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사막의 한복판으로 >
우한에 폭풍우가 분다!
참전군의 군세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중영군사협정에 의거하여 한양 88식 소총의 대체로 영국의 쇼트 매거진 리엔필드(Short Magazine Lee Enfield). 일명 SMLE가 물망에 올랐다.
육군부장관 돤치루이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영국이 세계적 패권국이 된 것은 강력한 해양력 덕이지. 총기술 덕이 아니오. 오히려 총기 분야에 있어서는 독일이 최고란 것을 모른단 말이오? 한양 88식은 독일군 제식 소총을 모델로 한 명작인데 한시적으로 운용하는 참전군에서 임의로 바꾸려 들다니."
"저는 강요한 적 없습니다. 북양군은 예전처럼 한양식 소총을 쓰면 됩니다."
"비싼 돈을 들여 수입 소총을 쓴답시고 세금을 낭비하니까 육군부에서 염려하는 거 아니요."
"세금 든 거 없습니다. 수입 아닙니다. 민간 투자받아 라이선스를 구입하여 한양병공창에서 다음 달부터 생산에 들어갈 겁니다."
돤치루이가 딴지를 거는 것은 그가 단지 독일 유학파여서만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가 처음 북양6진을 편성한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북양군은 중국 최고의 신식 군대였다.
오랫동안 북양파가 베이징 최대의 파벌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북양군의 든든한 군사력이 뒤를 봐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조직되는 참전군은 현시점 세계 최강국인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례 없는 강군으로 거듭나고 있었으니.
돤치루이가 안절부절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이미 베이징에 있지 않았다.
차이어에게서 얻어온 워게임, 군사병략모의를 활용하여 장교들에게도 속성으로나마 사막 모래바람의 거친 맛을 시식해 보였다.
전혀 낯선 곳에서 벌어질, 완전히 새로운 전쟁.
어지간히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하여 이 정도면 나도 사막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1916년이 열렸다.
때가 왔다.
***
역시 사람은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라.
인간의 상상력이란 그토록 빈곤한 것이었다.
몇 달 간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저 무용지물이었다.
페르시아만의 항구도시 바스라.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날씨가 선선하니 좋군요."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차이어가 말했다.
선선한 건 맞는데. 1월에 이 정도 기온이라면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겨울이니까요."
"전쟁하기 딱 적합한 날씨입니다."
"서두르지 말죠. 지역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토착민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선글라스 너머로 차이어가 눈을 찡긋거리는 것 같았다.
수송선에서 병사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참전군 병력은 6개 사단. 이 정도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일거에 평정할 수 있을 것으로 내 나름대로 조율한 규모였다.
차이어와 나는 영국군 사령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인도 병사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번 전쟁은 영국과의 합동 작전으로 펼쳐지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국령 인도와의 합동이었다.
열악한 사막의 싸움에 귀중한 영국 젊은이들을 투입할 만큼 대영제국은 어리석지 않았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영국은 영연방 식민지들이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일으킬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문화 정책이 잘 먹혀들어 갔던 것일까.
도리어 영국을 돕겠다고 나서는 식민지 국가들이 줄을 서니.
그 이면에는 전쟁에서 영국을 도우면 전후 협상에서 자신들의 자치권을 확대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던 것이지만.
어쨌거나 영국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에는 거리가 가까운 인도군이 투입되었다.
"다소 꼴이 우스꽝스럽군요. 시작은 유럽의 전쟁이었는데, 이곳 사막에서 이해관계도 없는 아시아인들끼리 싸우고 있다니요."
차이어의 말에 비꼬는 투는 없었다.
그저 놀랍다는 뉘앙스였다.
"그만큼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세계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얼핏 이익과 손해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물고 물리는 국가 간의 관계를 몇 단계만 건너면 중국 또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그래서 참전하게 된 거니까요."
"그럼 그 이익의 출발은 뭡니까? 오스만과 영국이 왜 여기서 싸우고 있는 겁니까?"
"석유지요."
출발은 영국의 정유회사 APOC(Anglo Persian Oil Company)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페르시아 일대의 석유 채굴 독점권을 가진 영국은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만에 석유를 빼앗길까, 바스라를 거점으로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영국군 사령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닉슨 사령관님?"
존 닉슨 중장.
오랫동안 인도군의 지휘관으로 있다가 이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책임지게 된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다.
"사령관님!"
"으악! 안돼! 안돼에에에!"
마치 악몽에서 깬 것처럼 닉슨이 손을 휘저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눈 뜨고 잔 건가?
"정신 드십니까."
"누구, 누구야?"
"중화민국 참전군의 한신입니다. 이쪽은 차이어고요."
신분을 밝혔음에도 존 닉슨은 입을 헤 벌리고 날 쳐다보기만 했다.
이 사람이 진정 영국군의 사령관이라면, 앞으로 매우 고달플 것 같은 느낌.
"한신···. 차이어···."
"보고 못 받으셨습니까?"
"하···. 늦었어, 이미 늦었어. 흑흑흑."
갑자기 닉슨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차이어가 말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영어는 서툴러서 이해가 어렵군요."
"어···. 영어를 알아도 딱히 이해가 가는 상황은 아닙니다."
닉슨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쭈그리고 훌쩍였다.
정신이 붕괴한 사람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걸터앉아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존. 우리가 왔잖아?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지?"
"다 죽었어! 엉엉."
"누가 죽었는데?"
"병사들!"
"어디서?"
"쿠트!"
책상에 몸을 엎드린 닉슨의 손 아래에 어떤 문서가 보였다.
조심스레 손에서 빼내 읽어보았다.
차이어가 옆에 붙었다.
"뭐라 쓰여 있습니까?"
"구호 작전 최종 실패. 구호군 전투 지속 불능. 후퇴하겠음. 오스만 추격군과 상시 전투 중. 쿠트에 접근하였을 때, 병사들의 아우성이 아득하게 들려오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고 하네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령관님께서 정리벽이 있으신지 날짜별로 잘 구분해 놓으셨네요. 한 번 보죠."
또다시 잠이 든 것처럼 조용해진 닉슨을 옆에 두고 나는 전황을 체크했다.
차이어는 내가 했듯이 닉슨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마지막 문서까지 읽고 나자 닉슨은 어느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닉슨이 미쳐버린 이유를."
"알려주시지요."
"쿠트라는 도시에 영국군 13,000명이 갇혀있습니다."
"그 말은, 포위되어 있다는 겁니까?"
"예."
갈리폴리의 패전은 영국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당한 패배를 지중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회하기를 원했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곳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이었다.
1914년과 1915년 중순에 바스라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들에서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승리하였으니.
그 기세를 몰아 오스만 동부의 핵심 도시인 바그다드를 점령한다면 실의에 빠진 영국군의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내륙의 오스만 군세는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고.
기세등등하게 출병한 찰스 타운센드 소장은 바그다드를 향해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다가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쿠트라는 작은 도시에 갇히게 되었다.
"고립된 것이 작년 12월. 그런데 보급물자는 한 달분 밖에 없다는군요. 이미 1월 말이니.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겁니다."
"아까 구호군이라는 게 쿠트의 병사를 구하기 위함이었군요."
"원정군의 정예병력을 끌어모아 오스만의 방어선을 뚫으려 시도했지만, 쿠트의 병사들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도리어 구호 시도에서 죽은 병사의 수가 갇힌 13,000명을 넘어설 정도라니. 닉슨이 미친 것도 이해가 갑니다."
"미친 건 맞습니까?"
"제가 정신과의사는 아니지만···, 예."
차이어는 영어로 적힌 군사 보고서를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의 군사병략모의에 의하면 천천히 가기로 계획하였었는데···. 상황이 이러니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구호군이 꽤나 다급해 보이니, 누군가는 마중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저도 숫자는 읽을 줄 알지요. 오스만군에 쫓기고 있다는 구호군의 최종 보고가 한 시간 전에 온 것이군요. 지금 이순간에도 전투 중일지 모릅니다."
차이어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낮의 햇살이 강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제가요?"
"그럼 누가 가겠습니까. 저는 몸이 약해서 야전에는 영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제가 육사든, 임관이든 한참 선배 아닙니까?"
마치 기수를 언급하며 짬을 때리는 것 같은 모양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제가 가죠."
사막아 기다려라. 한신이 간다.
급한 대로 채비를 꾸려 말에 올라탔다.
함께하는 부대는 일명 한신특공연대.
우창에서 최초에 궐기한 제18영 출신이 주축이 된 전설의 특공대다.
특공대장 샤즈광이 내 옆에 따라붙어 투덜거렸다.
"대장, 이거 맞수?"
"뭐가."
"상륙한 지 이제 겨우 네 시간 됐는데 출동이라니. 우리 군, 원래 이렇게 날림으로 작전 짜지 않았잖습니까."
"작전은 없다. 사막과 친해지기 위한 산책길이야."
"그렇다기엔 전투 준비가 심히 빡세던데요."
"사막엔 몸길이 100미터짜리 거대 모래지렁이가 산다더라. 위험하니까 대비를 해야지."
"안 속습니다."
샤즈광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며 크게 외쳤다.
"자, 아랍의 낙타족 새끼들 족치러 가자!"
"야! 멍청아! 아랍인이랑 싸우러 가는 거 아냐. 우리의 적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라고."
"그게 그거 아닙니까?"
"잘 모르겠으면 모래지렁이나 잡으러 간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지렁이 사냥 가즈아아아!"
중동 전역의 첫 출동이었다.
***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샤즈광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 그런 상상해본 적 있슈? 갑자기 모래 폭풍이 몰아쳐서 절 사막의 아무 데로나 날려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방이 뻥 뚫린 이곳에서 어떻게 찾을 겁니까? 저는 영영 미아가 돼버리고 말겠지요."
"자식아, 내 말 안 들을래? 바다에서는 수평선을 조심하고 사막에서는 모래 능선을 조심하라 했냐, 안 했냐.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이 미쳐버린다고. 이미 사령부에 미친 사람이 있는데 오자마자 더 늘릴 수는 없다."
"누가 미쳤습니까?"
"몰라."
선두에는 길잡이가 낙타를 탄 채 대열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는 말을 몰아 그의 곁에 가서 보조를 맞췄다.
"이름이 뭐요?"
"아사드입니다."
"목이 마른 데, 물을 마셔도 되는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쭉 보니 당신은 한 번도 마시지 않더군요."
"물은 귀중한 것이니까요."
철학자 같은 말투.
진한 눈썹과 피부색은 바스라의 인도인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오스만군을 본 적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슬람교를 믿으시고?"
"예."
"그런데 영국군을 돕는군요. 왜죠?"
쭉 앞만 보고 가던 아사드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를 신기해하는 것처럼 아사드 또한 극동의 아시아인이 신기할 터.
"오스만은 수백 년간 베두인(아랍의 대표적인 유목민족)을 핍박해왔습니다. 그들은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입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중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중국이요?"
갑작스러운 아사드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직···. 아직 시간이 필요해.
내가 바라는 중국의 모습은 공화정부가 들어선 이후 얼마간 갖춰졌으나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
그러니 되는대로 지껄였다.
"중국은···, 민족이든 종파든 이데올로기든 차별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국가지요."
"우와, 낙원 같은 국가로군요."
"예, 뭐. 언제 한번 놀러 오시죠."
물론 이 말은 절대 안 올걸 알고 하는 말이다.
"꼭! 가보고 싶습니다."
아사드의 큼지막한 눈망울에 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탕! 먼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샤즈광이 달려왔다.
"들으셨습니까?"
"응. 가자."
"전원 속력을 높인다! 전투다!"
샤즈광의 고함과 함께 특공대가 말을 달렸다.
어느새 연달아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거친 사막의 한복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