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의 봄 >
대제국주의 시대.
청나라도 열강들에게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았지만 오스만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한때 강대한 이슬람 제국을 표방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근대에 들어 열강들의 난타를 처맞고.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 등지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잔뜩 쪼그라들었다.
이집트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영국의 보호령이 된 국가였다.
시작은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영국이 사들이면서부터였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양 패권을 잡기 위해 영국은 수에즈운하를 장악하는 데 힘썼고,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켜 영국의 영향력을 증폭시켰다.
그런 연유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영국군뿐만 아니라 영연방의 인도군,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군 등 세계 각국의 군대가 몰려들어 무지막지하게 붐비는 도시가 되었다.
거기에 중국군까지 합류했으니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이집트의 영국 대사 헨리 맥마흔은 나와 량치차오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량치차오와는 이미 친분이 있었기에 한결 편하게 맞았다.
"인도 외무장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티베트 독립 문제로 협상을 벌였던 적이 있죠. 그게 얼마 전 같은데. 카이로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환영하오, 량 장관."
영국이 티베트 독립을 지지한 속내는,
중국과 인도가 국경을 맞대지 않도록 함으로써 자기네들이 인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북양정부는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명 <맥마흔 라인>이라 불리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선 합의는 영국의 일방적인 통보로 끝나 버렸다.
량치차오도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는 북양정부의 지침때문에 본인의 입장도 난처했었다오. 하지만 그거 아시오?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는 실각하였고, 대신 공화정부가 들어섰다오. 공화정부는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니, 귀하가 몇 년만 더 근무했더라면 협상이 성공했을 텐데 말이오.."
"오, 그렇소? 온 세계가 제국주의의 물결로 자국의 이익확보에만 골몰하는데, 대의를 위해 티베트의 독립을 받아들인 중화민국에 찬사를 보내오."
로렌스 만큼이나 이질적인 영국인이었다.
제국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서구인은 흔치 않았다.
그가 이번에는 내 쪽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는 미소를 지었다.
"타운센드 장군 구하기 작전의 입안자! 중국의 젊은 용, 한신 장군! 만나서 영광이오. 영국이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소."
쿠트와 바그다드의 전쟁을 끝낸 후, 만나는 영국인들마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타운센드가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높여 놓았는지 실감이 되었다.
"저 역시 아랍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린 대사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결단?"
"그 선언 말입니다."
"아아. 그 선언 말이군."
맥마흔은 여전히 웃고는 있었으나 이빨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랍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어낸 그 선언.
일명 <맥마흔 선언>.
파이살 왕자의 아버지인 후세인에게 아랍의 독립을 약속한 사람이 바로 맥마흔이었다.
"중국은 대사님의 선언에 깊이 동감하며 아랍이 해방되는 그날까지 오스만의 압제에 맞서 싸울 겁니다."
"음···. 고마운 말씀이오···."
맥마흔이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아랍의 분할통치를 약속하는 협정을 맺은 것을 모를 리 없을 터.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불분명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 문제를 꺼냈다.
"그와 관련하여 실은 회담을 요청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어느덧 중국이 참전한 지도 상당한 시일이 흘렀으니, 중간 확인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얼···, 확인한다는 말씀인지?"
"중국의 참전은 중영공동방적군사협정에 의한 것. 대전쟁이 끝난 이후, 중국의 활약 정도에 따라 영국이 중국의 이권 확보를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하도록 명시하였습니다. 이미 중국군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고등 외교관이신 대사님께 확언을 받았으면 합니다."
평생 해온 일이 정치 그 자체인 맥마흔이니.
내가 군대를 이끌고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중간 확인을 요구하는 이유를 잘 알 터였다.
중국군이 그동안 사막에 흘린 피 값. 그리고 앞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흘릴 피의 가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확실히 아랍에서 중국이 일군 성과는 독보적이니. 영중군사협정은 지켜질 것이오."
"대사님께서 약속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헨리 맥마흔의 약속이라 칭해도 좋소."
<맥마흔 라인>과 <맥마흔 선언>에 이어 <맥마흔 약속>의 등장.
껄끄러운 얘기가 지나가자 맥마흔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로렌스라고, 장군과 비슷한 나이일 텐데. 아랍의 역사와 문화에 아주 해박하며 재가가 넘치는 젊은이요. 아랍 지역을 공략하려면 먼저 로렌스를 찾으시오."
"실은 로렌스 중위는 이미 바그다드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오, 그렇소? 수고를 덜었구려. 무엇 때문에 만났던 것이오?"
"아랍의 지지를 부탁하더군요."
나는 량치차오에게 눈을 찡긋했다.
아직 맥마흔 앞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통치를 약속한 비밀협정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동안 중국군은 아랍에서 영향력을 키울 것이다.
***
카이로에서 외교활동에 바쁜 량치차오를 내버려 둔 채.
나는 군대를 이끌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진지를 폈다.
진지 앞으로 팔레스타인 전역까지 장대한 사막지대였으니, 전쟁터로 향하는 마지막 거점이라 해도 좋았다.
언제나처럼 급하게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기후와 지형.
적군과 아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일 계획이었다.
이번 공세에는 특히 아군과의 협업이 쉽지 않아 보였다.
그저 차이어가 그리울 뿐이었다.
"한신! 왜 멈추나! 카이로에서 병사들이 충분히 전력을 비축하였으니, 당장 공격하자고! 적들이 우리 군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질풍처럼 전쟁을 끝내는 거야!"
하필이면 타운센드냐.
런던의 전쟁국이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 명확히 보였다.
내 의도가 어찌 되었건 간에 타운센드는 쿠트의 전쟁영웅으로 떠올랐고.
중국의 신비로운 젊은 용, 한신과 합을 맞출 만한 지휘관은 타운센드밖에 없다는 것이 영국의 판단이었다.
그들은 쿠트의 기적을 다시 한번 써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새로운 전역에 들어왔으니, 처음부터 시작해야지. 보급선부터 정비할 거다."
"그랬다가는 오스만에게 대비할 시간을 줄 뿐이야."
"동시에 우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생기는 거지."
"아오, 답답하구나.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서부전선에 참전할 수 없게 돼버릴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 얘기냐? 꿈 버려. 거긴 인세의 지옥이야. 안 가는 것이 낫다."
타운센드가 사령관으로 있는 영국군 제21군단.
앞으로 보조를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수에즈 운하 근처의 마지막 초목 지대에 아랍군 또한 진을 펴고 있었다.
파이살 왕자의 낙타부대였다.
한창 훈련하는 중이었다.
나는 파이살이 화를 내며 병사들을 다그치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샤즈광이 옆에 다가왔다.
"어떠냐, 샤즈광?"
"···옛날 생각이 납니다."
"옛날 언제?"
"대장님이 부임하기 전의 제18영 말입니다."
파이살의 병력은 5,000여명에 달했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꾸역꾸역 숫자만 채웠을 뿐, 군인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칭은 낙타부대라고 불렀지만 낙타를 타는 병사는 소수였으며.
잠깐 파이살이 한눈을 팔면 그늘에 드러누워 농땡이 피우기에 바빴다.
"그래도 저자는 열심히 하는군."
"정말이군요. 미숙하지만 열정이 있습니다. 저 수준이면 한신특공대에서도 상위권입니다."
"한신특공대라니, 이름 바꿔."
"이미 굳어져 무리입니다."
한참 아랍군의 훈련을 지켜보던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훈련에 열심이던 병사의 정체는 아랍인이 아니었다.
"저거···, 로렌스잖아?"
"누구요?"
마침 훈련이 끝났다.
내 쪽을 발견한 로렌스가 지친 기색도 없이 달려왔다.
"장군! 오셨습니까!"
그는 완벽한 아랍군의 복장에
행동거지조차 거의 베두인을 닮아 있었다.
괜히 아랍 전문가로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랍군으로 입대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파이살 왕자님의 훈련을 참관하고 있었습니다."
참관이라기에는 댁이 제일 열심히 하던데.
아니, 댁 혼자 훈련하던데.
"맥마흔 대사를 만나보았습니다. 당신을 아주 높이 평가하더군요."
"대사님은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역시 겸양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로렌스의 매력이었다.
강한 자아도취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나는 결심 끝에 입을 열었다.
어떤 식으로든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일전에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아랍의 힘으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탈환하여 전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요."
"예."
"하지만 결국 팔레스타인 전역의 주력은 중국군이 될 겁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그저 중국의 이익을 위해 싸울 뿐입니다."
로렌스가 눈을 껌벅거렸다.
"물론, 물론 그렇습니다."
"옥스퍼드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셨던데, 중화민국의 역사를 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압니다."
"중화민국은 최근 수천년간 이어오던 전제정을 종식시켰지요. 하지만 새로 들어선 공화정을 반기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열강들은 그저 중국이 이전처럼 뒤룩뒤룩 살이 찐 돼지 역할만 해주길 바라지요. 배를 갈라 고기를 먹어야 하니까요.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도 죄다 적들 뿐입니다."
갑자기 내가 중국의 역사를 늘어놓자, 로렌스는 눈이 커져 말없이 듣기만 했다.
"하지만 저는 믿고 있습니다. 부당한 억압에 대항하는 자유의 정신은 세계만민에 공통으로 적용될 것이라고요. 억압받던 아랍에 봄이 찾아와, 중동에서 중국에 호의적인 국가가 탄생하길 저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장차 중국의 이익이 될 테니까요."
"그 말···. 진심이십니까···?"
"당신이나 나나 비슷한 처지입니다, 로렌스 중위. 당신이 영국의 장교인 것처럼 나 역시 영국의 군사 지원을 받는 처지이지요. 대영제국은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고 그에 정면으로 저항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대영제국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그저 한 가지 가치. 자유를 위해 최대한 노력할 뿐입니다."
로렌스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하아. 아랍을 지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이익이 될 거라니. 방금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장군과 같은 분이 영국 지도부에 없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로렌스의 흥분과 달리,
내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중국에서 관직을 받고, 높이 올라갈 때마다 점점 책임감도 무거워져 갔다.
어떤 행동을 하든 먼저 득실부터 따지게 되니.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행동이 내 것 같지 않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방금 로렌스에게 털어놓은 말은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19세기의 홍콩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내가 바라던 세계가 있었다.
정치현실주의에서 벗어난 세계. 자유민주주의 중국, 평화로운 중동.
내가 아니면 누가 이룩할 수 있겠냐고.
진정된 로렌스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중국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나이에 상관치 않고 인재를 등용한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봅니다."
"나이뿐만 아니라 출신도 상관치 않습니다."
"장군의 출신이 어디길래···?"
"조선이란 나라를 아십니까?"
"조선이라면, 일본의 지배를 받는···. 이제야 자유를 이야기하는 장군의 정신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넓게 보아, 장군은 분명 조선의 독립 또한 노리고 계시겠군요."
"그렇습니다."
로렌스가 탄복했다.
"장군의 두 개의 조국인 중국과 조선의 역사에 흥미가 생깁니다. 중동의 일이 마무리되면 직접 탐방을 해보고 싶군요."
"언제 한번 놀러 오세요."
"예. 꼭 가겠습니다."
물론 절대 안 올걸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 잠깐만 로렌스는 진짜 올 거 같은데.
바스라에서 했던 것과 같은 보급정비 작업.
길길이 날뛰는 타운센드 진정시키기.
파이살의 낙타부대를 게릴라전에 활용하기 위한 훈련.
그리고 로렌스와 역사를 주제로 대화하며 친목도모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17년의 봄이 완연한 4월이 되었다.
나는 출정했다.
아랍의 봄을 되찾기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