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08)

< 워게임 >

 워게임 군사방략모의.

 시자아아아아악하겠습니다!

 "가상의 군대와 전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이어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 왔다.

 이렇게 기대에 찬 차이어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

 "한 번 보죠."

 소총보병 중심의 군대, 포병화력 중심의 군대, 기동전에 특화된 기병 중심 군대까지 다양한 선택지.

 전장의 기후와 지형도 고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보병과 기병 중심으로 꾸리되, 전장은 사막으로 합시다."

 "사막이라,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중동의 전장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낯선 환경.

 물론 나뭇조각을 가지고 하는 모의 전투로 그러한 환경을 충분히 체험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어느 정도 단편적인 인상을 받을 수만 있어도 개이득이다.

 "그럼 사막을 기본으로 놓고 무작위 규칙에 의거하여 지형을 만들어 보지요."

 "규칙에 위반되는 것은 알지만, 제가 직접 설정해도 되겠습니까?"

 뜻밖이라는 듯 묵묵히 서 있던 차이어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무언가 노리는 게 있으신 모양인데, 기대하겠습니다."

 두꺼운 종이로 제작된 지형 카드를 이리저리 조합하여 지도를 구성했다.

 부대 또한 내 마음대로 기물을 배치하였다.

 "끝났습니다. 시작하시죠."

 "이건···! 중양(中洋, 중동)이군요.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닙니까."

 어케 알았누?

 "역시 식견이."

 "군사방략모의를 개발하며 전 세계 전쟁사를 많이도 연구했지요. 그래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중양의 전쟁이라면···, 짐작가는 바가 있지만 일단은 게임에 집중해 봅시다."

 "선공하시죠."

 "제작자 입장에서 어찌 그러겠습니까. 먼저 부탁드립니다."

 군사방략모의는 세 개의 페이즈로 구성된다.

 1. 이벤트 페이즈 :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가 뒤섞인 이벤트 카드를 뽑는다.

 2. 작전 페이즈 : 순찰과 진군, 원조와 돌격 등 여러 가지 작전을 골라 시행한다.

 3. 전쟁 페이즈 : 양 부대가 맞닥뜨리면 조건에 따라 주사위를 굴려 전투를 실행한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이벤트 카드를 뽑았다.

 작전에 따라 내가 이벤트를 섞어 넣을 수도 있지만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전장이 사막이니만큼 당연히···.

 <건조한 날씨> 카드.

 부대의 사기가 떨어진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먼저 지역 안정에 힘썼다.

 우호도는 중요한 요소.

 타지에서 작전을 실행할 때 가장 주요한 선결 요소는 토착민들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차이어의 턴.

 그는 카드를 뽑지 않고 한참 동안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번에 중동, 그것도 메소포타미아 전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차이어이니 양쪽 군대가 의미하는 바 역시 모를 리 없었다.

 병력의 질은 평범, 어쩌면 허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기후와 지형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으며 강인하게 전투의지를 불태우는 차이어의 군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과 판박이였다.

 대신 내 쪽은 병력이 더 많았으나.

 기후와 지형 이벤트를 뽑을 때마다 사기가 계속해서 떨어졌으며.

 식수 조달에 고통을 받는 한편 지역 토착민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참전군이었다.

 비로소 뽑은 차이어의 카드는 역시 <건조한 날씨>. 그러나 불이익은 없었다.

 그는 방어참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정답에 가까운 플레이였다.

 이 전쟁의 구도는 누가 보아도 차이어가 수비 하는 쪽.

 내가 공격하여 깨뜨려야 하는 구도였으니.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카드를 뽑고 기물을 옮기는 행위에 집중하였다.

 나는 주둔지를 안정시키고 철도를 정비하였다.

 강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보급선(補給船) 또한 확충하였다.

 점차 우호도가 증대되어 <토착민 반발> 카드를 뽑아도 자원에 타격이 가해지지 않게 됐을 무렵.

 차이어는 어느새 도시 주변으로 견고한 이중의 참호를 완공한 뒤였다.

 그가 말했다.

 "역시 게임은 게임일 뿐이군요. 실제 전장을 담아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갑자기 왜?"

 "전쟁 역시 정치적 행위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일 진데, 전쟁의 양상만 가져와 도식화하니 이렇게 돼버렸군요."

 "이렇게라는게 무슨 의미입니까?"

 워게임 초반에 생기로 반짝거리던 차이어가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다.

 "정치가 빠지니 구도가 단순해졌습니다. 한신 장군은 공격, 저는 수비. 한커우와 베이징에서 장군이 몸소 증명하셨지요. 작정하고 참호를 파 수비만 할 경우에는 깨뜨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차이 장군의 승리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어느 쪽도 상대의 본대를 항복시킬 수 없으니 무승부라 해야지요."

 "아니요. 다릅니다. 이 전황은 지키고자 하는 차이 장군과 뚫고자 하는 제 싸움이니, 수비에 성공한다면 차이 장군의 승리입니다."

 승리라는 말에도 차이어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만 접으시겠습니까? 더 하는 의미가 없군요."

 "설마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바그다드를 점령하겠습니다."

 차이어가 대놓고 우주 방어를 펼친 도시.

 지금부터 나는 그 도시를 중동의 바그다드로 칭하기로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가동하자 차이어의 눈빛이 비로소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갈라진 두 개의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따라 거침없이 중국군이 북상했다.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해봐야죠.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결국 전쟁의 결말은 우연성에 기대고 있으니, 주사위의 신이 강림하길 기대해 봐야죠."

 "재밌군요."

 차이어는 차분하게 오스만군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였다.

 어떤 방면으로의 공격도 모두 수비할 수 있는 완벽한 방어였다.

 마침내 중국군이 바그다드 바로 앞까지 진격하자 그제서야 차이어도 바싹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바그다드를 지나쳐 내륙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갔다.

 "그렇게 나오신다고요."

 "확실히 차이 장군의 말씀이 맞습니다. 오늘날의 전쟁은 수비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따라서 군략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적은 공격해오고 아군은 수비하는 그림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사막의 기후에 적응하고 토착민을 안내자로 둔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바그다드의 후방을 잇는 철도를 장악해나갔다.

 "주사위 굴리겠습니다."

 철도를 지키는 차이어의 군대가 얼마간 있었지만.

 압도적인 군세로 찍어 눌렀다.

 오스만 영토의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음에도 보급은 문제없었다.

 때는 겨울. 건기가 지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의 수량이 한창 풍부할 때여서 보급선이 안정적으로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겨울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겁니까?"

 "아다리가 맞은 거죠."

 자신의 영토가 유린당하는데도 차이어의 얼굴에는 오히려 활기가 되살아났다.

 본토의 보급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바그다드의 군대가 드디어 참호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시작은 바그다드를 지켜내느냐, 마느냐의 싸움이었는데.

 전투는 전혀 다른 곳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차이어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중국군을 쫓는 대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을 통한 보급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나와 똑같은 전략이었다. 

 눈을 뻔히 뜨고 당할 수는 없으니, 나는 도로 회군하였다.

 바그다드를 지나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합쳐지는 유역.

 차이어의 오스만군 3개 사단과 나의 중국군 4개 사단이 사막평원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섰다.

 "결국엔 이렇게 됐군요. 참호를 벗어나 평야에서 맞붙게 되다니."

 "불평입니까?"

 "아니요. 역시 한신 장군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 군대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셨잖습니까. 초심자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양군이 마주한 폭풍전야.

 차이어의 턴.

 이벤트 카드를 뽑은 차이어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작업질을 해서 섞어놓은 카드가 여기서 빛을 발하는군요."

 "좋은 거 나왔습니까?"

 자랑스레 내보이는 카드엔 <토착 병력 증원>이라 적혀 있었다.

 좀 전에 작전의 일환으로 카드 더미에 섞어 넣었던 것이 회전 직전에 뽑힌 것이었다.

 단순 운이라기에는.

 결국 미래를 내다본 차이어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지하드(이슬람에서 성전을 의미)에 따른 아랍군의 증원인 겁니까?"

 "그런 셈이지요."

 차이어는 배수진을 피하기 위해 강의 상류로 이동하였다.

 서로 진영이 뒤바뀐 채 보급 없이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쪽이 승기를 잡을 가능성이 컸다.

 내 턴이 왔다.

 이벤트 카드를 뽑았다. 뽑힌 카드는···.

 차이어와 똑같은 <토착병력 증원>.

 이거 갓겜이네?

 차이어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점령군에서 토착병력 증원이라니. 이게 가능한 겁니까?"

 "게임의 설계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운이지만. 초반에 제가 열심히 방어선을 건설하고 있었을 때, 한신 장군은 기후적응과 토착민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었지요. 지금 보니 제 방어선은 활용을 못 하고 있는 반면 한신 장군의 안배는 적절히 활용되고 있군요. 제가 몇 수 뒤져있는 게 분명합니다."

 나는 괜한 말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굳이 고증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아랍 민족이 갈가리 찢긴 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실정을 감안하면.

 오스만과 중국 양쪽 모두가 아랍군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가능성 있는 구도였다..

 나는 이벤트를 마치고 작전 페이즈로 들어갔다.

 병력의 수는 내쪽이 더 많다.

 급한 기동전인 탓에 양쪽 모두 포병화력은 미약하거나 없는 수준이다.

 이런 경우에는 역시 고전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최고다.

 나는 우익에 주력 보병대를 세우고 기병대를 좌익으로 우회시켰다.

 다시 차이어의 차례였다.

 그 또한 망치와 모루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

 차이어는 기동이 좋은 아랍군을 움직여 기병대의 우회를 차단했다.

 다시 내 차례.

 "이런. <식수 부족>이라니."

 처음보는 이벤트 카드.

 보급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오래 끌 수는 없다. 적어도 다음 턴에는 전면전을 해야한다.

 나는 차이어의 아랍군에 상관않고 그대로 기병대를 돌격시켰다.

 동시에 우익의 주력보병 또한 진군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차이어가 말했다.

 "다음 턴에 오시겠군요. 이제 제게 선택의 기로가 왔습니다. 선공을 가할지, 아니면 전장에서 상대를 기다릴지."

 이미 차이어는 유리한 고지대를 장악한 상태.

 누가 보아도 기다리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차이어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아무래도 꺼림칙하군요. 분명 무언가 노리고 계신게 있는데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 저는 선공을 택하겠습니다."

 스스로 요지를 포기한 차이어가 일대 공세를 펼쳐왔다.

 지형과 사기에 따른 유불리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엔 양군이 정면으로 맞붙는 대규모 회전이었다.

 "주사위 굴리겠습니다."

 전투는 총 2곳에서 일어났다.

 좌익의 기병대와 아랍군의 싸움.

 우익의 보병주력간의 싸움.

 승패는 반반이었다.

 좌익의 기병대는 아랍군을 대파하였으나.

 보다 중요한 우익에서는 밀고 밀리는 접전의 양상이 나왔다.

 "한 턴 더 필요하겠군요. 한신 장군의 차례입니다."

 나는 <토착병력 증원>을 통해 얻었던 아랍군을 움직였다.

 꽁꽁 숨겨두고 있었던 게릴라 부대였다.

 "아하! 노리시는 게 그거였군요,  아랍군을 게릴라로 굴려 후방 교란작전을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 턴만 더 있었더라면 게릴라군을 오스만군의 후퇴를 막는 모루로 쓰고 주력보병을 돌격시켜 망치와 모루를 실현할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전투는 진행중입니다."

 차이어의 말대로였다.

 10만이 넘는 군대가 뒤엉킨 대규모 전투. 

 지난 번에 백중세를 보였던 양군의 전투의지는 여전히 살아 펄떡이고 있었다.

 주사위가 또르륵 굴렀다.

 후방이 불안했던 오스만군이 중국군의 일제 돌격에 치명상을 입고 무너졌다.

 차이어가 감탄하여 말했다.

 "저는 전쟁사를 공부하며 보병은 모루고, 기병은 망치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현대전은 전혀 양상이 다르군요. 보병대가 기병과 같은 파괴력을 가질 줄이야."

 "예, 기병대는 애초부터 눈속임이었습니다."

 "정말 완벽하게 속았습니다. 이거야 말로 제가 군사방략모의에서 가능했으면 싶었던 그런 꿈의 전투입니다!"

 주사위를 굴릴 수록 오스만의 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차이어는 싱글벙글이었다.

 바그다드에 중국군이 입성하는 것으로 군사방략모의는 종료되었다.

 정오에 게임을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두 사람 다 어찌나 깊이 몰두하였던지.

 차이어가 문득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움짤거렸다.

 "왜 그러시지요?"

 "혹시···."

 "말씀하세요."

 "한 판 더하시겠습니까?"

 나는 밥부터 먹자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밥 먹고 한 판 더하자는 말로 알아들을까 봐.

 대신 윈난을 방문한 본 목적을 꺼냈다.

 "한 판으로 되겠습니까?"

 "예?"

 "방금의 전장을 구성한 이유는 차이 장군도 짐작하시겠지요. 저는 이르면 내년 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출병할 겁니다."

 "사막의 전쟁이라···."

 "참전군은 2개 군으로 나누어 운용될 겁니다. 제1군은 제가 맡는다 해도 제2군을 맡을 장수가 지금으로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차이어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참전에 대하여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어째서 중국과 상관없는 먼 나라의 전쟁에 목숨을 내걸려 하는지 의구심을 가득 품고 보고 있지요."

 "확실히···, 그렇지요."

 "하지만 국제사회는 피와 땀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라는 비웃음에 시달려 왔습니다. 저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그 인식을 바꾸고 싶습니다."

 차이어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냅다 말했다.

 "저는 차이어 장군이 참전군의 제2군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그러지요."

 거절할 경우, 차이어를 유혹할 몇 가지 군사지원 방안을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속 시원한 대답.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파병 전까지 저와 군사방략모의를 최소 10차례 이상 해주셔야 합니다."

 음···.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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