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사막의 한복판으로2 >
모래 능선에 옹기종기 걸친 군대가 보였다.
터번을 쓴 영국령 인도군이 언덕에 몸을 숨기고 한창 응사 중이었다.
갑자기 후방에서 우리 부대가 나타나자 당황해 하는 인도군의 기색이 먼 곳에서도 느껴졌다.
"아군임을 알 수 있도록 인도 제국군의 깃발을 들어라!"
다이아몬드 별에서 빗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속칭 인도의 별이 그려진 붉은 기가 올라갔다.
깃발을 발견했는지 우리 쪽을 향하던 총구가 다시 오스만군을 향해 돌아갔다.
나는 말에서 내려 마구 달렸다.
모래 속으로 발이 푹푹 꺼졌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영국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어, 어디서 온 군이오?"
"중국의 동맹군!"
"차이나?"
특공연대는 일사불란하게 인도군 사이에 껴서 전투에 돌입하였다.
영국의 리엔필드 소총을 지급받은 첫 번째 부대였으니.
바뀐 제식 소총을 시험하는 첫 실전이었다.
합류한 중국군 병력은 500명에 불과하였으나.
우수한 리엔필드의 연사력을 바탕으로 적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오스만군 역시 인도군을 몰살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는지 구원군의 존재를 알고는 물러났다.
거대한 모래 언덕을 지지대로 삼아 숨을 골랐다.
강인한 인상의 인도군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원정군 3군단을 이끄는 펜튼 에일머요. 덕분에 살았소."
"한신입니다."
"한신···? 그럼 합류 예정이던 중국군의 사령관이 바로···.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렇게 젊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쿠트의 구호작전 실패한 겁니까?"
에일머의 낯빛이 급속도로 굳었다.
"적어도 이번 출병에 한해서는···. 그렇습니다."
"전투를 꽤 여러 번 치르셨던데요."
"3번의 큰 전투가 있었고 모두 패했지요. 본부로 돌아가 사령관의 얼굴을 어찌 보아야 할 지 벌써 걱정이군요."
당신 때문에 사령관이 미쳐버렸다고 말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물론 이 작전을 전적으로 에일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립된 13,000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성급하게 적의 방어선에 병력을 꼬라박았을 때부터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오스만의 군대는 상상 이상으로 용맹했습니다. 이런 군대를 보유한 나라가 어찌하여 유럽의 병자로 불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군세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니 온종일 병실에 누워있던 환자도 대우가 좋지 않으면 들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요."
한때 강성했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끝없는 연전연패로 유럽의 병자로 통했다면.
중국 또한 비슷하게 아시아의 병자로 불리는 처지였다.
오스만과 기묘한 동질감이 들었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가만히 침대에 묶여 치료랍시고 메스를 든 열강들의 집도만 기다리다 보면, 있는 장기 없는 장기 다 털리게 생겼으니.
이번 사막의 출정은 건강을 되찾은 환자가 병원에서 탈출하고자 외치는 절규였다.
에일머는 한 눈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의 풍모를 풍겼으나.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자포자기에 가까운 말을 읊조렸다.
"제3군단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할 뿐입니다."
"아직 모릅니다. 동쪽에서 새바람이 불고 있으니까요."
"그 말은 중국군을 말하는 겁니까."
"글쎄요."
***
에일머의 제3군과 함께 바스라로 복귀했다.
진지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패잔병의 귀환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닉슨 사령관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나는 그의 집무실에 죽치고 앉아 그간의 전황 분석을 했다.
석연치 않았던 몇 개의 사건들을 잇는 연결고리가 어슴프레 드러났다.
그날 이른 저녁, 차이어가 나타났다.
"사령관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정말요?"
"약간 불안해하고는 있으나 어쨌건 현재로서는 돌아왔습니다."
차이어의 말대로 병원에서 복귀한 존 닉슨 사령관은 추레한 꼴이 된 에일머를 보고도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는?"
"추정이지만 반 가까운 손실이 났습니다."
그가 꾸린 구호군 제3군의 병력 총합이 3만에 육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심대한 피해였다.
"쿠트는 어떻던가?"
"오스만의 참호는 견고합니다. 틈이 없습니다. 적군에 걸리지 않고 쿠트 바로 앞까지 접근했던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고립된 군대는 이미 병자가 속출하여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차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럼 함락당할 거란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쿠트에 고립된 제6사단의 타운센드 경은 훌륭한 야전 지휘관이니, 결코 전의를 잃지 않았을 겁니다. 구호군을 다시 꾸려 양쪽에서 호응한다면 병사들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닉슨 사령관이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결국엔 시간과의 싸움이군. 6사단의 병사들이 굶어 죽기 전에 구출해낼 수 있느냐의 문제야. 타운센드 장군이 물자를 배급제로 바꿔 최대한 버텨보겠다고 했으니···. 남은 골든타임은 길게 쳐봐야 삼주쯤일까···. 그 전에 어떻게든 구출해야 하네."
"제3군단은 더 싸울 수 없습니다. 다시 구호군을 꾸리려면 원정군을 재편해야 합니다."
"아···. 업보구나. 애초에 바그다드 진격을 명하는 것이 아니었어. 내 판단 때문에 그 많은 병사가! 갈리폴리에 이어 또다시 치명적인 패전이라니! 승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런던 시민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런던의 신문들은 또다시 암울한 소식을 전하게 되겠지!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닉슨이 또다시 폭주할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한신 장군. 어제는 실례했소. 사령관이란 자가 이 꼴이니 중국군에도 미안할 뿐이오. 자유롭게 의견을 내셔도 좋소."
"쿠트의 제6사단 구출작전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중국군에게?"
닉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잠깐일 뿐, 금세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중국군의 전력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이번 에이머 중장의 구호군은 원정군의 최정예였소. 그런 구호군도 뚫지 못한 오스만의 방어선을 중국군이 가능하겠소?"
"예."
내 간단한 대답에 닉슨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해주신다면 고마울 따름이오. 영국군 또한 있는 힘껏 지원하겠소."
"지원도 좋지만, 먼저 한 가지 약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어떤 약조요?"
"구출작전에 관련하여 전권을 위임해 주십시오."
"전권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이번 작전은 전적으로 제 판단하에 진행하겠습니다. 작전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제 결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면 합니다."
뜻밖이었는지 닉슨이 고민에 빠졌다.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작전이 실패한다면 책임은 지겠습니다."
닉슨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원정군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공세에 나설 수 없는 전력이었다.
결국은 중국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게 하겠소. 쿠트 구출작전에 한하여 한신 장군이 합동사령부의 최고 결정자요."
그날 밤.
숙소에 차이어가 찾아왔다.
"괜찮겠습니까? 그리 결정해버려도. 군사병략모의에 따라 병사들이 사막에 적응하는 기간을 두기로 했었을 텐데요."
"그랬죠."
"그런데 어찌 3주의 기한을 둔 급박한 요구를 받아들였습니까? 제3군처럼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우리 군이 당할 겁니다."
"누가 그럽니까? 3주가 기한이라고? 시간적 여유는 충분합니다."
"예? 하지만 분명 쿠트 제6사단은 보급물자가 다 떨어져서 굶어 죽기 직전이라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침에 닉슨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자료조사를 좀 했습니다. 이번 쿠트와 관련된 공방전은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습니다. 차분하게 접근할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고립된 제6사단 타운센드 장군의 이력을 읽어보았지요. 20년 전 인도에서 이번과 흡사하게 포위를 당했다가 살아남아 일약 영국의 영웅으로 등극했더군요. 빅토리아 여왕과 만찬을 즐기고 직접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재밌는 것은 20년 전 당시 포위를 뚫고 타운센드를 구출한 지휘관이 우연찮게도 이번 구호군을 이끈 에일머였다는 겁니다. 그 역시 무공훈장과 함께 출셋길을 보장받았지요."
차이어의 눈빛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가까운 곳에서 복무하다 보면 으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그 중요성이 언론에 지나치게 과장되이 선전되고 있습니다. 그 배후에 타운센드가 있습니다. 쿠트에 갇힌 채로도 런던의 라디오에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요. 시시각각 물자가 줄어드는 악조건 속에서 오스만에 용맹하게 맞서 싸우는 자신의 영웅적인 면모를 기깔나게 홍보 중입니다."
"뛰어난 장수라면 언론을 통해 전쟁 의지를 고취하는 것도 필요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아군까지 속여 넘기는 행위를 용납해야겠습니까?"
나는 조사한 제6사단의 군수품 관리현황표를 보여주었다.
"이 표에 따라 계산하면 제6사단의 물자는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보급선도 몇 번 받았고요. 넉넉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3달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타운센드 장군이 거짓말을? 대체 왜?"
"그는 원정군 사령부에 수도 없이 요구를 해왔습니다. 그가 보낸 전보에서 호전적이고 야망에 찬 그의 성격이 엿보입니다. 그 동안 유약한 닉슨 사령관을 엄청나게 쪼아댔습니다. 닉슨의 정신이 나가버린 데에는 타운센드의 지분도 상당 부분 있습니다. 모르지요. 이번 쿠트 공방전으로 닉슨을 쫓아내고 원정군의 사령관을 노리는 것일지도."
타운센드가 닉슨에게 보낸 메시지들을 보면, 그야말로 가스라이팅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황에 따르면 바그다드 진공을 주장하며 유럽 서부전선과 갈리폴리의 설욕을 강하게 부르짖은 것은 오히려 타운센드였으니.
메소포타미아 전쟁을 부풀려 세계대전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종결정권자라는 이유로 작전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닉슨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 닉슨 사령관에게 바로 알리지요!"
"아니요. 아직 에일머의 속내를 알 수 없습니다. 타운센드와 한통속일 가능성이 있으니 이 작전은 제가 혼자서 컨트롤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한신 장군이 오롯이 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 그렇지요. 반대로 말하면 작전 성공에 대한 공적은 오로지 제 것이 될 겁니다."
***
나는 주로 근방의 아랍 민족들, 즉 베두인들과 교류하며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런 나를 에일머는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랍 놈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편을 들고 있다고 해도 언제 영국을 배신할지 모르는 족속입니다. 출병은 언제입니까?"
"조만간이요."
"대략의 날짜라도 알려주시면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피로하실 텐데 쉬셔도 됩니다. 저희만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출병을 재촉하는 에일머를 무시하고 내가 몰두한 것은 바스라의 병참기지 개선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보급은 전적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의 보급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봐라, 샤즈광. 저런 꼴은 그 개판이라는 청나라 해군에서도 본 적이 없어."
바스라의 항구 앞은 바다라기보다는 거대한 흙탕늪에 가까웠다.
수로는 비좁아 배가 입항하려면 줄줄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병목 현상이 심각하였다.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참전군 2개 사단만 겨우 상륙했을 뿐, 나머지 병력은 아직도 바다에 대기 중이었다.
"샤즈광. 미안하지만 고생 좀 해야겠다."
"걱정 마십시오. 고생할 각오로 여기 온 거니까. 언놈을 죽이면 됩니까?"
"아무도 죽일 필요 없어. 수로를 넓히고 크레인을 댈 만한 항만 시설을 건설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전투 노동자들과 함께 오는 건데.
참전군은 한동안 건설 노동자로 전직했다.
이 주가 넘어가자 에일머는 보다 강하게 요구해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빈둥거릴 겁니까?"
"빈둥이라니, 말씀 참 섭섭하군요. 매일같이 흘리는 구슬땀이 안보입니까?"
"이 노가다꾼들의 땀이요? 처음에 중국에서 군대가 온다길래 잔뜩 기대했었는데, 헛물만 켰군요. 군인이 아니라 쿨리(중국 노동자를 비하하는 멸칭)만 잔뜩 싣고 와서는 본국의 전쟁자금만 퍼먹다니."
어떻게든 내 속을 긁으려 빈정대는 에일머였으나 급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대영제국의 자비로움은 익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역시 영국 음식! 소고기 깡통이 기가 막히던데요."
"배식이 쓰레기 같은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럴수록 얼른 전쟁을 끝내야 하는 것 아니요? 3주의 기한 중 벌써 2주가 지났소. 이대로면 쿠트의 병사들은 모조리 이슬람 놈들에게 강간당한 후 뒈지고 말 거요!"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 닉슨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착각하시는데, 사령관은 접니다."
에일머는 분을 못 이기고 대놓고 저주를 퍼부었으나.
내게는 그저 극찬으로만 들렸다.
"중국인은 싸움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민족이라던데. 과연 쿨리에 어울리는 쿨리 상관이로군. 평생 백인들 밑에서 노가다나 하시오!"
"아. 예."
한편 닉슨 사령관은 24시간 중의 12시간은 정신이 나가 횡설수설하다가.
나머지 시간에 정신이 돌아오면 꼭 날 찾아와 결정을 물리고 싶어 했다.
"어떻게 안 되겠소···? 한시적으로 에일머 장군을 지휘관으로 두고 합동작전을 짜는 것이."
"이미 합의를 했잖습니까. 쿠트의 구출작전은 제 권한입니다."
"알지만 그래도 부탁드리오. 에일머는 이미 수많은 전쟁에서 검증받은 능력 있는 지휘관이오!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도···."
"타운센드 장군이 그리 말하덥니까?"
"어, 어떻게 아셨소?"
닉슨은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사내였다.
전보를 굳이 읽지 않아도 닉슨의 말만으로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타운센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런던 타임지에 실린 타운센드는 적에게 포위당한 채, 쿠트에서 항전하고 있는 영웅의 반열에 이미 올라가 있었고.
포위망을 뚫고 그런 타운센드를 구출하는 일 역시 같은 영국군 장군 에일머가 되어야 했다.
동방의 이름 모를 애송이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그가 바라는 그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원하든 원치 않든, 너는 내 손에 구출될 운명이다. 타운센드.
네 영예는 내가 가져가마.
바스라 항구의 병참기지 토대가 구축되었을 무렵.
나는 중화민국 참전군 3개 사단을 집결했다.
참전군 제1군. 출격.
1916년 3월 20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