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출신 중국 대군벌-98화 (98/108)

< 융중대책 >

1919년 2월 15일.

내 인생이 막을 내린 날이다.

이제 마작과 술판으로 점철된 내 삶은 사라지고.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다짐···,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여자에게 다짐한다···.

후베이성 한양의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식장.

모습을 드러낸 시시우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 늙어 죽기 전까지 저 여자가 한 번이라도 긴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예복을 곱게 차려입은 시시우가 사뿐사뿐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재작년 홍콩의 카지노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

한양은행을 개편하고자 하는 내 계획에 딱 들어맞는 전문금융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녀를 스카우트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 스카우트 당한 것은 내가 아니었을는지.

뭐, 데이트도 하고, 전시에 애틋한 편지도 쓰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다.

"오늘, 이 두 사람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이 자리에 섰으며···."

무려 대총통의 주례사와 함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리위안훙의 축사를 귓전으로 들으며 식장의 풍경을 훑었다.

아니, 이게 무슨 국가의 중차대한 일이라고 내각의 각료들이 죄다 참석하셨는지.

어쩐지 다들 이죽거리는 표정이다.

축사가 끝나고, 몇몇 절차를 거친 뒤.

연회가 시작되었다.

시시우가 내 옆에 팔짱을 끼고 찰싹 붙었다.

평소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야, 왜 이래?"

"뭐가?"

"뭐 하는 거냐고."

"싫어?"

"그건 아니고."

"그럼 닥치고 있어."

하객이 어찌나 많은지, 오전에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들이 줄지어 왔다.

시시우는 한결같이 화사한 웃음으로 하객들을 대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다 저명한 인사들인데, 주눅 드는 법이 없이 응대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냉랭해지는 때가 있었으니.

"시우야."

그녀의 아버지이자, 내 장인어른 되시는 분이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못 들었을 리 없건만, 시시우는 다른 곳만 쳐다보았다.

"뭐해, 장인어른이 부르시잖아."

"누구? 나 아빠 없잖아."

"화해한 거 아냐?"

"치."

시시우는 팔짱도 풀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장인과 나만 멋쩍은 웃음을 나누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약이니, 시우가 장인어른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내 위로에도 불구하고 쑹자수는 그저 굳은 얼굴이었다.

시시우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쑹가문의 자매들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연유가 있었다.

감리교도이자 집안의 충실한 가장인 쑹자수.

부인과는 잉꼬부부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으니.

그걸 실수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결과물로 혼외아인 시시우가 태어났다.

시시우와 쑹 가문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녀가 장성할 때까지 쑹자수는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뒤에서 키다리 아저씨처럼 행세하며 그녀를 후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연히 쑹자수의 아내와 딸들에게도 시시우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확실히 능력자는 능력자인 것일까.

시시우는 고아원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후원자가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계좌를 추적하여 후원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리고 시시우는 감사장과 조촐한 선물을 가지고 상하이에 있는 쑹자수의 저택에 방문하였다.

그다음에는 뭐.

파국이었다.

얼추 정리가 되어 쑹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유학도 가게 되고, 최소한의 혈연관계는 인정받게 된 시시우였지만.

쑹 집안에 그녀의 위치는 없었다.

그녀는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가문의 수치였다.

"그래요. 아버지. 너무 고민 마세요."

"지금은 시우가 토라져 있지만 여자들끼리 잘 얘기해볼게요. 메이링, 시우가 너랑은 좀 얘기하지? 같이 가자."

"음···. 그렇긴 한데 시우 언니가 언니들이랑 얘기를 나눌지는 잘 모르겠어."

차례로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세 자매.

원래는 시시우를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대뜸 나와 결혼한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시무룩한 쑹자수를 뒤로하고.

맏언니 쑹아이링이 쾌활하게 말했다.

"장군님, 아까 보니까 예복이 정말 잘 받던데요. 시우에게 질투가 날 정도예요. 장군님은 만인의 연인이셨으니, 오늘 우는 아가씨들이 많을 거 같아요. 신랑이 아깝다는 얘기도 들리더라고요."

"그래도 제 아내가 더 아깝죠."

쑹아이링이 눈이 동그래졌다.

"왜요? 장군님은 이미 젊은 나이에 출세하여 정권의 실력자신데. 어떻게 시우가 아까울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쑹 가문이야말로 학식과 기품이라는 면에서 상하이 최고니까요. 그런 가문의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하였으니 영광일 뿐입니다."

"어···. 그렇지요. 시우는 우리 가문의 아이지요···."

쑹아이링이 떠듬거리는 새에.

이번에는 둘째 쑹칭링이 말했다.

"저희 남편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주시래요."

그녀의 남편은 쑨원.

"일이 바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언제 한번 자리를 잡아서 친교를 다지는 건 어떨까요?"

"쑨원 선생님과 말입니까?"

"예."

"안될 건 없지요."

쑹칭링이 이를 드러내는 웃음을 지었다.

질세라, 쑹아이링도 끼어들었다.

"저희 남편도 장군님과 만나고 싶어 해요. 오늘은 못 왔지만 조만간 저희 남편과 함께 정국을 의논해보았으면 해요. 게다가 남편의 상관 또한 장군님께 관심이 많아요."

쑹아이링의 남편, 쿵샹시는 사업가인데.

"상관이 누굽니까?"

"남편은 산시성에서 일하거든요. 상관은 한 명 밖에 없어요. 산시 독군이지요."

"옌시산 독군이군요."

이러니 저러니해도 쑹 가문이 대단하긴 하다.

괜히 훗날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한 4대 가족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이제 딸 둘과 얘기했는데 벌써 나오는 이름들이 쟁쟁하다.

게다가 남은 딸이 있다는 것이 더 무섭지.

쑹 자매의 막내, 쑹메이링은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나중에 장제스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그녀는 내게 별로 관심이 없는지 그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만 제 아내를 찾으러 가봐야겠습니다."

멍한 표정의 쑹자수와 작별하고, 연회장을 나오는데.

나는 또다시 붙들렸다.

"각하가 곧 출발하신답니다. 지금 만나 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딥니까?"

"옆방입니다."

직원의 인도에 따라 리위안훙이 기다리는 방안에 들어섰다.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장소.

구석진 자리에 리위안훙이 앉아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실실거렸다.

"흐흐, 한신. 네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뭐가요."

"나만큼 널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도 없지. 네 재주는 하늘도 거꾸러뜨릴 만 하다고 보았는데. 그런 너도 별수 없구나. 크흐흐흐흐."

"그러니까, 뭐가요?"

리위안훙은 딴소리를 했다.

"좋으냐?"

이런 질문에 대답은 정해져 있다.

"···예."

"네가 얼마나 어린지 새삼 깨닫는다. 너도 결혼이란걸 하는구나. 가끔은 지나치게 완벽하여 인간이 아닌 느낌이 들 때도 있었는데. 잘 선택했다. 괜찮은 아가씨 같아."

"바로 베이징으로 올라가실 겁니까?"

"그래. 신정부 출범 준비위원회도 제 본분을 다 했고.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리위안훙이 문득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오랫동안 함께해 와서인지, 나는 그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하세요."

"말해?"

"예."

"언제 할 꺼냐?"

모든 것을 함축한 '언제'의 의미는.

천하통일밖에 없다.

우창에서 처음 들고 일어섰을 때부터, 줄기차게 물어오는 리위안훙이었다.

"이번엔 정말 기회가 왔다. 이전 1기 때처럼 작은 충격에도 흔들리는 모래성 정부가 아니야. 즈리파와 펑톈파의 위세가 강력하다고는 하나, 놈들의 영향력은 자기들의 세력권에 한정되어 있을 뿐. 적어도 베이징만큼은 우리 공화파가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요."

"떠나기 전에 잠깐 만나자고 네가 말했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더구나. 혹시 드디어 실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리위안훙.

다른 건 몰라도. 보신주의자답게 눈치 하나는 비상하다.

하지만 보신주의라는 것도 옛말.

공화정을 위해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중화민국의 대총통 자리에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이게 꼭 갖다 대려고 한 건 아닌데요."

"뭔 말이야?"

"들어올 때, 이곳 식장의 이름을 보셨습니까?"

리위안훙이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뭐였더라?"

으음. 어쩐지 대총통 모드가 너무 오래 발동된다 했어.

"융중(隆中)입니다."

"맞다 맞어. 융중 예식장이었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제갈량이 삼고초려로 찾아온 유비에게 천하 삼분지계를 제시한 곳의 지명이 바로 후베이성의 융중이었지요. 예식장을 세운 사람이 융중 출신이랍니다."

"그래서, 그게 뭐? 너도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융중에서 천하 통일전략을 제시하겠다는 거냐?"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위안훙이 껄껄 웃었다.

"으허허! 나는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세상에 자기를 감히 제갈공명에 비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그러나 한신. 너라면 자격이 있다."

"아니, 제가 꼭 공명이라는 건 아니고, 우연찮게 예식장 이름이 융중이니까 이곳에서 식을 올리고 싶잖습니까."

"그럼 말해봐라. 네 전략도 천하 삼분이냐? 공화파와 즈리파, 펑톈파로 천하를 갈라먹고 힘을 키우자는 거냐?"

"그건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현상이니까요. 제 목표는 중화민국 전체에 후베이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방위적인 일대 개혁을 이루는 것입니다. 목표 분야는 산업과 교육, 외교와 군사로 나뉩니다. 여기 간단한 계통도가 있습니다."

나는 한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받아든 리위안훙이 중얼거렸다.

"이건···, 일종의 청사진이로군. 중화민국 청사진이야."

"맞습니다. 한 요소를 중점으로 두어 실현시키고 나면, 그에 따른 파생 효과로 새로운 중점을 목표로 둘 수 있게 되지요."

"과연···. 예컨대 농촌진흥운동을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니···. 하지만 무엇하나 쉬운 게 없겠는데. 한신, 이게 되겠나?"

"대총통이시잖습니까. 안되면 되게 만들어주세요."

리위안훙은 가만히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나 또한 그를 따라 계통도를 다시 한번 살폈다.

개혁은 크게 4개의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산업, 교육, 외교, 군사.

산업은 도시와 농촌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도시 계획은 우한과 같은 공업지대를 더 건설한다는 것이다.

금속 산업만이 아닌 화학 연구지대의 개발 또한 목표로 한다.

거기에 부패는 확실히 근절하여 아편 밀매를 때려잡는다.

특히 중국 금융시장의 공룡이 되어가고 있는 한양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승격시키는 방안은 꽤나 파격적인 것.

위안스카이가 제작한 중화민국 법정 화폐가 있기는 하지만, 유명무실하여 여전히 금과 은이 혼용되며 외국 달러가 판을 친다.

그러니 물가 또한 요동치기 일쑤였다.

한양은행의 막대한 자금이라면 물가안정과 화폐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의 토지개혁은 토지세부터 손본다.

이전에 후베이성의 향신들과도 다툼이 있었던 것처럼, 함부로 토지 소유주를 바꾸려 들다가는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힐 수 있으니.

법률에 따라 합법적으로 지주들에게 세금을 걷고, 소작농들이 적절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토지개혁의 방향이다.

한편 교육 부문은 다시 고등교육과 초등교육으로 나뉜다.

베이징 대학은 전국의 인재가 모여들어 지식의 요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원을 통해 각종 전문화 과정을 신설하는 계획이다.

초등교육은 역시 문맹 퇴치가 최우선이다.

그동안 꾸준히 소학교를 늘려왔으나, 추산되는 문맹화율은 여전히 80퍼센트가 넘으니.

공화정이 자리 잡으려면 단순히 나라에 종속된 국민이 아닌, 주도적으로 주권을 실천하는 시민 양성이 필수다.

외교 부문은 결국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손절할 것이냐의 고민이다.

당연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가끔, 아니 제법 자주 재수 없기는 하지만, 20세기는 앵글로색슨족이 짱짱맨.

북쪽에 있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동쪽에 있는 일본 제국.

모두 손절치고 반공주의와 반군국주의의 국시 아래 외교를 펼쳐나간다.

사방이 적이지만.

그 말은 곧, 동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첨병이 될 수 있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의미도 되므로.

오히려 좋다. 영국과 미국은 중국을 지원할 것이다.

군사 부문은 육해공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육군 계획의 핵심은 기갑화다.

중국산 전차 개발에 성공하면 기계화부대를 편성한다.

또한 중동 전쟁을 준비할 때, 큰 도움이 되었던 차이어의 유산.

워게임 툴을 가지고 전문적인 참모진을 양성한다.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던 해군부는 일단은 외국에서 전함을 주문해오는 것으로 시작하여, 목표는 역시 건함으로 간다.

일본을 해양력의 위협으로 둔다면 아무래도 정면승부는 어려우니 잠수함 개발로 방향을 트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군부는 전 세계적으로도 이제 막 시작되는 분야.

외국인 기술자를 섭외하여 자체 전투기 생산을 목표로 한다.

난위안항공학교와 같은 교육시설을 확충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리위안훙이 마른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이걸 다 이루면 천하통일쯤은 문제가 아닐 거야."

"칭찬이지요?"

"통일 따위가 아니라, 중화민국이 세계 제일의 패권국이 되겠는데."

"목표가 높으면 좋잖습니까. 어차피 계통도 대로 따라가는 거니까 초반부의 중점들만 실현할 수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진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로군."

리위안훙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게 빠져있어, 그래서 어떻게 이룰 거지? 저 군벌 놈들을 어떻게 굴복시킬 거냐고."

"이 청사진 대로면, 중화민국은 부강해질 겁니다."

"그래서?"

"놈들도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복속해오겠지요."

"그러기에는 대부분 놈들이 생각이 없는 편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나는 마침내 리위안훙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5년을 잡지요. 이번 공화정부의 성과를 바탕으로, 5년 후 통일전쟁에 나설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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