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08)

<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3 >

 하임 바이츠만은 여유롭게 연회장을 훑어 보았다.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얘기에 하나같이 얼이 빠진 모습들.

 프랑스 특사는 입을 헤벌리고.

 영국 대사는 눈만 껌벅거린다.

 단 한 명, 중국 사령관만 태평하게 와인을 홀짝이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중국인은 예루살렘의 당사자가 아니고 외부인에 불과하니까.

 "혹시 본인 소개를 해주시겠소? 어떤 분이신지···."

 "영국 해군 연구소에서 소장을 맡고 있는 하임 바이츠만입니다."

 "오! 순도 높은 아세톤을 생산하여 대영제국의 전쟁에 큰 도움을 주고 계신 박사님이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영국 대사 맥마흔이 열정적으로 악수를 청해왔다.

 화학자인 바이츠만은 처칠의 부탁을 받고 폭탄 제조에 쓰이는 아세톤을 개발한 공로가 있었다.

 하지만 맥마흔과 달리 프랑스 특사는 언짢은 듯 말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예루살렘의 권리는 프랑스에 있소. 영국과 체결한 협정에 의하면···!"

 "협정은 유대계도 맺었습니다. 총리와 직접 대화 나누며 말입니다."

 "총리? 무슨 총리를 말하는 거요?"

 "대영제국의 총리가 두 명이겠습니까? 물론 로이드 조지 총리입니다. "

 영국 총리의 약속이란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바이츠만은 분위기를 굳히기로 마음먹었다.

 "이 편지를 보십시오. 영국 외무국이 작성하고 총리가 승인한 공식문서입니다. "

 단 130여개 단어에 불과한 짧은 편지였으나.

 들어갈 내용은 모두 들어있다.

 바이츠만은 의기양양하게 문서를 낭독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적 고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비유대계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수년간의 로비를 통해 얻은 결실.

 이 선언문을 얻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바이츠만은 전 세계의 유대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정재계를 장악한 유대인들은 이미 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대고 있었고.

 영국 정부는 시오니스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타는 미국의 참전이었다.

 1917년 참전한 미국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유럽 전선에 소극적이었다. 영국이 보기에 미국군의 파병 규모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미국 상층부 유대계의 호감을 산다면 미군이 병력을 더 보낼 걸로 생각했다.

 유대 민족국가 건설방안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고향을 잃고 전 세계를 떠도는 유대인들은 악착같이 생존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바이츠만은 그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앞에서는 유대인을 두고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 일컬으며, 우수한 지적 능력을 찬양하던 열강들이.

 뒤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민족이라며 자국 내에서 질시와 증오의 감정을 선동하기 일쑤였다.

 이번에 벌어진 세계 대전을 보면서 바이츠만은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였다.

 돌아갈 나라가 없는 민족은 어딜 가도 박해의 대상일 뿐이었다.

 시온주의를 위해 바이츠만은 총력을 기울여 로비를 벌였다.

 그 결과가 오늘의 선언문이다.

 뿌듯하게 장내를 돌아보자 모두가 아연실색해 있었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툭. 장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누군가 내려놓는 와인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돌아보니 중국군 사령관이었다.

 한신이라고 했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근래에 타운센드 장군에게 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영국 원정군 사령부가 오스만과 항복 협상을 시작한다더군요. 그 과정에서 중동의 평화를 위해 예루살렘을 오스만의 술탄 지배 아래 두는 방안이 상정되었답니다."

 바이츠만으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

 이건 또 뭔 소리래?

 한신이 말을 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탈환한 예루살렘을 오스만의 조기 항복을 대가로 다시 헌납한다니···. 이 이야기가 근래 들은 가장 이상한 이야기였습니다만. 방금 경신이 됐군요. 유대인의 국가적 고향이라···. 고향이 언제부터 발명품으로 취급되었습니까?"

 바이츠만은 그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

 "발명이라니 당치않은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유대인의 고향입니다."

 "2,000년 전에 말입니까?"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우리의 뿌리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그럼 예루살렘에 살던 주민은 어떻게 되는 건지요? 90퍼센트 이상이 아랍인들입니다."

 바이츠만은 꿋꿋하게 말했다.

 "선언문에도 적혀있듯이 비유대계 공동체의 권리는 보장될 겁니다. 종교를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할 계획입니다."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끼워 넣은 문구였다.

 한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 용어가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일진대, 어찌 유대계와 비유대계를 구분한단 말입니까. 세심하지 못한 용어 사용이 오히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할 겁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아랍에 동화되어, 아랍의 의복을 입고 아랍의 음식을 먹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다수입니다. 그들은 유대계입니까, 비유대계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아랍인입니까?"

 조목조목 따져오는 한신의 논리에 바이츠만은 대꾸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몇 가지 반박을 떠올렸으나 모두 충분치 않았다.

 바이츠만이 우물쭈물하자 한신의 시선은 영국 대사에게로 향했다.

 "대사님. 지금 상황이 맞습니까?"

 "어···. 어떤 상황 말이오?"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신사의 나라 대영제국이 예루살렘의 소유권을 두고 프랑스와 아랍, 유대인들과 오스만에 4중 계약을 맺은 것이 사실인지 묻는 겁니다."

 "아, 아직 오스만과의 협상은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

 "제가 실수했군요. 맞습니다. 4중 계약은 아니고 3중 계약입니다. 물론 다음 주에 오스만이 항복 선언을 한다면 팔켄하인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온다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작금 영국의 행태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맥마흔은 깊이 침묵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겠소."

 "알아본다고 뾰족한 방도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계약 건은 모두 진실이니까요."

 연회장은 적막에 잠겼다.

 평소 같으면 영국의 실정을 놀려댔을 프랑스 특사도 뜻밖의 상황에 고뇌에 빠졌다.

 하지만 바이츠만은 오히려 불타올랐다.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한 지 20년.

 더한 수모와 고난도 겪어봤다. 고지가 눈앞인데 단념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저 중국의 젊은 사령관이었다.

 바이츠만은 속에서 은은하게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관절 예루살렘의 사정에 중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힐난하듯 외쳤다.

 "그럼 사령관의 방안은 뭡니까? 예루살렘은 사령관의 소관이라 하셨는데, 이 도시의 운명을 어찌 정하려 그러십니까?"

 당연히 머뭇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한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운명은 시민들이 정합니다. 임시군정부의 사령관으로서 제 역할은 그들이 숙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고요."

 "시민들이 뭘 어떻게 정한다는 건지···?"

 "군정부는 팔레스타인 전역이 안정될 때까지만 유지할 겁니다. 민간정부의 구성원은 예루살렘의 토박이들로 채울 것이며, 이후에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참여하는 의회를 설립해야지요."

 바이츠만의 계획과는 너무도 다르다.

 한신의 말대로 예루살렘에는 아랍인이 절대다수다. 의회를 세웠다가는 유대인이 아닌 아랍인의 나라가 되고 말 거다. 

 바이츠만은 재빨리 외쳤다.

 "그건 예루살렘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종교도시이므로 무엇보다 근간이 되는 종교기관이 중요한데, 유대인과 아랍인이 어찌 같이 참여한단 말입니까."

 "저도 압니다. 의회의 대의원들은 랍비(유대교의 율법 학자)와 무프티(이슬람교의 종교 고문)로 채워질 겁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랍비청과 무프티 종무청이 필요하겠지요. 민간정부는 가장 먼저 종교기관 설립부터 착수할 겁니다."

 바이츠만은 머리가 아득해져 왔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랍비와 무프티가 어찌 같은 의회에서 활동할 수···."

 "왜 안됩니까?"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물어오니 더욱 기가 막혔다.

 "불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는 섞일 수 없습니다."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죠."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연회장에 한신의 방안을 듣고 맞장구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나서서 거부하는 사람도 바이츠만 말고는 없었다.

 만찬은 흐지부지 끝났다.

 각자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바이츠만은 한신을 방임에 가깝게 놓아두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아직 전쟁 중이니.

 모든 것은 전후 회담에서 결정된다. 진짜 싸움은 거기서 벌어질 거다.

 지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중국 군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어도 대세에는 차질이 없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지내는 시일이 길어질수록 바이츠만은 묘한 기류를 감지하였다.

 군정부는 패스트 호텔에 있었는데, 시민들은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사령부를 지칭했다.

 유대인들은 솔로몬으로 부르고.

 아랍인들은 술탄 술레이만으로 부르곤 했지만.

 많은 사람은 또 다른 제3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더 한신(The Han Shin).

 예루살렘과 아무 관련 없는 중국인의 이름을 붙일 만큼, 그가 도시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처음 입성할 때만 해도 총리의 편지를 지니고 자신만만했던 바이츠만.

 그러나 어쩐지 날로 초조해지고 있었다.

 ***

 예루살렘에서의 눈치싸움을 끝내고 다시 전투 준비에 골몰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북방의 철도를 타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차이어는 건조한 사막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쿨럭쿨럭, 한신 장군! 오랜만입니다!"

 기침을 댄 손수건에 피가 묻어있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직접 말하려 했는데, 숨길 수가 없군요. 쿨럭."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나는 잔뜩 침울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죽을 겁니다."

 병약하지만 꼿꼿한 음성이 들렸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의사 말로는 서너 달 정도라더군요."

 실제 역사의 차이어도 그렇게 갔다.

 병명은 결핵. 이 시대의 의학으로는 고칠 방도가 없는 병이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묵묵히 땅바닥만 응시했다.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차이어가 말했다. 

 "한신 장군."

 "예."

 "절 봐 주십시오."

 고개를 들자 차이어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가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슬퍼할 것 없습니다. 저는 이번 생에 이루고 싶은 것을 모두 이뤘습니다. 호국을 위해 떨쳐 일어났고 공화정이 탄생하였으니.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니까요."

 "인간의 감정이라···. 하하···.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역사에 길이 남을 국사무쌍의 장수가 절 위해 슬퍼해 주다니요."

 "장군이야말로 역사에 남을 겁니다."

 방안이 조용해졌다.

 한동안 차이어와 나는 말없이 딴청만 피웠다.

 차이어가 그만 가겠다는 표시로 일어섰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차이어 또한 답례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더 수고해주십시오."

 금방 헤어져 내일 다시 만날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차이어와 마지막이라는 걸.

 승기를 잡은 영중 연합군은 거침없이 북상하였다.

 1917년 8월에는 베이루트 지역을 평정하였고.

 9월에는 다마스커스를 함락시켰다.

 10월에 들어서자 오스만은 아나톨리아에 국한되어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중동 전역은 평화를 되찾았고.

 나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더 진격할 이유가 없었다.

 전투의지를 상실한 오스만은 중동 전역을 다시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것이 아니라면 중동에서의 전쟁은 끝이었다.

 예루살렘에는 군정부를 대신하여 민간정부가 들어섰고.

 나는 중동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남은 과제는 예루살렘의 시민들에게 달려있었다.

 카이로의 병원에서 차이어가 죽었다는 전보가 왔을 때.

 나는 결심이 섰다.

 때가 되었다.

 귀환이다.

 아랍의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파이살.

 그런 왕자를 곁에서 보좌하는 로렌스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장군과 함께 자유를 위해 싸웠던 나날들을 아랍은 기억할 것입니다."

 "부디 합의가 잘 이루어져 아랍에 봄이 찾아오길 기원하겠습니다."

 파이살 왕자가 중국식으로 포권을 해왔다.

 로렌스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곧 찾아갈 테니까."

 왜 온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걸 탐구하기 좋아하는 로렌스이니 아랍을 좋아했던 것처럼 중국에도 관심을 갖게 될지도.

 카이로에서 만난 량치차오는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차이어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부터 거두어 키웠으니.

 그들에게는 부자지간에 가까운 정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내 물음에 량치차오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놀랄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더구려. 윈난성에 있는 아내를 잘 돌봐달라고."

 평생을 군인으로 살며 공화의 이름을 드높였지만.

 마지막에는 아내를 챙기는 모습이 사려 깊은 차이어답다 여겨졌다.

 차이어의 관을 실은 배가 수에즈항을 출항하였다.

 배는 홍해의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항구가 점점 멀어지며 익숙한 모래 냄새 대신 바다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옆에서 샤즈광이 투덜거렸다.

 "어휴, 또 뱃멀미하겠네."

 근 2년 만의 귀환.

 6만에 달하는 참전용사들과 함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