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08)

< 중화민족주의3 >

 여론전이란 무엇이냐.

 프레임 싸움이다.

 프레임이 짜이는 순간 여론은 그 틀에 매몰된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듣는 사람의 머릿속은 도리어 코끼리로 가득차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언급 자체를 막는 것.

 그러나 상대가 멋대로 지껄이는 걸 모두 차단할 수는 없으니.

 차선책은 프레임 속의 이슈를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베이징 타임즈>를 통해 터뜨린 기사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기사가 진실인지 아닌지 따지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는 또 다시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일본의 처사에 분노할 뿐이었다.

 중화민족주의라는 프레임.

 이전까지는 중화민족주의가 언급될 때, 참전3군과 결합하여 외몽골을 군사력으로 복속시키자는 이야기가 튀어나왔지만.

 참전3군 편성에 일본의 사주가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터지자, 중화민족주의는 다르게 기능하여 반일감정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게 만들 수는 없으니.

 뇌리의 코끼리를 상대가 원하는 코끼리가 아닌 다른 코끼리로 대체하는 수법.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치러진 총선은 큰 이변 없이 공화당의 승리로 끝났다.

 기존 제헌의회에서 870석 중 450석가량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이었는데.

 이번에는 600석 가까운 의석을 챙겼으니 이전보다 오히려 더 큰 승리였다.

 나는 쑹자오런에게 축하를 건넸으나.

 그는 근엄한 얼굴로 도리질했다.

 "아직 대선이 남았습니다. 축하는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이미 여론은 완전히 공화당 편인데요. 몇 달 남지도 않은 선거, 각하가 잔뜩 취해서 발가벗고 저잣거리를 질주한대도 어지간하면 당선될 듯."

 "소문이 사실이라면 방심할 수는 없지요."

 "어떤 소문?"

 "쑨원이 출마한답니다."

 그 얘기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중화민국이 개국한 이래, 온갖 사건이 휘몰아쳤으나.

 그때마다 쑨원은 멀찍이서 관망만 했을 뿐, 한 번도 주도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오늘날 그는, 신해혁명 이전에 쌓아 올린 명성을 깎아 먹으며 간신히 정치생명을 연명하는 위인에 불과하였다.

 "별로 어려운 상대 같지는 않습니다만."

 "장군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동맹회에 있던 당시부터 쑨 선생과 잦은 교류를 해 왔습니다. 그의 결단과 추진력은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니, 어떤 변수를 몰고 올지 모릅니다."

 확실히 쑨원이 꿈꾸는 고고한 이상과 그 순수성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 어떻게 져.

 쑹자오런이 날 보며 말했다.

 "물론 확실히 이길 방법은 있습니다."

 "어. 좋네요. 그렇게 하시죠."

 "들어보지도 않고요?"

 "예. 본부장님께서 하시는 선거 전략에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공화당은 그럼 대총통 후보에 리위안훙, 부총통 후보에 한신이 입후보하는 거로."

 우왁, 이건 뭡니까.

 반사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니, 제가 왜 부총통을."

 "확실히 이길 방법을 택한 겁니다. 국사무쌍의 한신을 후보로 내세우면 그 어떤 변수도 잠재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번 총선 승리를 분석하면서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지요. 한신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라는 걸. 대중들은 공화당에 투표한 것이 아닙니다. 한신에 투표한 거예요."

 물론 감투는 좋아해.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것은 야망에 찬 인간의 당연한 욕구.

 하지만 여기서 더 어그로를 끌고 싶지는 않다.

 중국 전역에 퍼진 내 이미지는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청렴결백하며 오직 중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참된 장수.

 실제와 차이가 크긴 한데. 어쨌건 좋은 이미지다.

 하지만 생각해볼 지점이 있었으니.

 지금의 나는 이름 덕에 초한 쟁패기의 한신에 비견되곤 한다.

 하지만 그는 용병술로 불세출의 무쌍을 찍었던데 반해.

 정치력은 턱없이 모자라 전쟁이 끝난 후 유방에 의에 맥없이 숙청당하였다.

 나 또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한신의 신화는 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실제로 그러하든, 그러하지 않든. 이미지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니.

 리위안훙에게는 미안하지만 베이징의 똥통에서 함께 허우적대고 싶지는 않다.

 "저는 안 합니다. 대신 적절한 후보를 추천하지요."

 "누구요?"

 한신의 신화 말고도, 중화민국에는 또 다른 신화가 있잖은가.

 "특사 임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량치차오 선생입니다."

 차이어의 스승 량치차오.

 군신의 유지는 스승이 잇는다.

 ***

 안후이파의 본거지.

 돤치루이는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가만히 책상에 놓인 쪽지를 들여다보는데 위안스카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각하···. 당신도 이리 힘들었나? 젠장, 가끔은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때, 문밖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이 직접 발탁하여 장차 안후이파의 거두로 키우고 있는 장수. 쉬수정이었다.

 "들어와."

 돤치루이는 항상 즈리파가 부러웠다.

 즈리파에는 이상하게 인재가 넘쳐났다.

 펑궈장이 반역죄로 감옥에 갇힌 후에도, 차오쿤이 나타나 즈리파를 수습했고.

 우페이푸, 펑위샹 등의 쟁쟁한 장군들이 건재하고 있다.

 반면 안후이파는 별달리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다.

 쉬수정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쭐 말이 있어 왔습니다."

 "해봐."

 언제 보아도 듬직한 덩치.

 우페이푸보다 키는 작으나 떡대는 더 큰 것 같다.

 쉬수정이 입을 열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갑자기? 이럴 때가 무슨 때인데?"

 "우리는 온갖 음해에 시달리고 있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내젓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참전3군이 결성되어 서북변방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국민들 시선도 달라질 겁니다."

 "외몽골 출병 얘기로군."

 어째서 위안스카이가 언론을 때려 막았는지 알 것 같았다.

 눈엣가시 같은 <베이징 타임즈>가 참전군 편성에 일본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모든 일이 꼬였다.

 "황색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중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국민들이 알아주는 날이 올 겁니다."

 "진실?"

 돤치루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진실이 뭔데?"

 "변방을 안정화하려는 참전3군을 시기하여 특정 신문이 악성 기사를 날조하였다···. 아닙니까?"

 "이걸 봐."

 책상에 놓여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언젠가는 쉬수정에게도 밝혀야 할 일이었다.

 몸집에 비해 작은 눈을 깜박거리며 문서를 읽은 쉬수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게 진실입니까?"

 "그래."

 일본에서 받기로 한 차관의 내역에 대한 기술.

 문서의 정체는 돤치루이-쑨원 동맹에 의거한 비밀협정서였다.

 철도와 케이블, 전신 등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엔이 넘는 금액을 지원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돤치루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쉬수정을 살폈다.

 같은 파벌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민감한 문제.

 쉬수정이 어찌 나오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돤치루이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역시···."

 "뭐라고? 뭐가 역시인가?"

 쉬수정이 이전보다 두 배쯤 커진 눈을 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진실은 바뀌지 않는군요. 이 돈은 입금이 되었습니까?"

 "이제 절반 정도."

 "최고입니다! 이 돈만 있으면 그 자식이 했던 말도 완전 허튼소리가 아니게 됩니다."

 "그 자식이라니?"

 "국민당의 왕징웨이 말입니다. 제게 천하통일을 말했었지요. 크흐흐."

 쉬수정의 반응은 돤치루이로서도 뜻밖이었다.

 분노하기는커녕 기뻐하고 있었다.

 천하통일 운운하며 한술 더 뜨기까지 한다.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불타오르고 있네. 자네는 일본에서 차관을 빌려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가?"

 "저는 외교는 잘 모릅니다만, 실리(實利)가 중요하다는 정도는 압니다. 문서를 보니 각하가 니시하라라는 일본인에게 약속하신 이권은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데 비해, 받을 돈은 명확하게 적혀있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응? 그, 그렇지."

 당장 돈이 급하였을 뿐이지.

 특별히 세세한 부분까지 따진 바는 없었으나, 쉬수정이 말하는 요지 또한 명확했다.

 "22개조 요구에서 처참한 쓴맛을 보고, 일본이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요. 정식 외교라인도 타지 않은 채, 니시하라같은 신분도 불명확한 인물을 내세워 엉망진창 계약을 맺다니. 이것 보십시오. 만주와 몽골의 철도채권을 할인된 가격에 일본이 구입할 권리를 갖는다는 건데. 누가 만몽, 그 거지 같은 땅에 철도를 세우겠습니까? 계획도 없는데 이미 그 채권을 2,000만엔에 팔아넘겼습니다. 장강의 물을 팔아도 이보다 큰 이익을 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어려서부터 장쑤성 전체에서 신동으로 불렸던 이유가 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부분을 직시해내는 쉬수정이었다.

 "가만있자. 일본이 이같은 대규모 차관을 공화정부가 아닌 각하 개인에게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협정에 나 혼자만 관련된 건 아니야. 국민당의 쑨원이 보증을 서주었네."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일본제국은 각하를 차기 중국의 지배자로 점찍은 겁니다!"

 "나를?"

 "그렇지 않습니까. 불명확하긴 해도, 이처럼 막대한 이권들을 단지 육군부장관의 재량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본은 각하가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돤치루이는 가만히 니시하라 차관이 적힌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쉬수정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문서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금 보물단지처럼 보인다.

 왜,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거지?

 아참, 그것 때문이지.

 "자네, 말을 참 잘하는군. 그럼 문서의 마지막 부분은 어찌 해결해야 하겠나? 일본이 다시 2,000만엔 규모의 차관을 약속하며 시베리아 출병을 요구하고 있어. 이전부터 맺어오던 관행이 있으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출병을 거론했다가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거야."

 "하죠."

 "하자고?"

 "사실 제가 오늘 각하를 찾은 것은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우직하게 우리의 길을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온 건데, 덤으로 2,000만엔이라는 거금까지 생긴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지요."

 일거에 딱 정리해주니 마음은 편한데.

 수습은 어찌할지 고민되는 돤치루이.

 "국민 여론은 그렇다 쳐도···,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텐데?"

 "각하. 우리가 일전에 했던 대담을 잊으셨습니까?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이미 결정했던 것 아닙니까?"

 "그랬지."

 "장군부의 견제로 육군부의 예산을 써서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어렵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장군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육군부 산하에 따로 전쟁청을 만들지요. 니시하라 차관을 전쟁청의 예산으로 돌려쓰면 독단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불안 요소가 남아있다.

 "그런데 말이야···. 장군부에는 한신이 있잖아."

 "갑자기 그자는 왜 언급하십니까?"

 "육군부에서 단독으로 군대를 움직이면, 정부에서 가만히 있겠나? 당장에 중지시키려 들거야. 안되면 무력진압을 시도하겠지. 그 경우, 문제가 되는 건 장군부의 한신. 인정하긴 싫어도 놈은 전쟁의 천재야. 괜히 회음후 한신의 부활이라며 떠들어대는 게 아니라니까."

 펑궈장은 수십 년간 동고동락한 동료였다.

 적어도 군사 부문에 있어 펑궈장은, 감히 돤치루이가 따라갈 수 없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정치력이 부족한 탓에 북양의 개라고 놀림당하며 저평가받은 펑궈장이지만.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돤치루이는 펑궈장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그런 펑궈장이 단 한 번의 승리도 맛보지 못하고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낮잡아 본 것도 아니었다. 펑궈장은 한신을 일생일대의 적수로 여기며 자신의 총력을 기울여 상대했다. 

 그럼에도 졌다.

 펑궈장과 한신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을 복기하며.

 돤치루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신과는 전선을 맞대면 안 된다는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똑같은 말을 또 드려야겠군요. 각하와 저는 이미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켜주면 의회의 동의를 받거나, 장군부의 인가를 받을 필요도 없이 북양군을 움직일 수 있게 되니. 전쟁은 오히려 이쪽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한신이야. 자네는 자신 있는가?"

 쉬수정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다니던 때가 기억나는군요. 놈은 애송이입니다. 제 군대를 상대하려면 10년은 더 전훈을 쌓아야 할 겁니다."

 마음이 정리되자.

 북양 호랑이의 야성도 되살아났다.

 돤치루이는 으르렁거렸다.

 "좋아, 일본 공사에 연락해야겠어. 적백내전? 중국도 참전한다. 시베리아 파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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