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08)

<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2 >

 이글거리는 태양. 끓어오를 듯한 대기. 흩날리는 모래.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엇. 잠깐 졸았을까.

 로렌스는 해를 가리고 선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베두인 식으로 흰색 망토를 둘렀는데 외모는 황인종이었다.

 "가자고. 시간이 됐어."

 "아, 그렇지."

 로렌스는 눈을 비비고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샌님 같은 얼굴인데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감촉은 거칠었다.

 흙바닥에서 구른 이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예루살렘에···, 지금 들어가는 건가?"

 "어."

 "솔직히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안 되는군."

 "곧 알게 되겠지."

 흰색 말을 모는 중국군 최고사령관 한신을 따라 로렌스도 낙타에 올랐다.

 로렌스는 고삐를 쥐고 묵묵히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생소한 아시아의 군대가 중동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로렌스는 대영제국이 아랍 전역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다.

 제대로 된 군대를 투입할 생각 없이 다른 나라에 짬처리나 시키나 싶어서.

 그러나 중국군의 등장은 혜성의 출현에 비길 만했고 휘몰아치던 중동의 모래사막은 일시에 평정이 되었다.

 그 중심에 지금 눈앞에서 평온하게 말을 모는 한신이 있었고.

 그와 함께 한 지난 몇 달간의 여정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했다.

 신분이든 인종이든 상관치 말고 친구처럼 지내자는 말.

 그 말을 덥석 받아들인 로렌스였으나,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와 한신은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한신을 따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누비며 전장의 영광을 함께 하는 동안.

 원대하기만 했던 목표가 점점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오스만의 압제에 수백 년간 탄압받던 아랍.

 사막에도 봄이 찾아 올 것인가?

 한신에 의하여 그 날이 마침내 왔다.

 멀리 예루살렘의 시가지가 보였다.

 통곡의 벽을 지나자 자파 문이 보였다. 

 자파 문은 일찍이 독일제국 카이저의 행차를 위해 닦아놓은 길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가, 곧 세계의 왕이 될 것이라는데.

 카이저는 백마에 올라 독일군대를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나 근래에 독일제국이 세계대전에서 두들겨 맞는 꼴을 보면 그의 야망은 헛물이 되고 마는 것인가.

 하지만 저 녀석이라면 어떤가···?

 우연의 일치처럼 한신 또한 백마를 타고 있다.

 한신은 자파 문 앞에 서서 성채를 올려다 보았다.

 이뤄 놓은 위업이 있어서일까, 그의 몸짓에서 신화 속 용사 같은 거룩한 위엄이 서려 보인다.

 어어?

 모두가 로렌스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들 숨을 죽이고 한신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이미 군인으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 있으나.

 아직 젊다. 어쩌면 어려보이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신비로운 녀석.

 지략가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실수란 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인간처럼 냉철했으며.

 병사들과 격의 없이 생활하며 친분을 나눌 때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세상에 왕이 있다면 바로 저 녀석이 아닐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있다면 바로 저 사람이 아닐까?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며 또각거리는 말발굽을 주목했다.

 한신이 흰 말을 탄 채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세계의 왕이 강림하신다···! 이여야 할 텐데···?

 자파 문 바로 앞.

 한신은 말에서 내려섰다.

 뒤돌아 서더니 전군에 대고 외쳤다.

 "모두 말과 낙타에서 내려라! 우리는 세 개의 위대한 종교에서 섬기는 성지에 도달한 것이니, 마땅한 예의와 법도를 차려라. 시민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존중의 뜻을 보이며 도시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 말한 후.

 한신은 앞장서서 성큼 성큼 자파 문을 통과했다.

 뒤따라 걸으며 로렌스는 생각했다.

 뭘 기대 했던 거야?

 잠깐이나마 설마 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한신은 세계의 왕이 아니야. 저놈은 지배에는 관심이 없다.

 지난 몇 달간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한신은 그저 저 하고 싶은 할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들은 아주 고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저잣거리의 개차반의 짓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갈 뿐인 녀석이었다.

 한신의 그런 점이 썩 마음에 드는 로렌스였다.

 ***

 나는 개선하는 중국군을 훈족에게 빗대며 예루살렘의 멸망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이야기가 만연한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낯선 아시아의 군대가 승리의 깃발을 앞세우고 들이닥쳤을 때 예루살렘의 시민들이 느꼈을 불안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나는 아랍군을 전면에 내세웠다.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병사들을 통해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함이었다.

 그 덕인지 도시는 큰 동요 없이 적당히 떠들썩했다.

 이방인의 군대를 환호하는 이도 있고 침을 뱉는 이도 있었으나.

 개선식은 질서있게 치러졌다.

 신문기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터뜨리며 야단법석이었다.

 다윗의 탑 앞에서 반강제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파 문에서 말을 내려 걸으셨는데, 어떤 의미가 있으신지요?"

 "성지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중국도 크리스트교 국가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대체로 무난한 질의응답이 오가는 와중에.

 당연하지만 헛소리를 해대는 작자도 있었다.

 "타운센드 장군은 어디 있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예루살렘은 함락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는 중입니다."

 타운센드의 거취를 물은 기자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해왔다.

 이끌어내고 싶은 답변이 있는 모양이었다.

 "타운센드 장군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개선식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불참이 개선식의 어떤 부분을 퇴색시킨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십자군의 최종 승리로서의 의미 말입니다."

 "십자군이요?"

 "아시아인이라 모르시는군요. 설명해 드리자면 십자군 전쟁이란 교황청에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벌인 성스러운 원정으로서···."

 십자군 전쟁이 뭔지는 잘 알고 있다.

 기사의 탈을 쓴 깡패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깽판을 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거니까.

 십자군을 들먹이는 기자의 의도야 명확했다.

 유럽과 중동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종교 전쟁이 최종적으로 기독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런데 기독교 국가의 군대인 영국군이 주체가 되어야 할 개선식에 생판 딴 나라 군대인 중국군과 아랍군만 가득하니.

 영국인 기자가 뿔이 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십자군 전쟁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습니다."

 "그건 아시아인인 장군이 예루살렘에 얽힌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설명하면···."

 "아니요. 저도 이 도시의 비통한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이슬람교도 분들. 또, 신문 기사가 나가면 오늘의 의식을 알게 될 전 세계의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루살렘 전투의 결과로 특정 종교가 탄압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독일과 오스만의 패퇴는 억압 대신 자유가, 증오보다는 관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 종교와 관계없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오늘의 개선식은 그들의 삶을 해방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바탕 떠들고 나자 문득 광장이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이렇게까지 설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대는 것도 병이다. 병.

 멋쩍어 기자회견을 종료하려는 찰나.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로렌스였다. 

 뒤이어 바로 옆의 파이살 왕자가 함께 손뼉을 쳤고. 

 장교들, 시민들, 심지어는 기자들까지 힘찬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한껏 고양감이 차올랐다.

 아아, 환호해라. 더 크게 칭찬해줘라.

 하지만 동시에 내 명민한 감각은 손뼉을 치지 않고 선 일단의 무리를 감지했다.

 그들은 무언가 껄끄러운 문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루살렘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예루살렘은 누구 겁니까?

 ***

 눈이 휘둥그레지는 만찬.

 절로 침이 고였다. 이건 절대 그동안 영국식 전투식량만 먹어와서 그런 건 아니다.

 "많이 드시오! 많이 먹을 나이이지!"

 프랑스 외교 특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역시 프랑스 요리가 최고군요."

 "하하, 당연하오. 청어나 씹는 영국 놈들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느라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이것도, 이것도 먹어보시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치킨 마요네즈와 푸아그라 샌드위치를 퍼 담았다.

 한 입 베어 물자 혀에 잠들어있던 미뢰가 깨어나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회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은 예사롭지 않았다.

 예루살렘 임시 군정부의 장교들과 열강의 외교관들이 함께였다.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부른 배를 내려놓고 노곤하게 앉아있는데.

 프랑스 특사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존경하는 한신 장군.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으니, 지금 말하겠소.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을 대표하여 예루살렘 해방에 대해 감사드리오."

 "예, 뭘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바싹 긴장이 되었다.

 맛난 음식을 잔뜩 먹였으니, 그 다음에는 원하는 것을 토해내게끔 시도하겠지.

 과연 이어지는 프랑스 특사의 말이 가관이었다.

 "내일부터는 예루살렘에 민간인 정부를 세우는 데 필요한 조치에 착수할 생각이오."

 "그건···. 프랑스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인지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라오."

 배고플 때는 한없이 자애롭게 보이던 그의 미소가.

 일순 영악스럽게 느껴졌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프랑스에서 갑자기 예루살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오. 모르시는 모양인데. 영국과 프랑스 간에 중동 전역에 대해 합의하는 협정이 있었다오."

 나는 말없이 영국 대사 맥마흔을 바라보았다.

 샐러드를 입안에 쑤셔 넣던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사령관인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니요."

 "아···, 사실···.  관련하여 논의한 적은 있지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영국 대사가 얼버무리자, 프랑스 특사가 기고만장하여 외쳤다.

 "결정된 게 없다니, 무슨 소리요!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랑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영국이 분할통치하기로 이미 조인했잖소! 이제 와서 발뺌이라니!"

 "그렇다기에는···.  중동 전역은 나, 헨리 맥마흔의 소관이오.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조인된 협정을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요."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앞에선 분할통치를 약속하고 뒤에서는 영국 혼자서 중동을 다 집어삼킬 속셈이야!"

 "그런 헛소리를. 나, 맥마흔은 이미 선언하였소. 아랍국가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말이오!"

 앙숙 아니랄까 봐.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는 양 국가의 외교관들을 보니, 이제 확실해졌다.

 아랍 독립을 지지한다는 맥마흔의 선언은 진심이었다.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잡은 셈이었다.

 점점 싸움이 격해지자.

 나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논쟁을 멈추십시오. 소관을 두고 다툴 필요 없습니다. 지금 현재 이곳 예루살렘의 통제 권한은 사령관인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멈칫거렸다.

 프랑스 특사가 말했다.

 "그 말의 뜻은 무엇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예루살렘은 현재 제 소관이라는 겁니다."

 "···중국이 예루살렘에 욕심을 내겠다는 말이오···?"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자기가 예루살렘을 집어삼킬 생각밖에 없으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지.

 바로 부인하려던 나는 문득 생각을 바꿨다.

 협상을 하려면 내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뜸을 들이며 딴청을 피웠다.

 "글쎄요."

 "정말이란 말이오? 주, 중국이 대체 예루살렘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관련이야 여기 있는 누구보다 많습니다. 목숨을 걸고 유대 산맥의 고지를 점령한 것은 저의 부대입니다."

 "그거야 대의를 위해서이지, 대가를 바란 작전이 아니었잖소! 이건 한신 장군이 개선식에서 직접 했던 말이오!"

 "바라지 않았다고 해서, 아예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프랑스 특사가 눈을 빛냈다.

 "알겠소.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인정해주면 의화단 운동 당시 청나라가 프랑스에 졌던 빚을 없던 걸로 해주겠소. 원하는 게 그거요?"

 역시 협상카드를 들고 하니 이야기가 쉽다.

 말 한마디만 내뱉으면 바라마지않던 중국의 이익이 눈앞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양에서는 그런 식으로 나라를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오?"

 "개선식을 감명 깊게 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시민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지금껏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깡마른 중년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씀 참 잘하셨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우리 유대인들의 고향이었으니 유대인들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이 가장 정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바라는 일입니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개선식 당일, 박수를 치지 않던 무리 중에 있던 자였다.

 시온주의자의 등장.

 얼마간 정리되어간다고 생각했던 예루살렘의 향방이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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