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단전쟁4 >
산둥성 지닝의 우익.
한신의 제2군과 쉬수정의 제9사단이 정면으로 맞붙은 전선.
안후이군 병사, 장충은 달리고 또 달렸다.
일본의 아리사카 38식 소총이 걸리적거려 중간에 한 번 나자빠졌다.
"달려! 멈추지 마라! 민국을 위해 적을 섬멸하라!"
장충이 잠시 엎어져 있는 사이, 뒤에서 물밀듯이 병사들의 행렬이 이어져왔다.
휩쓸리듯 일어난 장충은 다시 돌진했다.
어느새 적의 참호가 코앞이었다.
탕! 타탕! 탕!
적의 사격이 날아왔다.
그러나 일제 돌진의 거센 추진력으로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빗발치는 총알 세례를 뚫고 장충은 적의 참호에 돌입하였다.
장충은 난생 처음 보는 금찍한 광경에 반쯤 혼이 나갔다.
적이 기다랗게 파놓은 참호.
곳곳에서 난투가 벌어지며 비명이 자욱했다.
그나마 고무되는 점은 확실히 아군이 우세라는 것.
어느 쪽을 봐도 안후이군 군복 천지였다.
이긴 건가? 한 것도 없는데?
"우와아아아!"
누군가 함성을 질렀다.
장충도 따라 했다.
"이겼다! 으아아아!"
"아직 아니야!"
뒤에서 날카로운 호령이 들렸다.
분대장이었다.
여기저기 구르고 깨져 만신창이였다.
"이제 겨우 1선을 돌파했을 뿐이다. 명심해라! 서북장군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적 수괴의 심장에 총알을 꽂아 넣을 거라고! 적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가 기회다! 멈추지 말고 몰아치는 거다!"
분대장의 지시에 따라 적의 첫 번째 참호선을 건너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온통 너른 벌판 저 멀리 퇴각하는 적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돌격이다!"
한층 자신감이 붙은 장충은 적을 추격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분간이 안 됐는데, 이제야 조금씩 전장이 눈에 들어온다.
전공을 세울 욕심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적이 도망친다! 가자!"
"죽여라!"
"쏴라!"
적은 별거 아니다.
우리 군의 사령관은 금강으로 불리는 쉬수정 장군이다.
그분의 지휘를 따르면 이길 수 있다.
한참을 달린 장충.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헉헉. 분명 적을 따라 들어선 벌판인데, 달려도 달려도 적의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전날 내린 폭우로 바닥은 진창이다.
자꾸만 다리가 무거워진다.
참호선을 막 돌파했을 때는 가득한 구름의 행렬 같았던 안후이군도 다들 어디로 흩어졌는지 수가 많지 않다.
"어? 저게 뭐지?"
누군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벌판 가운데에 불룩 튀어나온 듯 흙더미가 쌓여있었다.
토굴 같기도 한데 뚫린 구멍으로 기다란 총신이 보였다.
"엇?"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투타타타타타.
무자비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뭐, 뭐야?"
"으아악!"
사방이 뻥 뚫린 개활지.
몸을 숨기려 해도 숨길 곳이 없다.
진흙더미 바닥은 기동을 바싹 제약한다.
잠시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어디를 봐도 학살당하는 아군들 뿐.
분대장의 가슴이 터져나가며 피가 튀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깜깜해진 장충은 소총을 집어 던지고 냅다 진흙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살려주십쇼. 살려주십쇼."
지옥 같은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수없이 빌고 또 빌었다.
***
나는 담담히 말했다.
"승리다."
"와아아아!!!"
지휘관과 병사들이 한데 뒤엉켜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며칠간 이어진 폭풍우를 틈타 공화군의 우수한 기관총 화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획한 매복작전이 들어맞았다.
돤치루이의 좌익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난 쉬수정은 우익 전선에 지나치게 깊이 들어왔고.
개활지에서 기다리던 루이스 기관총의 토치카(특화점, 벙커의 일종) 매복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번 작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후난군이었다.
좌익과 우익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후난군이 위치한 중앙방면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는데.
공화군이 적군을 유인하는 동안, 눈치채지 못하게 토치카를 세우고 매복한 것이 후난군이었다.
"선배, 수고하셨습니다."
"천하의 쉬수정이 이토록 뻔한 매복에 걸려들다니···. 진무와 육사에서 보았을 때는 제법 비범한 녀석이었는데···."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어차피 좌익이 무너지면 공화군은 허페이에서처럼 포격전으로 끌고 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쉬수정으로서는 그전에 승부를 걸어볼 밖에요."
후난군 제1사단장, 자오헝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포로가 어마어마하게 잡혔습니다. 도로가 진흙탕이어서 도망가지 못한 안후이군이 죄다 투항해왔습니다. 이들의 처리는 어찌합니까?"
"중화민국의 규정대로 하면 됩니다."
"음···.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대총통 훈령에 의거하여 포로의 대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지 꽤 되었으나.
지방에서는 법을 지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오헝티처럼 훈령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했다가, 절차에 따라 석방하면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비인도적인 대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음···. 알겠습니다."
중국군끼리의 내전에서 포로를 잡으면 그저 노예처럼 굴리는 것이 다반사.
그러나 공화주의는 구성원의 책임을 강조하는 만큼, 권리 또한 존중한다.
"안후이군 대다수는 단순 징발된 병사들입니다. 돤치루이에 대한 절대적인 충심 따위는 없습니다. "
"그렇게 보이더군요. 상황이 불리해지자 죄다 납작 엎드리며 항복해왔습니다."
"그저 어떤 군벌이든 밥 먹여 주고 등 따습게 재워주면 따를 병사들입니다. 공화주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니, 투항한 순간부터 그들 또한 공화의 일원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후난군이 그랬던 것처럼 공화군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잘 대해주어야지요."
"포로 대우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굳건하던 지닝의 전선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쉬수정의 우익이 궤멸하기 이전부터, 이미 돤치루이의 좌익은 무너져 있었고.
공화군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지닝에 입성했다.
전쟁은 마무리 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세 차례의 커다란 전투에서 공화군은 모두 승리했고.
55,000에 달하던 안후이군은 사단 병력도 채 보존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거듭 퇴각해 갔다.
북양의 호랑이는.
북양의 쥐새끼가 되어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마창(톈진 남쪽의 군사기지)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공화군 제1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쥐새끼라고 해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내고 물 수 있으니.
산둥을 나와 즈리에 들어섰을 때.
여단전쟁이 시작된 때부터, 가장 우려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펑톈군이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을 통과했답니다···."
동북왕 장쭤린이 출병한 것이었다.
***
즈리군 제3사단장 우페이푸는 스스로 참을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문무를 겸비한 지장.
관운장과 같은 무(武)와 충(忠)의 화신이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장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벌써 나이가 사십 줄에 들어선 지 오래인데, 이룬 것이 무엇인가.
전공이라고 나열하는 것들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즈리파의 수장 차오쿤은,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군문에서 고생하던 자신을 발탁하고 키워준 은인.
장수란 모름지기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은인에게 충절을 다하는 법이기에 그동안 따르고는 있었으나.
아무래도 너무하다.
북양군벌을 삼분하는 안후이파, 즈리파, 펑톈파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성한 것이 즈리파다.
그런데 어째 즈리파가 정국의 중심에 서는 일이 없다.
언제나 다른 군벌이 벌여놓은 판에서 따까리 짓을 반복할 뿐이다.
그 중심에는 즈리파 수장들의 헛발질이 있었다.
펑궈장이 그랬고, 지금의 차오쿤이 그렇다.
즈리군의 역량이라면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데.
이번 여단전쟁의 주인공 역시 안후이파와 공화파일 따름.
즈리파는 베이징 앞에 진을 친 채. 공세도 아니고, 포위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설픈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부하들은 물어온다.
"장군, 우리 군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이번 작전의 목적이 뭡니까? 베이징을 점령하는 겁니까? 베이징과 톈진의 수비대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겁니까?"
우페이푸도 해줄 말이 없었다.
자신도 알 수 없었기에.
차오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처럼 꽉 막힌 상황에서, 북양의 원로인 왕스전이 나타났을 때.
우페이푸는 눈이 번쩍 뜨였다.
고리타분한 얘기나 늘어놓는 왕스전의 방문을 반가워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출구를 발견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쯔위(우페이푸의 자). 잘 지냈나?"
"왕 원로. 다시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안녕하지 못하네. 이 몸이 원체 바빠서 말이야."
"그게 무슨?"
"자네만 알고 있게. 내가 바로 대총통께서 직접 임명한 평화특사일세."
평화특사? 그건 또 뭐야?
우페이푸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십니다. 능력을 인정받으셨군요."
"이번 임무는 비밀스럽고 중차대한 것이네. 들어보겠나?"
"기탄없이 듣지요."
왕스전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대총통은 차기 즈리독군으로 자네를 생각하고 있네."
즈리독군?
차오쿤의 자리를 내게 주겠다는 건가?
왕스전이 전선에 나타났다는 것은 제안할 것이 있다는 의미.
어떤 말을 해올지 잔뜩 기대하고 있던 우페이푸는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공화정부는 자신을 그깟 상관자리를 빼앗고 싶어하는 위인으로 보는 건가?
"대뜸 즈리독군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모르나? 지금의 전쟁에 안후이파가 가망이 있다고 보는가? 늦지 않았을 때 공화파에 합류하게."
"제게 즈리독군 자리를 줄 테니 상관을 배신하란 겁니까? 저는 이미 한번 전력이 있습니다. 베이징 공방전 당시 펑궈장 장군을 배신했지요. 중국을 위해서였지만 양심상 그다지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또다시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왕스전이 놀란 듯 볼을 홀쭉하게 오므렸다.
"배신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지금 하시는 말이 그렇잖습니까? 제가 즈리독군이 되면 기존 독군은 처단되겠지요."
"차오쿤? 자네를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그 친구와 합의를 보았네. 차오쿤은 육군부 장관이 될 거야."
우페이푸는 머리가 어질해져 왔다.
뭐야? 어느 틈에?
"이번 전쟁으로 돤치루이는 몰락할 걸세. 북양파의 대권은 즈리파가 잡아야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페이푸는 여전히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 돤치루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즈리파는 동맹군으로서 최선을 다할 거라고 부르짖던 차오쿤인데.
이토록 쉽게 동맹을 바꾼다고?
자신이 아무리 간언해도 듣지 않을 때는 언제고, 고작 육군부 장관 자리에 넙죽 엎드린다고?
이러다 돤치루이가 승전하면 또 편을 바꿀 건가?
우페이푸는 정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이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뒤엎을 힘이 있다면 정치가들 따위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을 터인데.
"어···, 어···, 왜 그러나? 갑자기 근육을 불끈 세우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자네도 동의하는 건가? 즈리파는 여단전쟁에서 빠지는 걸세."
지금은 힘이 약하다.
받아들일 수밖에.
"예."
"좋아. 중화민국에 평화가 깃들겠군, 허허."
껄껄 웃는 왕스전을 보면서도.
우페이푸는 온몸에 들어간 힘을 풀지 않았다.
평화라···.
이깟 정치 논리로 구축된 평화는 가벼운 충격 한 번에 허물어질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려면 절대적으로 강력한 힘의 지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일을 누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저밖에 없지요."
"응? 뭐라 했나?"
"평화···. 말씀하신 대로 중화민국에 평화가 올 겁니다."
"허허허, 그 말이 맞네!"
***
군사기지 마창.
내로라하는 안후이군벌이 죄다 모인 자리.
그들 앞에 놓인 상에는 잘 차려진 음식과 술이 가득하였으나 연회장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여단전쟁 개전이래.
단 한 번의 승리도 없이 악몽 같은 패배가 되풀이되었다.
특히 지닝에서의 싸움은 안후이군의 역량을 총동원한 것이었던 만큼 패배의 충격 또한 컸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여전히 역전 가능한 전세라 생각했다.
흩어진 안후이군을 규합하여 최소한의 병력 규모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맹인 즈리군은 병력 손실 없이 건재하다.
거기에 더해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비책이 남아있다.
그 비책을 결행할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쉬수정. 큰일을 해주었어. 이번 일에는 네 공이 컸다."
쉬수정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가 점점 도를 더해갔으나, 돤치루이는 어물쩍 넘어갔다.
거사를 마칠 때까지는 분란이 없어야 한다.
"장쭤린은 아직이냐?"
"곧 도착할 겁니다."
돤치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쉬수정이 비책을 털어놓았을 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지닝의 패배로 암담해진 마음이 진정되고 다시 전의가 불타오르자.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갔다.
마침내 전갈이 왔다.
"펑톈 독군이 왔습니다."
쉬수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돤치루이에게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제가 세 번째 잔을 따랐을 때가 시작입니다. 장쭤린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는 일은 제가 할 테니,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맞장구나 치고 있으면 됩니다."
장쭤린 암살 계획!
이것이 쉬수정이 내건 국면전환의 비책이었다.
펑톈파는 본래 여단전쟁에서 관망만 할 뿐이었으나.
쉬수정은 일본에서 받은 군수품을 주겠다고 유혹하여 장쭤린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막대한 무기를 원조한다 해도 이미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참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무리.
이에 장쭤린을 처단하고 주인 잃은 펑톈군을 안후이파가 수습하자는 모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의 적임자가 쉬수정이었다.
이미 펑톈에 여러 차례 방문하여 상당한 작업을 쳐두었으니.
펑톈군에 쉬수정을 따르는 이들을 상당수 심어놓은 상태였다.
지휘부를 일시에 제거할 수 있다면 같은 북양파인 펑톈파를 안후이파가 흡수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으하하! 나의 동지들! 여기 장쭤린이가 왔소! 얼른 나와서 반기시오!"
마침내, 펑톈군벌의 우두머리이자.
동북3성의 제왕, 장쭤린이 연회장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