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출신 중국 대군벌-103화 (103/108)

< 천안문의 기적 >

양호 독군 한신이 하급사서에 불과한 마오쩌둥을 데리고 나간 후.

도서관은 침묵에 잠겼다.

한참 만에 후스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 녀석은 굽실거리는 행동거지 뒤에 무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 꺼림칙하던데. 한신이 그놈을 대접해주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 녀석이란 물론 마오쩌둥이다.

루쉰은 듣는지 마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청년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망이 원대한 녀석은 싫어합니다. 세상의 변혁을 강하게 외치는 놈일수록 세상을 더욱 어지럽게 만드는 법이니 말입니다."

듣고 있던 루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알 것 같네."

"예? 뭘요?"

"독군이 그 마오쩌둥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나간 이유 말일세."

"이유가 뭡니까?"

루쉰이 후스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자네 입으로 이미 말했네."

"제가요? 뭐라고 말했지요?"

"마오라는 청년이 지나치게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 했지."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독군도 마찬가지네."

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비루먹은 마오를 한신에 비교하는 건 아니지.

"중국을 쪼개고 자신의 사상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마오쩌둥의 허황된 꿈이야 알겠는데, 한신의 원대한 목표? 그자가 진정 황제라도 되고 싶어 한단 겁니까? 농담이 아니었어요?"

"황제가 아닐세."

"그럼요?"

"공화."

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쉰의 대답은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아아, 또 그놈의 '주의'의 등장이군요. 오늘날 범람하는 여러 사상의 무가치함은 아까 다 얘기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사상의 중요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네. 독군은 공화에 진심이야, 그것만은 틀림없어."

"좀 전엔 그리 살벌하게 말씀하시더니···. 한신을 긍정하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를 좋아하네. 게다가···."

언제나 미리 생각하고 말하는 루쉰.

그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은 흔하지 않다.

"게다가 뭡니까?"

"내가 영웅을 칭하는 자를 싫어한다는 건 자네도 알지?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그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뽐낸 적이 없네. 오직 남들의 평가만으로 국사무쌍이라 불리는 거야."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후스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세간에서 한신이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왔던 후스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한신이 스스로를 치켜세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대총통에게 술 시중을 시켰다든가 하는 얘기들은 야사(野史)에 불과하다.

워낙 주목받는 인간이니 오만할 거라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자인 것은 인정하지요. 본인을 힐난하는 언사에도 반박 없이 수긍하는 점이 인상 깊더군요. 권력자들은 으레 우리 같은 인간을 우습게 보잖습니까. 자기가 일선에서 뛰는 동안 대학물 먹은 놈들은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낸다고요. 하지만 그자는···. 그저 수긍했지요.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어려운 법일진대. 남다르긴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칭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지. 진정한 영웅을 배척하는 건 아니네.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해야 맞을 터. 그 두 사람은 가능성이 있네."

"으엑, 한신이 영웅이라고요? 아니, 한신은 그렇다 쳐도 마오쩌둥도요?"

루쉰은 담담하게 말했다.

"청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독군이나, 그 마오라는 사서나, 범인은 가슴속에 품고 있기에도 버거운 광대무변한 꿈을 꾸고 있네."

"꿈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꿈인 겁니다. 그놈들은 해내지 못할 겁니다. 중국의 병폐는 이미 수천 년간 쌓여 개인의 힘으로는 씻겨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를 탈출하는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중국 또한 비슷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후스는 딱 잘라 말했으나.

루쉰은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네. 기대를 걸어봄직 해."

"설마,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하실 생각은 아니지요? 권력자에 빌붙어 떡고물을 챙기는 놈이라 저를 비난하신 건 선생님입니다."

루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바뀔 수 있다면?"

"예?"

"지난한 교육과 사회개혁을 통해, 중국인들 특유의 게으르고 비열한 노예근성을 개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안 된다니까요."

"장강의 물줄기처럼 온 중국에 단단히 뿌리내린 기득권층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대의를 반영하는 시민의 지도부로 자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온 중국이 자신을 찬양하며 우러르는 가운데, 절대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을 때. 오히려 젊은 날 꿈꾸었던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라면?"

후스는 입을 다물었다.

마오쩌둥 같은 머저리가 그런 지위에 오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지만.

설사 놈이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걸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놈은 권력을 사랑해. 매일 박을 수도 있을걸.

후스는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하지만 한신이라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신은 후스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 독특한 인간이었다.

후스는 지금껏 살아오며 나름대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내렸다.

권력을 추구하며, 과시하길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편은 배척하여 공격한다.

인간은 구제불능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야망에 찬 사기꾼들의 거짓말이다!

라는 것이 후스의 인생철학이었는데.

한신은 소탈하고, 지혜로우며, 인간적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신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천부적인 연기력을 지닌 재능꾼인지.

그게 아니면···.

"어떤가, 후스. 말해보게,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후스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겨우 침을 삼키곤 못 담을 말을 입에 머금었다는 듯이 황급히 내뱉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 진짜 영웅의 출현을 목도하겠지요."

***

나는 최소한의 경호 인력만 배치하고, 마오쩌둥과 천안문까지 걷기로 했다.

그런데 이 친구.

지나치게 굽실댄다. 부담되게시리.

"사령관님, 아직 말씀 안 드렸지요. 실은 제가 사령관님을 뵌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그저 먼 발치에서 일방적으로 사령관님을 뵈었을 뿐입니다. 실은 저는 후난성 창사 출신입니다. 작년에 창사에 입성하는 사령관님의 군대를 목격했습니다."

여단전쟁 때 돤치루이를 토벌하러 가기 전.

나는 후방의 안정을 위해 후난성을 먼저 쳤던 적이 있다.

그 일환으로 후난성의 성도인 창사에 입성했던 것인데, 마오쩌둥이 그때 나를 본 모양이다.

"당시 저와 제 친구들은 이층집 지붕 위에 올라서 사령관님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지요. 우리끼리 떠들었습니다. 저기 절대정신이 말을 타고 간다고요!"

"그건 헤겔이 나폴레옹을 두고 한 말 아닙니까?"

"어엇, 헤겔을 읽으셨습니까? 역시 문무에 모두 출중하시다더니, 대단하십니다!"

나를 나폴레옹에 비견하지 마.

그놈은 최후가 안 좋았다고···.

"어쨌건, 제 사상에 동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 제겐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오해가 있군요. 저는 특별히 마오군의 사상에 동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후스 선생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지요. 사상은 그저 사상일 뿐. 그 안에 내재한 진리라든가 하는 것은 별로 믿지 않습니다."

마오쩌둥이 문득 길거리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하, 하지만 사령관님은 분명 공화주의를 강조하셨잖습니까!"

"공화는 수단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의 정치 체제라는 생각에 기치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시민들 개개인이 정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안 걸을 겁니까?"

마지못해 날 따라오며 마오쩌둥이 말했다.

"공화주의를 계승한 것이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신 사령관님과 같이 절대정신을 지니신 분이 국가를 통치하면, 곧 그 절대정신이 국가의 정신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곧 공화이자, 사회주의 혁명입니다."

"아니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공화주의의 주체는 모든 시민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노동자들만 인정받으니, 그것이 제가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이유입니다. 편을 가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본가들은 중국의 암 덩어리일 뿐입니다. 마땅히 도려내야 할 텐데요."

"그들도 시민입니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실망한 기색이 절로 느껴졌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마오쩌둥은 또다시 떠들어댔다.

저돌성과 끈기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슬슬 피곤하다.

아무래도 내가 다루기에는 골치가 아프니.

이 미친 인간을 상대할 만한 또 다른 미친 인간이 국회에 거주하고 있지.

"실은, 같이 걷자고 한 것은 마오 군을 가늠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생디칼리슴의 멋짐에 대하여 지껄이던 마오쩌둥이 재빨리 물어왔다.

"가늠하다니요?"

"공화정부 2기가 출범한 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재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게도 주변에 전도유망한 청년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오고 있지요."

"그, 그 말씀은?"

"제 정치적 동지이자, 사석에서는 각별한 사이이기도 한 쑹자오런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

마오쩌둥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지요! 국무총리를 역임하시고, 지금은 공화당의 당수로 계시잖습니까."

"그 친구가 마오 군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공화당 의원실에서 비서로 일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오쩌둥이 연신 포권을 해왔다.

"생각은 하고 말합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런 기회를  기다려 왔습니다. 저는 목표를 정하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돌진하는 성격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마오쩌둥 못지않은 정치병 환자에 공화주의에 미친 놈인 쑹자오런이라면.

이 녀석을 억제할 수 있겠지.

어느새, 천안문 앞에 도착하였다.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이 바글바글 하였다.

구호는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으나, 관통하는 테마는 있었다.

중화민족주의였다.

우수한 역사를 지닌 중국 민족이 다시 세계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어?"

천안문 광장에 내가 들어서자,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전해져 왔다.

"한신이다!"

"무쌍장군이다!"

"와아아! 한신! 한신!"

인기는 좋네.

정부에 불만이 있어 시위하러 나온 학생들이었으나.

그래도 나는 좋아하나 보다.

나는 자연스레 광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파도치던 인파가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한신 장군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돤치루이에게 사형을 내려주십시오!"

"니시하라 조약 철폐! 외국인 추방!"

나는 갖가지 요구를 쏟아내는 군중의 한복판에 섰다.

마오쩌둥은 내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이 모인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정부에 바라는 게 많을 겁니다."

학생들이 그렇다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 역시 중국의 한 시민으로서 돌아가는 현실을 믿을 수 없어, 광장에 나왔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심정입니다."

처음에는 일단 공감을 해준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사실만 주지시켜도 일이 편해진다.

과연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정부를 규탄하던 광장은 마치 내 팬클럽장처럼 변모하고 있었다.

"중대 발표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 외무를 위해 유럽에 갑니다. 목적지는 파리, 외교특사 자격입니다. 하지만 저는 군인에 불과하여 정치적 식견이 모자라니, 가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오늘 여기 모여있다 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나는 차분하게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겠노라 설명했다.

경호원들을 시켜 군중을 통제하고, 지원자를 받아 의견을 말할 시간을 주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뻔한 얘기.

돤치루이와 쉬수정을 잡아 족치고, 니시하라 차관은 그냥 좆까고.

조계는 죄다 없애며, 안하무인인 서양인들을 추방하라는 얘기.

나는 참을성 있게 경청했다.

결국은 보여주기지만, 이 보여주기가 얼마나 커다란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치는 결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정책을 펴는 만큼,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소식을 듣고 몰려든 언론사 기자들이 이미 천안문 앞에 북적대고 있었다.

"의견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웠지만 공청회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질서있게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몇 달 동안이나 전국을 불태웠을 5.4 운동을 소박한 공청회로 틀어막았다.

마오쩌둥은 헤어지기 전 중얼거렸다.

"저는 또 다시 느꼈습니다. 창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천안문에서 사령관님은 절대정신이셨습니다···. 광장에 자리한 모든 군중이 사령관님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한걸음 성장하였습니다···."

이 녀석은 찬양도 찝찝하게 한다.

그 절대정신이라는 게 결국 마오주의가 이상향으로 꿈꾸던 길이잖아.

온 중국이 한 사람의 사상만을 진리로 추앙하며 받들어 모시는 주체사상이잖아.

하지만, 다음날 베이징의 16개 신문이 일제히 쏟아낸 기사들은 마음에 들었다.

- 천안문의 기적. 한신, 분노한 학생들을 설득하다. 이것이 공화주의인가.

-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될 외교특사단, 한신을 중심으로 27명 규모. 천안문 시위에서 문제해결 약속.

- 시위 현장이 공청회로 변한 사연. 니시하라 차관 관련자 처벌과 외국과의 조약 철폐 의견 나눠.

천안문에서의 한바탕 소동으로 파리에 파견되는 평화특사단은 국민적 기대를 받게 되었다.

바라던 바였다.

예정대로 다음 주가 다가왔을 때.

나는 상하이로 이동해 배를 탔다.

파리는 처음인데.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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