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08)

< 여단전쟁3 >

 여단전쟁으로 소란스러운 정국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 제2회 대총통 선거 날짜가 확정되었다.

 예정보다 3주가량 늦춰진 일정이었다.

 공화당 대총통 후보 리위안훙.

 부총통 후보 량치차오.

 국민당 대총통 후보 쑨원.

 부총통 후보 왕징웨이.

 유세를 위하여 베이징 일정을 잡은 쑨원은 뜻밖의 행보를 보였다.

 산둥성 지닝시에 전선을 대치 중인 공화군과 안후이군.

 양군의 진지를 차례로 방문하여 화해를 주선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면담내용은 비공개.

 여단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언론은 포화를 두려워 않고 전선 깊숙이 들어간 쑨원의 적극성을 찬양했다.

 ***

 왕징웨이는 공화군 진지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씹창할 새끼."

 평생을 말로 먹고 살아온 왕징웨이였음에도, 한신이라는 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건을 제시하기도 전에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일관하며, 능구렁이처럼 대화를 빠져나갔다.

 "입이 험하구나. 프랑스에서 욕만 배워온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방쯔는 욕을 들어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징웨이가 동의를 구했으나, 쑨원은 대답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맑은 눈빛으로 먼 하늘만 응시할 뿐이었다.

 왕징웨이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런 쑨원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쑨원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고.

 자신의 생각이 곧 쑨원의 생각이라 여겼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저 머릿속에 어떤 구상이 담겨있는 것인지.

 베이징의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한신과 돤치루이를 만나자는 것은 왕징웨이의 아이디어였다.

 상대 후보인 리위안훙이 내전에 휘말려 있는 사이, 국민당은 전쟁을 비판하며 상대적 우위를 가져간다는 전략이었다.

 물론 언론에 뿌린 화평을 주선한다는 말은 보여주기에 불과.

 진짜 의도는 정탐이다.

 중국국민당이 돤치루이의 안후이군을 은밀히 지원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민당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안후이군이 무장을 새로 하고 전쟁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의 차관 덕이었으니.

 국민당의 알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지원을 받고도 옹졸한 전투 양상을 보일 뿐인 안후이군.

 왕징웨이는 전쟁은 잘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놈이 그리 대단한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없이 안후이의 근거지를 내주는 것이 맞는가?

 어쨌거나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놈이 올린 수많은 전공이 증명하고 있으니.

 더구나 한신과 대면했던 때의 쑨원의 태도는 평소와 달리 야릇했다.

 굳은 표정으로 회담 내내 아무런 발언이 없어, 왕징웨이 혼자서 떠들어야 했다.

 그마저도 한신에게 농락당하며 시간만 버린 회담이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반응을 통해 그가 한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언제나 누구에게든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던 쑨원인데.

 한신을 대할 때만큼은 회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자세를 취했다.

 언론에서는 여단전쟁.

 즉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정쟁으로 불리고 있지만.

 왕징웨이는 돤치루이의 패배와 쑨원의 반응을 통해, 적의 진짜 수괴는 공화파의 군권을 거머쥔 한신임을 간파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지닝에 도착했다.

 돤치루이가 직접 역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처음 뵙겠소. 육군부의 돤치루이요."

 "쑨원이오."

 중국국민당과 안후이군벌. 양 파벌의 수장들.

 그간 서신으로만 연락하고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작전사령부의 밀실에서 사담이 오갔다. 

 "···그래서 어떻답디까?"

 "뭐가 말이오?"

 "놈의 진지를 사찰하셨을 거 아니오. 병사의 배치나 무장 상태가 어땠소?"

 돤치루이가 뻔뻔하게 물어왔다.

 쑨원은 근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전쟁의 당사가 아니니 말할 수 없소. 나보고 밀고자가 되라는 거요?"

 "그러지 말고, 좀 털어놔 보시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으나 전황이 좋지 않소. 지푸라기 같은 정보라도 필요하단 말이오."

 "불가하오."

 마치 꼿꼿한 선비 같은 대답이었으나, 왕징웨이는 알고 있었다.

 정보를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한신과 마주한 곳은 창이 없는 방이었고 회담에서도 아무런 영양가 없는 말만 주고받았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돤치루이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니, 도와주려면 좀 확실히 도와주던가!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요! 국민당만 믿고 군사를 일으켰더니, 이제 와 손절하겠다는거요?"

 돤치루이의 말은 교묘하여 마치 국민당이 여단전쟁을 선동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여단전쟁은 돤치루이의 독단에서 시작한 바.

 왕징웨이는 그걸 지적하려 했으나 쑨원은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손절은 당치않소. 아직 소식을 받지 못했소?"

 "무슨 소식?"

 "당신이 요구하던 무기원조를 일본이 승낙하였소. 원조분은 이번 달 내로 들어올 거요. 소총과 중기관총에 유탄포까지 포함된 군수품이니, 전쟁의 구도를 단숨에 바꿀만한 자원이요."

 "드,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차관지원은 많이 받았으나.

 전쟁이 한창인데 돈보다 급한 것이 무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돤치루이가 바라마지않던 무기원조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돤치루이가 부끄러움도 없이 일어나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걸까. 쑨원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왕징웨이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돕는 것은 일본인데 어째서 안후이파가 국민당에 고개를 숙이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쑨원은 또 무슨 생각인지?

 마치 일본제국의 대리인이라도 된 것 같다.

 안후이군의 진지를 빠져나와 베이징으로 향하며.

 왕징웨이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일본과의 관계에 제동을 걸리라 마음먹었다.

 일본에 간섭당한 결과는 옆나라 조선이 잘 보여주고 있으니.

 중국도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둘 수는 없다.

 ***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화군과 안후이군.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양군 도합 10만이 넘는 병력이 산둥성의 접경에 포진해 있다.

 물론 이 순간에도 유럽 전선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십 개 사단, 수백만 명이 뒤엉킨 전투에 비하면 조촐하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근대적인 청조의 지배하에 장창을 든 변발군대가 대륙을 횡행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중국에서도 본격적인 현대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곧 벌어질 전투를 예고하는 것처럼 밖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심한 비바람에 깃발이 쓰러지고, 불어난 물에 총기가 유실되는 사고가 있었다.

 사막의 목마름을 견뎌낸 강군이지만, 폭우 속에서 싸울 수는 없기에 자연히 전투가 미뤄졌다.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오헝티 선배. 비 오는 날 행군 경험 있습니까?"

 "음···. 있기야 하지만, 이 날씨는 단순한 비 오는 날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적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공화군이라면 어떨까요?"

 후난군 제1사단장 자오헝티.

 그 또한 군사를 이끌고 전선에 합류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인재이니만큼 머리가 명민하여 이야기가 잘 통하였다.

 자오헝티는 막사를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꽈르릉!

 때마침 천둥이 쳤다.

 "역시 무리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모르겠습니다. 제가 짧은 시간 지켜본 공화군의 역량은 끝을 알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게 솔직한 답변이겠지요."

 "그럼 공화군을 직접 훈련한 사령관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 폭우에 작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 보십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무리입니다."

 "···그럼 이야기는 왜 꺼내신 건지?"

 "저는 작전을 짤 때 언제나 상대의 시선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이 날씨에 행군이 가능한지 물었을 때, 선배는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혹시?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랬지요."

 "돤치루이 역시 그럴 것입니다. 진짜로 군대가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적에게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만 심어주어도 작전의 효과는 충분합니다."

 왕스전을 평화특사로 임명하는 특수임무를 받고 떠난 샤즈광.

 연대장이 부재한 특공연대에서 특별히 기골이 단단하고 날랜 병사 100명이 추려졌다.

 상당수가 청나라 시절부터 나와 알고 지낸 병사들이기에 투정 섞인 불만을 전해왔다.

 "대장님. 갈수록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언제는 40도가 넘는 사막을 걸어서 통과하라더니. 이제는 저 수몰지역을 헤엄쳐서 가라는 겁니까."

 "미안하게 됐다. 원치 않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빠져도 된다."

 "작전보상은 평소처럼 쳐주십니까?"

 "물론. 이번에는 특별히 성공보상금을 두둑이 주마. 어떠냐, 빠질 테냐?"

 "에이, 왜 그러십니까. 집에 애가 아홉입니다."

 지닝은 동남으로 거대한 남양호수가 자리하고 있기에, 공략하기 쉽지 않은 도시.

 허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격전으로 끌고 간다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그걸 아는 안후이군이 이번에는 지닝 외곽에 넓게 진지를 펴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섣불리 병력을 한 곳에 집중했다가는 일거에 포위되어 쓸려나갈 거라는 얘기였다.

 기동전과 참호전의 교리를 적절히 배합한 전략이 필요했다.

 내가 시도하는 전략은 소수의 병력을 따로 빼서 마치 지닝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처럼 연막을 펼치는 것.

 폭우로 인해 방심하고 있을 돤치루이에게 일격을 먹이는 계획이었다.

 적이 정찰을 꾸준히 해서 별동대를 발견해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일부러 흔적을 남기라 지시해두었으니, 잘만 통한다면 안후이군 스스로 전선의 방어를 풀고 후방으로 병력을 분산배치하게 될 터.

 10월 19일.

 날씨가 풀렸다.

 날짜를 맞춘 것처럼 대선이 끝났다.

 물론 전국 각지에서 표를 수거해 개표하고 합산해 결과가 나오려면 일주일은 걸릴 테지만.

 10월 22일.

 정찰병의 전갈이 왔다.

 지닝 외곽의 안후이군이 이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전이 통했다.

 나는 자오헝티를 포함한 지휘관들을 모았다.

 전군 총공격이었다.

 ***

 지닝 전선은 크게 세 방면으로 갈린다.

 남양호에 가까운 우익.

 지닝의 정면에 마주 본 중앙.

 그리고 자샹현을 둘러싼 좌익이 그것이었다.

 차례로 우익에는 공화군 제2군.

 중앙에는 후난군.

 좌익에는 공화군 제1군이 배치되었다.

 정찰을 통해 파악한 적의 군세는 두 방면.

 남양호 쪽에 있는 것이 쉬수정의 제9사단.

 자샹현 쪽이 돤치루이의 제13사단이었다.

 나는 연신 쌍안경으로 지닝시를 살폈다.

 이쯤이면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펑!

 전선에 자리한 모든 병사들 중 내 반응이 가장 빨랐다.

 "포격이다!"

 내가 위치한 곳은 남양호의 우익.

 이번 작전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덕에 병사들이 재빨리 참호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 또한 안전하게 먼 후방으로 대피했다.

 우익이 중요한 이유는 상대가 쉬수정의 제9사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돤치루이의 형편없는 군사능력에 비하여 쉬수정은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다 바보들 뿐인 중화민국의 장성들 사이에서.

 몇 안 되는, 바보가 아닌 인간이었다.

 쉬수정의 군대에 비하면 돤치루이의 제13사단은 허페이 육군훈련소에서 퇴각한 이후, 이미 군세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병력을 얼마간 보충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만, 그래봤자 급조한 군대.

 퇴각 과정에서 화포와 중기관총 등을 옮기지 못해 무장이 빈약해진데다 별동대의 연막작전으로 방비또한 허술해졌으니.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므로 좌익에서 제1군이 돤치루이를 격파하여 전선의 축을 무너뜨린다면 전투는 손쉬워질 것이다.

 좌익이 뚫리기 시작하면 조급해진 쉬수정은 반드시 공세를 감행해 올 것이니, 우익에서 제2군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 이번 작전의 뼈대였다.

 지축을 뒤흔드는 강력한 포격이 이어졌다.

 나는 응사를 명령했다.

 펑! 펑! 펑!

 콰콰쾅! 콰콰콰콰쾅!

 끝없는 포격전.

 포탄의 파공음과 폭발 소리가 전장을 가득 울렸다.

 어느 쪽이 우위라고 말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

 어느 순간 적의 포격이 그치더니, 세찬 함성과 함께 안후이군이 돌격해왔다.

 ***

 장충(張忠)은 안후이의 평범한 농가 출신 청년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어릴 적만 해도, 군인이 되면 굶어 죽기 딱 좋다.

 군인이 될 바에야 차라리 똥 푸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져 있었는데.

 황룡기가 찢겨나가던 1911년부터였을까.

 여기저기 입소문이 떠돌았다.

 군인이 개꿀이라고. 손발이 멀쩡하고 신체가 건강한데 군인이 되지 않으면 손해라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장충 또한 고민 없이 입대하였다.

 딱히 훈련도 없고.

 새로 받은 소총도 신기하고.

 밥도 굶지 않고.

 정말 편한 직업이 맞다고 생각하던 무렵.

 전쟁이 터졌다.

 난생 처음 듣는 포탄의 폭음에 장충은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엄마! 엄마!"

 한 놈이 질질 짜며 난동을 피우다 부대장에게 대가리를 맞고 기절했다.

 "또 엄마가 보고 싶은 새끼 있나?"

 자신은 저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던 장충은 눈을 훔치곤 깜짝 놀랐다. 눈물이 찔끔 나와 있었다.

 스무 살이 넘은 후부터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데. 이게 뭐지.

 그 모습을 부대장이 보았다.

 "너, 엄마 보고 싶어?"

 "아, 아닙니다!"

 "그럼 준비해! 4분 후 돌격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영원할 것 같던 4분이 지나가고.

 "돌격!!"

 "으아아악!!!"

 함성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장충은 마구 달렸다.

 눈 앞에 펼쳐진 적의 진지가 마치 악마의 목구멍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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