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대3 >
베이징을 떠들썩하게 하던 군벌들은 각기 자기 근거지로 돌아가고.
나 또한 떠날 채비를 차리는데.
손님이 있었다. 량치차오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량치차오는 두툼한 문서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번에 새로 발간한 정치 잡지요. 읽고 평을 해줬으면 하오."
검정과 흰색으로 도안된 간행물.
중앙에 <해방여개조(解放與改造)> 라 적혀 있었다.
"해방과 개조라. 무슨 뜻이 있는지요?"
"그간 여단전쟁이 진행되는 양상과, 뒷수습 과정을 지켜보았소. 당장 중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 또한 마찬가지요. 중국은 이대로는 안 되오. 해방과 개조가 필요하오."
"꼴이 기가 막히기는 하지요."
그동안 어떻게 숨죽이고들 살았는지.
광대한 중국 땅 여기저기서 하루가 다르게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해방여개조>의 첫 기사를 봐주겠소?"
잡지를 열자 빼곡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인상 깊었다.
"대군벌 시대의 도래? 각하가 붙였습니까?"
"내가 붙인 것이 아니오. 나는 지금 시대를 그리 호칭하는 것에 반대했지."
"창간자이실 텐데, 그럼 기사를 왜 내주셨습니까."
"반대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오. 나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소. 우리가 춘추전국 시대와 오호십육국 시대, 오대십국 시대 등과 맞먹는 또 다른 혼란기의 시작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라오."
량치차오가 수심이 깃든 표정으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는 점차 격화되는 군벌들의 쟁투를 다루며, 자칫 유럽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거대한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싸움이야 늘상 있는 일이지만.
확실히 내전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지금껏 중국에서 행세하던 안후이파나 즈리파, 펑톈파 등은 모두 북양파의 그림자에 기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시절부터 건설한 북양군 36개 사단의 힘이, 오랫동안 중국의 군사력을 지배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직한 공화군 6개 사단은 북양군과는 어떠한 연관관계도 없었고.
나 말고도 전국 각지에서 북양군과 연결고리가 없는 군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북양파 군벌들의 출현이었으니, 그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대군벌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단전쟁 이후 벌어진 내전 중 가장 큰 규모는 양광전쟁(兩廣戰爭)이었다.
광시군벌 루룽팅(陸榮廷)과 광둥군벌 천중밍의 전쟁.
루룽팅의 광시파는 한때 병력이 10만에 이른다 할 정도로 남방 최강의 대군벌이었으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한 쪽은 천중밍이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어쩐지 입맛이 썼다.
천중밍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둥군의 평범한 장교였던 천중밍이 광둥군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쑨원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광둥군의 선봉장이 바로 장제스였다.
총선과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그대로 몰락하는 줄 알았던 쑨원인데.
이건 뭐 오뚜기도 아니고, 양광전쟁의 승리로 다시 한번 일어섰다.
이번에는 남방에 어느 정도 굳건하게 자리 잡은 모양이니 심히 성가시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막 졸업하고 홍콩에 돌아왔을 때.
중국동맹회원들과 벌인 술자리에서 천중밍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쑨원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소. 그는 신(新)시대의 지도자감이 아니오."
당시 천중밍은 혁명파 지도자의 교체를 제안했었다.
신해혁명이 시작되면서 천중밍의 제안은 흐지부지됐지만.
그의 본심이 어떠할지는 지켜보아야 했다.
한편 내전이 가장 혼조 양상을 보이는 지역은 쓰촨성이었다.
후베이가 발전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 쓰촨이었다.
그 점이 도리어 한 명의 대군벌이 쓰촨성을 통일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었다.
쓰촨 독군이 있기는 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
현 단위 수백개로 갈라진 쓰촨성은 땅덩어리 전체가 전쟁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쓰촨군 제2사단장 류샹(劉湘)이나 윈난 독군 탕지야오(唐繼堯)등이 세력이 강했지만, 쓰촨의 일부를 장악하는 데 그쳤고.
티베트군까지 합세하여 쓰촨성 서남지역을 점령하고 날뛰니, 인외마경(人外魔境)이 따로 없었다.
신장성은 위구르인과 한족 이민자 간의 계투로 시끄럽고.
칭하이성과 몽골 등지도 바람잘 날이 없었다.
유일하게 조용한 지역은 산시성이었는데.
신해혁명 때 권력을 잡은 옌시산의 통치 아래 꾸준히 근대화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호국전쟁이나 여단전쟁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옌시산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외교를 하며 중립을 지켜냈으니.
동북왕 장쭤린과 마찬가지로 산시성에 봉건 왕국을 건설 중인 옌시산이었다.
<해방여개조>의 기사를 모두 읽은 나는 량치차오에게 말했다.
"내전이 걱정되시면, 중앙군을 파병하여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물론 량치차오가 듣지 않을 걸 알고 하는 말이었다.
북벌이든, 남벌이든, 서벌이든.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지금, 섣불리 공화군을 움직였다가는 즈리파와 펑톈파의 협공을 받게 될 거다.
"중앙군 파병이라니! 그건 또 다른 내전이잖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다면 역사는 다르게 기록할 테니까요. 정벌이라든가, 장정(長征)이라든가."
"휴···. 역사의 속성이야 원래 그런 것이지만, 아무리 휘황찬란한 글귀로 속이려 해도 전쟁의 본질은 바뀌지 않소. 내전은 같은 국민들끼리 적이 되어 피를 봐야 하는 악독한 싸움이니, 이번 돤치루이와 같은 건이 아니면 어지간하면 피해야 하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펑톈의 장쭝창 같은 놈이 아니면, 누가 싸움을 좋아서 하겠는가.
하지만 때리는 게 싫다고, 맞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다.
"공화정부의 말만 잘 들으면 싸울 일은 없지요."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량치차오가 눈을 빛냈다.
"역시 천재, 한신! 단번에 핵심을 꿰뚫는구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오. 핵심은 중앙정부에 충성하느냐! 이민자들로 구성된 저 미합중국이 오늘날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패권국으로 우뚝 선 모습을 보시오.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존중하되 미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오. 중국과 여러모로 흡사하지 않소?"
"저번에 말씀하신 연성자치론입니까?"
량치차오가 미소 지었다.
"그렇소. 다음 <해방여개조>의 두 번째 창간 특집기사에서 바로 연성자치론을 다룰 거요. 내전을 종식하고 혼란한 군벌 시대를 끝내기 위한 방안이오. 지방의 자치권을 인정해 준다면 싸울 이유가 뭐겠소?"
확실히, 연방제는 하나의 중국을 깨뜨리기 위해 내가 구상한 방안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의 군벌들은 좋아라 하겠군요."
곧바로 광둥 군벌 천중밍의 얼굴이 떠올랐다.
광둥성과 같은 남쪽 지역은 수천 년간 중국사의 중심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중원(中原)은 언제나 황하 유역을 의미했고.
중국의 역사는 언제나 화북의 역사였다.
남방은 북방과 다른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니 자치권 획득에 열을 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군벌이라 함은, 결국 사병을 다루는 독재자나 다름없다.
법률과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군벌들 개인에게 자치권을 할양한다면.
각 성에 그들의 독재 소국가를 용인하는 꼴이 될지 모른다.
"그럴 것 같소? 지방의 독군들이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소."
"남방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즈리파와 펑톈파가 따지고 들걸요."
"그들이 왜?"
"천하가 손에 아른아른 잡힐랑말랑 하니까요. 누구든 손에 들어온 권력은 내주고 싶어 하지 않는 법입니다."
량치차오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런 자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잡지를 창간하는 거요. 전 국민의 여론이 강하게 원한다면, 제 아무리 권력자의 위세가 강하다 한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겠으나.
특히 사상과 관련된 일은 일시에 진전하는 법이 없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던 것도 수십 년에 걸친 인터내셔널의 공작이 배경이 된 덕이다.
량치차오의 연성자치론에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잡지를 창간하여 중국의 미래에 관하여 이런저런 논쟁과 떡밥을 생산해 내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
"잘 되었으면 좋겠군요. <해방여개조>는 정부의 기관지입니까?"
"아니오. 완전히 민간으로 하고 있소. 실은 내가 창간자라는 것은 비밀이오. 부총통 자리는 권력이 있지만 또한 제약도 많기에."
"그러지요. 부수를 늘리고 싶으면 말씀하십시오. 안 쓰는 인쇄기가 많습니다."
"인쇄기가 왜 많소?"
"어···. <베이징 타임즈>가 제 꺼 거든요. 최근 사업을 크게 확장한 덕에 인쇄기를 많이 들여왔습니다. 해외판을 좀 펴내려고요."
내 경제 상황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던 량치차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화민국 일등신문 <베이징 타임즈> 말이오? 그게 독군의 소유라고?"
"예. 참고로 제거라는 건 비밀입니다. 각하도 <해방여개조>의 소유를 비밀로 하셨으니, 제 비밀도 지켜주십시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그 커다란 신문사를···. 혹시 뇌물로 받았소?"
"아니요."
나는 잡지를 접어 넣었다.
량치차오도 떠날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국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파리에서 열릴 강화 회의에 참석하는 량치차오였다.
"부려 먹을 직원들이 있으니 좋기는 하더군. 나는 별로 바쁘지 않소. 한층 강해진 중화민국의 국력이 서양의 열강들에게 얼마만큼이나 통할지 기대되는 구려."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해외에 나가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인종 문제는 쉬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량치차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거란 건 아오. 나는 다만 처음 우리가 참전을 결의했던 그때의 목표만을 생각하고 있소."
"신축조약 폐지와 조계지 철폐였지요."
"드디어 지긋지긋한 의화단 운동의 잔재와 결별할 수 있게 되겠구려. 그때 열강들과 맺은 조약으로 인해 아직까지 중국은 배상금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으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오."
환생 전 역사에서도 중국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중동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없었고, 노동자 십수만 명을 서부전선에 투입시킨 것이 전부였으며.
중국에서의 이권을 노리는 일본의 뒷공작으로, 대표단은 철저하게 무시당한 채 빈손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믿고 있습니다. 량치차오 선생님.
"그런데···, 괜찮겠소?"
문득 량치차오가 물었다.
"뭘 말입니까?"
"예루살렘."
량치차오의 말과 함께 하얀 성벽의 도시가 뇌리를 스쳐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임기가 끝나면 여전히 예루살렘의 사령관은 한신 독군이오. 어떤 식으로든 이번 회담의 예루살렘 건에 대한 주요 당사자나 다름없소."
예루살렘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고민해온 바였다.
중동 문제는 이번에 해소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내가 맡은 책무가 컸다.
"파리에 가면 터번을 쓰고 다니는 영국인이 있을 겁니다.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라는 자입니다."
"누군지 알고 있소."
"그자에게 이 서간을 건네주십시오."
"알겠소. 그런데···, 중간에 읽어봐도 되오?"
"물론입니다. 이 서간은 제가 생각하는 예루살렘의 미래이니. 간단한 계획안입니다."
"집에 가서 읽겠소."
량치차오가 떠난 후.
나는 새삼 차오르는 열의를 느꼈다.
여단전쟁을 통하여 베이징은 새롭게 재편되었다.
대총통 리위안훙을 필두로 하는 공화파는, 중화민국 권력의 최중심을 거머쥐는데 성공하였고.
이 권력으로 무얼 할지는 아직 정해진 바 없이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았을 때 공화파가 홀로 우뚝 선 것은 아니었다.
즈리파와 펑톈파가 옆에서 공화파와 함께 솥발처럼 중국을 지탱하고 섰으니.
천하삼분이라 해도 좋았다.
물론 각 파벌의 군사력 팽창과 함께 솥은 점점 무거워지고.
어느 한쪽 다리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다면.
솥이 넘어지며 안에 있는 내용물이 쏟아지는 대참사가 벌어지게 되겠지만.
< 새로운 시대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