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의 겨울 >
중국군이 주둔한 1916년 한 해, 바그다드는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다.
후베이성 우한 공업지대에서 파견온 노동자들은 방울땀을 흩뿌리며 기반 시설 건설에 힘썼다.
일대일로 정책을 20세기부터 펴려는 건 아니지만.
영국의 자본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힘써 일한 결과, 1916년이 가기 전에 바그다드에 철도가 들어왔다.
괴성을 지르며 사막을 내달리는 검은 쇳덩어리에 올라탄 무니살렘의 아사드는 이렇게 술회했다.
"이제 길잡이는 필요 없겠군요. 아랍에도 봄이 올까요?"
겨울의 맹추위는 분명 수그러들었으나.
아직 봄은 일렀다.
바그다드를 내준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병사들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세계 물류의 중심, 수에즈 운하 방면으로.
수에즈 운하은 사실 바그다드나 쿠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중한 곳.
정치적 선전 선동 때문이 아닌, 진정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손을 뗀 오스만 군은 수에즈 운하 쪽의 팔레스타인 전역에 군세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중동 전역 힘의 구도가 어그러졌으니.
이전까지 백중세이던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오스만군의 우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바그다드에 주둔한 참전군에도 압박이 가해져 왔다.
그대로 오스만 제국 깊숙한 내지까지 진격하라는 요구였다.
내가 쿨하게 씹자, 영국 원정군 사령부는 직접 바그다드에 사람을 보내왔다.
전령이랍시고 나타난 자는 지나치게 거물이었으니.
쿠트 공방전의 주인공, 타운센드 장군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중화제국의 황제 아니신가!"
그놈의 황제는, 우씨.
타운센드와의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자꾸만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으려 했다.
이번에도 역시 바스라에서부터 기자들을 잔뜩 대동하고 나타나,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중화민국은 공화정이오. 황제는 없소."
"걱정 마, 한신! 너는 분명 아시아를 발 아래 두는 제왕이 될 테니까."
"그래, 타운센드. 당신이야말로 정치인이 되어 선거에 출마하면 썩 잘 어울리겠어."
바그다드 사령부의 문이 닫히고 기자들이 보이지 않자, 타운센드는 웃음기를 말끔히 거뒀다.
"이봐, 한신. 바그다드에 진주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 에일머 경이 그러더군, 중국인은 본성에 쿨리의 습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그렇게 벌레처럼 노동만 해서 뭐할 거야?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1년은 무슨. 과장이 심해. 내가 바스라에 발을 디딘 것이 올해 1월이었어."
"그때부터 하면 거의 1년이잖아! 오면서 보니 네 병사들 기운이 쌩쌩하더군. 그 기운을 놀리고만 있을 참인가? 이깟 얼뜨기 전쟁을 언제까지 지속할 생각인가?"
"얼뜨기?"
"그래! 유럽의 서부전선에서는 진정으로 세계와 세계가 맞붙고 있어. 그 위대한 전장이 날 부르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꼬라지를 봐. 낙타 똥냄새나 맡으며 머저리 같은 두건이나 쓰고 다니는 꼴을."
이것이 이 시대 타운센드를 비롯한 일반적인 군 장성들의 시각이었다.
서부전선이야말로 국가를 규정하는 고귀한 무언가가 맞부딪치는 전쟁다운 전쟁이며 그에 비해 나머지 지역들은 그저 흉내나 내는 싸움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처럼 전쟁을 낭만과 신화로 보는 시각은 양차대전을 겪으며 빠르게 사그라들 것이다.
전쟁에서 숭고한 가치 따위를 찾다니. 그저 국가 간 이익경쟁에 따른 젊은이들의 개죽음의 현장이잖은가.
타운센드 또한 여기 있으니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지, 참호전의 지옥을 봤더라면 바로 줄행랑을 놓았겠지.
"중국군이 아나톨리아(튀르키예 반도)로 진격하기를 원하나?"
"아나톨리아가 뭐야! 아예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야지!"
"아니. 진공은 여기서 멈춘다."
"뭐야? 대체 왜?"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아랍의 유목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땅. 그 때문에 오스만에 억압받는 아랍을 해방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중국군 또한 오스만과 다름없는 침략군이 되고 말 거야."
타운센드는 태어나서 그런 괴상망측한 말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침략이니, 뭐니. 그딴 걸 따지고 있다고?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시작된 이유는 페르시아의 석유 때문이잖나. 중국군이 일대를 평정하였으니 이제 영국의 전략자원이 위협당할 일은 없다. 오스만 제국의 내지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은 거절한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1917년에 이르자.
융성해진 바그다드에서 나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영국인 한 명과, 아랍인 한 명.
그들은 타운센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왔다.
***
중동 출정이 결정된 이후.
혹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놀랍게도 눈앞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앉아 있었다.
영국인 장교 로렌스와, 아랍인 파이살 왕자였다.
"몇 년 전에 들렀던 바그다드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이오? 요술이라도 부린 것 같군."
파이살이 새로 지어진 사령부의 벽을 발로 걷어찼다.
"보시오. 이렇게 세게 차도 흠집이 남지 않소."
"예. 지금 딱 좋습니다. 더 세게 차면 흠집이 날 테니 이만 멈추어 주시지요."
"흐흐, 알겠소."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파이살이었으나 나는 그 옆에 앉은 푸른 눈의 로렌스 중위가 신경이 쓰였다.
"잠깐만, 어쩌다 얘기가 이리 흘렀지?"
"아랍의 반란을 얘기하는 중이었습니다."
"아, 그렇지. 아버님은 영국의 이집트 주재 외교관과 여러 달에 걸쳐 긴밀한 협의를 통해 협정을 맺었었소."
"어떤 협정이었습니까?"
"아버님을 아랍의 왕으로 추대하는, 아랍인들의 왕국을 약속하는 협정이었소."
"그래서 왕자님으로 불리는 거군요."
파이살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왕은 아버님이지, 내가 아니오."
"영국의 조건은 오스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달라는 것이었습니까?"
"바로 맞췄소."
"제가 듣기에도 팔레스타인 전역에 아랍군의 활약이 대단하다더군요."
"하지만 문제가 있소."
파이살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최근 들어 오스만의 군세가 이전보다 훨씬 강성해져 게릴라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소."
"아, 그건 사실 메소포타미아 방면의 군대가 그쪽으로 합류하는 바람에."
"물론 알고 있소. 탓하려는 건 아니오. 내가 만나 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베두인들은 모두 당신을 좋아하더군. 아랍의 인프라 확장에도 도움을 주셨으니 오히려 감사 인사를 백번 천번 드려도 모자랄 판이오."
"과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문제란 뭡니까?"
그때, 잠자코 있던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영국이 이중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는 아랍인들처럼 흰 터번을 쓰고 있었다.
건조한 말투에서 억눌린 듯한 분노가 느껴졌다.
"어떤 협정이었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협정입니다."
아무래도 중동 지역이다 보니 내 지식에 한계가 있었지만.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아랍의 독립을 나몰라라 한 영국의 처사에 분노한 로렌스.
종횡무진 그의 활약상이 펼쳐지는 영화의 장면들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럼 귀하의 조국이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아니요, 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을 겁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랍을 두고 두 개의 상충하는 협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장교로서 조국에 해를 끼치는 행위을 할 수 없는 로렌스의 고뇌가 느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두 개의 협정 중 어떤 것이 지켜질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파이살 왕자님을 모시고 장군을 찾아온 겁니다. 장군은 아랍에 호의적이신 걸로 아는데, 아랍의 독립을 지지해주십시오."
이게 본론이겠지.
파이살 왕자 또한 애타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독립. 아랍의 독립이라.
어쩌면 나는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중동분쟁의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을 함께 하고 있는지도.
"저는···."
입을 열자 로렌스와 파이살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지지합니다."
파이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렌스는 강한 어조로 제안했다.
"그렇다면 함께 싸워주실 수 있습니까?"
"팔레스타인에서 말입니까?"
"예. 중국군이 바그다드와 쿠트를 함락할 때 아랍군이 함께 싸운 것으로 압니다. 같은 방식으로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를 함락할 때 아랍군이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전후 협상에서 제 조국 역시 아랍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이전보다 더 큰 고민에 휩싸였다.
파이살이나 로렌스나 기껏해야 내 또래였다.
국가의 이익 앞에 한낱 종이 쪼가리를 통한 약속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로렌스 중위. 영국과 프랑스가 체결했다는 협정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로렌스는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내 순순히 문서를 건넸다.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통치할 지역을 지도에 표시한 것이었다.
보자마자 나는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메소포타미아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은 프랑스가 먹는다는 쉽고 간단한 협정.
아니,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한 건 중국인데요?
명색은 영국군과의 합동작전이었지만 결국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횡단해가며 기동전을 벌인 건 중국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떡하니 영국이 먹겠다는 선언이라니.
역시 전쟁은 군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정치가 있다.
이대로 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을 시켜줄 수는 없다.
나는 로렌스를 향해 말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기다리십시오. 중국군이 아랍의 해방을 도울 겁니다."
***
참전군 제1군을 이끌고 바스라에서 수송을 기다리는 동안.
베이징에 요청했던 외교 사절이 도착하였다.
나타난 사람은 량치차오였다.
"차이어 장군은?"
"바그다드에 있습니다."
"아아, 오는 중에 할 게 없으니 지도만 들여다보았소. 바그다드에 가려면 사막을 건너야 하잖소? 아쉽지만 스승과 제자의 재회는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철도가 있으니, 사막을 건널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벌써 완공했단 말이오?"
"그렇소만, 일이 많아 바그다드에 갈 시간은 없을 거라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참전하겠다는 내 제안은 원정군 사령부에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영국으로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워준 중국군을 뽕까지 뽑아먹고 싶을 터.
알아서 전쟁터로 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내가 영국이 맺은 기만적인 이중협정의 내용을 알고 있으며.
그중 아랍 독립을 보장하는 협정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면 까무라치겠지만.
나는 량치차오에게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고 계획을 털어놓았다.
계획을 들은 량치차오는 킹콩처럼 자기 가슴을 때려댔다.
"왜 그러십니까?"
"내 생전에 중국이···, 중국이···!"
"중국이 뭐요?"
"영국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소."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군요."
"왜 편치 않다는 거요? 정말 환상적인 계획인데."
왜냐하면···.
"어쨌건 영국이나 중국이나 똑같습니다. 아랍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취할 뿐이지요."
"그게 어떻게 같소!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오. 혹시 모르는 일이잖소? 영국이 우리의 외교에 굴복하여 아랍의 독립을 허용할지도?"
그런 일이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요."
"마음 쓰지 마시오. 아랍의 독립을 담보로 중국의 채권을 탕감받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오."
"담보라니요. 그렇게 말하니 너무 직설적이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저 적당한 시기에 중국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음을 영국에 드러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나라를 세운 중화민국이, 같은 처지에 있는 아랍을 돕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물론 그렇게 입장을 밝히면 다급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을 회유하기 위해 솔깃한 제안을 해올 것이다.
중국이 진 빚을 탕감해 주고 각종 불평등조약을 해제해 주겠다는.
나는 당연히 그 달콤한 과실을 노리고 있지만.
만약 중국이 과실이 주는 포만감에 절어 아랍을 배신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금으로서는 감이 오지 않는다.
문득, 길잡이 아사드의 까만 눈동자가 생각이 났다.
언제고 중국을 방문해보고 싶다던, 무니살렘 부족의 젊은 청년.
뒤숭숭한 마음을 부여잡고.
1917년 1월 22일, 참전군 제1군이 바스라에서 출항했다.
수에즈 운하가 있는 카이로가 목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