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 >
"젠장! 이게 뭐야!"
황량한 사막을 달리는 자동차 안.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읽고 있던 신문을 찢어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자신이 누구인가?
위대한 아버지 독일의 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서부전선의 참패는 그에게 달갑지 않은 별명을 안겨 주었다.
"베르됭의 고기분쇄자라고? 젠장!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기는."
1916년의 베르됭 전투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수 킬로미터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에 겹겹이 이어진 참호와 참호.
그 짧은 거리를 전진하겠다고 독일과 프랑스 양군은 수십 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몰아넣었고.
그들은 참호 속에서 고기처럼 분쇄되었다.
팔켄하인은 억울했다.
베르됭의 전투에서 그는 자신이 의도했던 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내각에 산재한 정적들은 대전쟁 속에서도 팔켄하인을 견제하기에 바빴고.
그는 거짓 정보에 의존해 깜깜이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독일 병사 30만명이 희생된 뒤였으니.
그는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사령관님의 능력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베르됭 이후 루마니아 전역에서는 불과 몇 달 만에 놀라운 전공을 거두셨잖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오스만 제국의 총사령관으로 위촉되신 거구요."
함께 차에 탄 부관이 위로를 해왔다.
"그렇지. 나는 군인이니, 어떤 전장에서든 승리를 최우선 목표로 잡는다. 그거면 된 거야."
"예루살렘은 사령관님이 오신다는 걸 알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지켜낼 사람은 사령관님밖에 없습니다."
좌천된 팔켄하인은 루마니아 전역에 투입되었고.
최소한의 피해로 루마니아의 수도를 정복하여 손상된 명예를 일부 회복하였다. 그 뒤 근래 전세가 어려워진 오스만 제국 원수로 전격 발탁되어 다시 한 번 재기를 노리는 중이었다.
팔켄하인은 팔레스타인의 전황을 기록한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영국군이야 익숙하지만, 중국군은 처음 상대하는 적이다.
적의 젊은 지휘관의 이력이 독특하였다.
"한신이라. 어떤 녀석인지 아나?"
"아무래도 동방에서 온 자이다 보니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쿨리 출신이자 쿵푸의 고수라더군요."
"쿵푸는 알겠는데, 쿨리는 뭔가?"
"그자는 하라는 싸움은 안 하고 병사들 데리고 노역에만 힘쓰고 있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인이 뭐 다 그렇긴 합니다만."
팔켄하인은 전장의 보고서와 부관의 보고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노역만 한다기에는···. 최근에는 공격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군. 가자지구 전투에서는 중국군의 활약이 대단했던 걸로 나와있는데."
"아, 그건. 사령관님께서도 무능하기 그지없는 오스만 지휘관들을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그치들에게 패배한다면 그게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 아시아인들끼리의 전쟁수준이라는 것도 알만하고."
원수가 된 이후 팔켄하인은 사령부부터 재정비했다.
독일군이었다면 1개 여단을 지휘할 역량도 되지 못하는 자들이 장군이랍시고 오스만군의 지도부를 꿰차고 있었으니. 죄다 쫓아냈다.
이제 자신의 지휘 아래 오스만군은 강군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영국군 사령관 타운센드입니다 그는 명장입니다. 한신은 몰라도, 타운센드는 위험합니다."
"타운센드라면, 그 타운센드 구하기 작전의 주인공인가?"
"예. 런던 전쟁국이 수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구해냈던 바로 그 타운센드입니다."
팔켄하인은 심기가 불편하였다.
이미 그자는 중동 전역 승리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하찮은 전쟁일 뿐이지만, 그렇다 쳐도 때로 과장된 정치적 수사가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중동에서 울리는 영국의 승전보는 유럽 전선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흐. 타운센드 따위. 나는 팔켄하인이다."
"맞습니다. 사령관께서 이런 전쟁에 참전한 상황 자체가 사자가 토끼를 사냥하는 격이지요."
가솔린차는 쉼 없이 달려 어느덧 예루살렘이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도시.
팔켄하인은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명성에 비하면 도시의 외관은 특별나다 할 것이 없었다.
팔켄하인은 생각했다.
외관 따위 아무려면 어떠냐고.
그에게는 이 도시가 예루살렘이며,
이곳에서 벌어질 전쟁에 전 세계가 주목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베르됭의 패배 이후,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팔켄하인은 이제 끝장났다고.
그러나 본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믿고 싶었다.
오스만 제국의 원수로서, 예루살렘의 성스러운 수호자로서, 다시 한 번 비상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기 위해서 다가오는 영중 연합군의 공격을 반드시 분쇄해야만 했다.
***
"들었나, 한신? 그 팔켄하인이 나를 상대하러 왔다. 독일제국 참모총장이었던 거물의 등장이라니. 중동 전쟁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간 거야!"
오스만군의 새로운 원수 팔켄하인.
타운센드는 한껏 흥분하여 안절부절못했다.
팔켄하인을 누르고 화려한 승전보를 올릴 기대감으로.
하지만 나는 심드렁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카이로에서부터 가자지구까지 이어진 병참로는 탄탄하기 그지없었고.
런던의 전쟁국은 중동 전역이 조기에 종료되길 바라듯 병사와 전차, 항공기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전역 원정군은 영국군 제20, 21군단에 참전군 제1군.
여기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랍의 낙타부대까지 합쳐 총 2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병사의 질 또한 우수하여 숫자만 채운 부대가 아니었다.
반면 오스만군과 독일군, 오스트리아군을 합친 병력은 채 15만이 되지 않았다.
팔켄하인이 제 아무리 전략가라 하더라도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승전이 눈앞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였다.
타운센드는 들떠 있었다.
"가자지구는 완전히 대영제국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다음은 어디냐? 드디어 예루살렘이냐?"
"파이살과 로렌스의 낙타부대가 오스만의 후방에 투입되었다. 그들이 성과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
"그래? 기다리지."
분명! 분명!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타운센드의 야망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군과 중국군은 전선을 나누어 예루살렘의 양방향으로 북상했다.
아랍군의 게릴라가 교란에 성공하면 그때를 틈타 협공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주일 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투 보고를 받아야 했다.
「타운센드 사령관이 제21군단을 이끌고 단독으로 예루살렘 공략 시도. 여의치 않자 퇴각하여 베르셰바에 참호선을 깔고 농성 중. 오스만군에게 포위. 긴박한 상황.」
마무리를 이렇게 낸다고?
타운센드의 급발진을 예상했어야 했나.
동기는 짐작이 갔다.
예루살렘이 코앞이니, 나보다 먼저 입성하여 개선장군이 되고 싶었던 거겠지.
단독으로 예루살렘에 공세를 펴다가 패퇴하여, 근방의 작은 도시 베르셰바에 갇힌 꼴이라니.
작년 이맘때 바그다드로 진공했다가 쿠트에 갇힌 상황이 오버랩된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영국 원정군 제21군단의 바르셰바 공방전.
소식이 알려지자 흥분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타운센드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동안, 중국군은 어째서 움직이지 않았던 겁니까?"
"혹시 쿠트 공방전과 같은 전략입니까?"
"한 말씀 해주십시오!"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키며.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여러분. 타운센드 구하기 작전 넘버 투가 개봉되었습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들 겁니다."
***
예루살렘의 수비를 맡은 오스만군 총사령관.
팔켄하인은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괜히 부관에게 성질을 냈다.
"통신 복구는 아직인가? 무슬림 새끼들, 절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통신선이나 하나 더 깔라 그래! 대체 언제까지 깜깜이 전쟁을 수행해야 하느냔 말야!"
처음 예루살렘 후방의 철도 일부가 훼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만 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적들이 출몰하여 철도를 부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어진 거점 습격과 통신선 파괴는 그것이 단순히 도적의 짓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나중에야 아랍군의 공작임을 알아 내었으나, 사막에서 그들이 행적을 쫓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베르셰바는?"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젠장!"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 건진 유일한 승전보가 타운센드의 제21군단을 패퇴시킨 것이었다.
베르셰바에 갇힌 타운센드를 완전히 마무리했으면 싶은데 뒤 이은 보고가 올라오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신의 움직임은?"
"베르셰바로 향하는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진짜는 한신이야. 타운센드 따위가 아니라고. 한신을 조심해야 해. 그놈이 위험해···."
타운센드와 한신은 경로를 나누어 진격해왔고.
팔켄하인은 당연히 독일의 정예병들에게 타운센드를 막도록 지시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생각 외로 영국군은 허약하였고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 비하면 팔레스타인 전선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다른 경로에서 올라오던 중국군의 쾌속 진격을 전해 듣기까지는.
중국군의 속공은 아시아의 군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서부전선에서도 그처럼 신출귀몰한 기동은 본 적이 없었다.
팔켄하인은 인정해야 했다. 한신은 탈 아시아인이었다.
"지금쯤이면 한신이 베르셰바의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하고 있겠군. 참호선을 단단히 지으라 일러두었으니 버틸 수 있겠지. 버텨야만 해. 절대로 뚫려서는 안 돼!"
팔켄하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사령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전령이 나타났다.
베르셰바의 소식을 가져온 자였다.
"보고! 베르셰바 전선은 교착상태입니다. 전황 변화 없습니다."
"뭐? 분명 한신의 군대가 가담했을 터인데?"
신의 장난처럼 뒤이어 또 다른 전령이 나타나 외쳤다.
"급보! 적이 사무엘 무덤이 있는 능선에 출현! 오스만 제7군과 전투에 돌입하였습니다!"
팔켄하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한신이냐?"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적은 중국군입니다."
"베르셰바는 미끼였구나! 젠장, 속았다!"
팔켄하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혼란스런 와중에도 상황을 이해해보려 머리칼을 쥐어 뜯었다.
'타운센드의 억지스러운 예루살렘 공세는 아군을 방심시키고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나 보군. 베르셰바로 사령부의 시선을 돌린 다음, 아랍의 게릴라를 동원하여 통신선을 마비시키고. 한신의 군대는 축지법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동력으로 예루살렘의 북쪽을 공략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똑같았지···. 타운센드가 군대를 유도하고 그사이 다른 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했었지···? 타운센드와 한신이 환상의 콤비라더니, 그 말을 흘려들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하늘이시여! 팔켄하인을 버리시나이까?"
***
1917년 5월 28일.
중국 참전군은 예루살렘 총공세를 감행했다.
참호전의 시대에 전격적인 기동전의 시도는 도박이라 불러도 좋았다.
예루살렘을 크게 우회하여 사무엘의 무덤이라 불리는 고지대부터 공격해 들어가는 전략.
적이 참전군의 기동을 알아차리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느냐가 작전의 성패를 가를 터였다.
지난 몇 년간 무수한 실전을 치러내며, 이미 참전군은 최정예 강군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니.
기습은 성공이었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오스만군은 우왕좌왕했다.
"대장! 위험합니다! 후방으로 좀 이동합시다!"
샤즈광이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예루살렘 전투는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여기가 후방이야."
"뭔 소립니까!"
"그만큼 우리 군의 진격 속도가 빠르다. 조금만 있으면 이 자리가 후방이 될 거다."
그동안의 전쟁에서 나는 언제나 언더독이었다.
부족한 전력을 기발한 전략으로 메꾸기 위해 항상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중화기로 무장한 강력한 화력에 견고한 보급선까지.
베테랑 병사들은 우수한 작전 능력으로 어떠한 임무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기기묘묘한 계략은 정공을 펼 수 없을 때나 써먹는 것.
상황만 갖춰진다면 정면공격보다 강력하고 확실한 전략은 없다.
"정말 안 가실 겁니까?"
"그래."
병사들이 내 곁을 지나치며 돌격했다.
한명 한명이 모두 형이자, 친구이자, 동생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맹렬하게 외쳤다.
"공세를 늦추지 마라! 너희들이 흘리는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중화민국을 위해, 그리고 너희들 자신을 위해 싸워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나? 자유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
나는 병사들을 떠날 수 없었다. 나도 함께 해야만 했다.
파상공세.
쉴 틈을 주지 않는 무자비한 공격.
전쟁은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병사들을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그날 저녁.
무수한 탄피와 시체 더미를 밟고.
참전군은 사무엘의 무덤에 올랐다.
예루살렘의 방벽으로 불리는 고지의 함락이었다.
***
"젠장, 젠장, 제에에에엔장!"
팔켄하인의 거친 욕설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또 패배인가?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도 낙원은 없는 것인가?
베르됭의 실패만큼이나 뼈가 저려왔다. 가슴이 무너졌다.
"놈들은 지옥에서 온 군대가 분명해. 지옥에 있는 아틸라왕이 훈족 병사들을 환생시켜 재앙을 몰고 온 거야! 그 공포! 그 혼란!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단 말이냐?"
"탈출해야 합니다. 이미 전황은 절망적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일 뿐입니다!"
팔켄하인은 대답 없이 두 눈을 꽉 감았다. 부관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령관님!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디 결단을!"
"예루살렘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맞는 말이야···. 이깟 냄새나는 지저분한 도시 따위···."
팔켄하인이 자기 말을 수긍하는 듯하자 부관이 재빨리 덧붙였다.
"적의 기동전에 잠시 흔들렸을 뿐, 오스만군은 건재합니다. 북방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새롭게 짜면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에게 부관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군에 바쳐온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뒤틀린 목소리가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후퇴한다."
아무것도 아닌 예루살렘을 내어준 팔켄하인.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남은 삶에서 예루살렘이 어떤 의미로 규정지어질 것인가에 대해.
모든 것이었고 그 모든 것을 지금 한신이 가져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