에서 영국산 아편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오."

 이미 중국 곳곳에 양귀비밭이 생겨 영국령 인도산 아편의 수익이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그리 쉽게 약속할 수 있는 거겠지만.

 어쨌건 아편의 유통길은 막으면 막을수록 좋다.

 조약의 큰 줄기가 잡히고 나자.

 병력 수송방안부터 시작하여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벌일 때의 작전권 등,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영국 외무부와 2차례 회담을 더 가진 끝에.

 중영공동방적군사협정(中英共同防敵軍事協定)이 맺어졌다.

 조약의 핵심은 영국과 중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결성한다는 것.

 그에 따라 자연스레 영국과 전쟁 중인 독일, 오스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전쟁 관계가 되었다.

 영국의 무기 라이선스 지원을 받는 것은 덤이었다.

 1915년 7월 13일.

 의회에서 중화민국의 세계 대전 참전이 결정되었다.

 올해 말까지 6개 사단으로 증원하여 내년 초에 출병하기로 의결되었다.

 14개조를 요구하던 일본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닭을 물고 간 것이 자기보다 몸집이 수십 배는 큰 늑대이다 보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14개조 요구를 취소하여 없던 일로 만들었다.

 영국은 벌써 수차례 파병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파병을 미루었다.

 영국 입장에서는 얍삽하게 제 이익만 챙기는 놈보다는, 좀 덜떨어지고 미련하긴 해도 어떻게든 도우려 팔 걷어붙이는 놈이 더 예쁘게 보일 것이니.

 영일동맹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었다.

 대신 이번 군사협정을 계기로 영국과 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나는 언제나처럼 다시 참전군의 편성에 몰입했다.

 처음 지을 때는, 보는 사람마다 왜 그렇게 크게 짓느냐고 의아해 하던 한양의 거대 병영이 병사들로 북적거리고 생활관이 땀 냄새로 후덥지근했다..

 에어컨···. 에어컨의 발명은 아직입니까!

 참전군 6개 사단.

 바야흐로 8만에 달하는 정예 병력.

 중기관총대대와 중포대대를 따로 두어 화력에서만큼은 전 중국 최강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역시 우수한 지휘관의 부재.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다.

 6개 사단의 지휘를 나 혼자서 맡을 수는 없었다. 최소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장군급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 얼추 정리되었을 무렵, 나는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윈난성이었다.

 일전에 차이어가 날 스카우트하려고 했었는데, 이번엔 내가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함이었다.

 ***

 윈난성은 덥고 덥고 또 더웠다.

 그래서 에어컨 발명이 언제냐고.

 의자에 대자로 몸을 뻗고 차이어를 기다렸다.

 문득 건장한 병사들이 낑낑거리며 큼지막한 나무상자를 들고 왔다.

 "이게 뭐냐?"

 병사가 대답하려는 찰나,

 나는 상자 안의 기물들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렸다.

 "워게임입니다."

 "독군께서 좋아하시나 보군."

 "그게···. 수년을 연구하여 겨우 만드셨는데 제대로 활용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

 "규칙이···, 많이 복잡합니다."

 "설명서가 있나?"

 "예, 여기 있습니다."

 쿵! 병사가 설명서를 내려놓자 먼지가 풀썩 날렸다.

 이거 몇페이지야. 100페이지는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

 첫 장을 넘기자 사뭇 비장한 차이어의 친필이 펼쳐졌다.

 - 「군사병략모의(軍事兵略模擬)」는 2인이 서로 군략을 겨루는 도상 연습이다. 지형과 병참, 군대의 편제와 작전술 등을 모두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본 모의를 마친 후에 지휘관이 마치 실제 전투를 치른 것과 같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순서대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일목요연하게 룰을 설명해 나가는 차이어의 차분한 문체 덕에 방대한 양임에도 술술 읽혔다.

 과연 중국 최고의 군략연구가라는 칭호가 허명이 아닌 셈이었다.

 보통의 워게임은 역사 속의 특수한 전투를 지정하여 모의 전투 형식으로 진행한다.

 일본 육사에서 겪었던 워게임 역시 뤼순공방전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차이어의 것은 달랐다.

 지형과 병력 편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구성하여 어떤 전투든 재현해 낼 수 있고, 또 어떤 가상의 전투도 시도해 볼 수 있게끔 고안되어 있었다.

 게다가 군기와해에 따른 모랄빵이나, 날씨 등의 무작위성을 추가하여 다회차 플레이도 가능하게끔 설계되어 있었으니.

 이거. 물건이었다.

 정신없이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자.

 눈앞에 차이어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가요? 괜찮습니까?"

 "이거, 당장 해보죠."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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