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아킬레스건, 조선 >
"야호!"
"떨어진다, 조심해."
"그럼 잡아주던가."
"보는 눈이 많잖아."
"뭐 어때? 부부인데. 내가 부끄러워?"
응, 조금.
입항하는 뱃머리에 서서 시시우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바닷물이 이슬처럼 날아와, 그녀의 감청색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내린다. 준비해. 이제부터는 언론도 많아질 테니, 조금 근엄하게 굴자."
"응, 그래야지. 사막의 전쟁을 신승으로 이끈 신비로운 중국의 장수, 한신의 영부인 되시는 몸이니까."
"그게 아니라, 중국 특사단의 경제 부문 책임자로서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얘기야."
"난 한신의 영부인이 더 좋아."
시시우가 생긋 웃었다.
때마침 하늘이 노을빛으로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르세유항의 첨탑에 그녀의 어깨가 걸렸다.
"서시는 멀미 그쳤으려나. 깨우고 올게."
시시우는 말괄량이처럼 갑판을 달려 지하로 내려갔다.
이번 특사단은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내 재량에 의해 나름의 정예들로 꾸려졌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시시우와 한서시를 포함한, 신양(信洋)그룹의 경영진들을 경제 자문 명목으로 특사단 명단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개발새발마냥 어지럽게 얽혀있던 한양 은행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업무는 얼추 마무리되었다.
시시우가 중심이 된 경영진에 의해 지분투자를 바탕으로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지주회사가 설립되었다.
신양그룹의 탄생이었다.
이번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평화특사단의 목적은 니시하라 차관 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중영방적협상에 따라 전국에 산재한 조계 철폐를 요구하기 위함.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한 달이 넘게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소란.
베트남이나 조선 같은 각 민족의 독립 청원.
다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한 가지 이슈 아래 평등하다.
두 번째 생이 주어진 이후, 언제나 나의 목적은 하나였다.
이 세계를, 내가 살았던 세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그거면 족했다.
처칠이 회고했듯, 2차 세계대전은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그 거대한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예방하기 쉬운 전쟁이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명령하기 전까지.
수십, 수백 번의 골든타임이 있었고.
안일함일까, 두려움일까, 역사는 그 모든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냈다.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전간기에 해당하는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치료받기에 적합한 상태다.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표어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대전쟁의 화마가 유럽을 박살낸 지금이 바로, 새로운 전쟁의 싹을 잘라내는 최적의 시간인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얼마간의 영향력으로 전쟁을 막아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유럽의 재건, 경제적인 회복이다.
신양그룹은 중국의 공업시장을 잠식하고 독점하여, 이제는 조금씩 해외시장을 넘보고 있었다.
시시우를 특사단에 포함시킨 이유였다.
1919년 6월 15일.
사실상 2차 대전을 조장한 거나 다름없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되기까지는 이주일 가량밖에 남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는 일부러 뒤늦게 합류하는 계획을 짰다.
베르사유 조약은 마지막까지 난항을 거듭했다.
이탈리아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원하는 만큼 차지하지 못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남은 사람은 빅3.
독일을 회생 불가의 나락으로 처박고 싶은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끝까지 도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길 원하는 미국의 윌슨과.
그 양쪽에서 눈치를 보며 영국의 이익을 고민하는 로이드조지까지.
세계 최강국 세 지도자의 회담은 막바지 5일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5일을 내 것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모든 제안을 검토하고,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감안해 보아도, 앞이 안 보여 어두컴컴할 때.
촛불을 들고 길을 인도하고 싶었다.
일종의 출구전략을 제시하는 거다.
"와씨, 드디어 도착이네."
여동생 한서시가 투덜거리며 갑판에 나타났다.
그녀 역시 신양그룹의 경영진으로 이번 특사단에 참가한 터.
마르세유항에 배가 입항했다.
저 소란스러운 난리통을 환영식이라고 칭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항구는 프랑스인들로 북적였다.
날 보러 온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어째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삐이익!"
내가 항구에 발을 디디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뭔 의미여?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안 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 다음에 중국식 장포를 걸친 독일인들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자, 휘파람 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삐이이이이익!!!"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꺼지라는 거였다.
나는 의기소침해진 독일군 병사를 다독였다.
상하이에서 마르세유까지 오는 도중에 제법 친해진 터였다.
"마음 쓰지 마. 너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제 조국은 죄를 저질렀지요···. 그건 사라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어설픈 중국어로 중얼거리는 독일 병사에게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드려줄 뿐이었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외교단만이 아니었다.
특사단을 제외하고도 150명 규모의 독일군 포로와 함께였다.
그들은 대전쟁 개전 직후 벌어진 칭다오 공략전에서 중국에 항복한 병사들.
그동안 쭉 억류되어 왔다가, 시범적으로 1차 인원이 이번에 고향으로 송환되는 것이었다.
전쟁의 공포에서 막 해방된 프랑스인들이 독일인들에 대해 지닌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빈약한 내 프랑스어 실력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욕지거리가 시내를 지나는 내내 들려왔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욕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다. 내뱉는 억양과 표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어가 그리 빠르고 어조가 높은지 처음 알았다.
사사건건 날아오는 주먹감자는 덤이었다.
철도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좀 상황이 나아지려나 했으나.
뭐, 똑같았다. 주먹감자 파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달려드는 언론의 수가 몇 배는 불어났다는 점.
베이징에서든, 예루살렘에서든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웬걸. 차원이 달랐다.
"이번 파리 방문 목적이 억류한 독일군들을 집단으로 단두대에 올리기 위함이라던데, 맞습니까?"
"영국의 타운센드 장군과 약속을 잡았는데, 장소를 착각하여 런던이 아닌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예루살렘에 동양식 황제를 옹립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확인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많으면 뭐 하나.
죄다 헛소리들뿐인데.
환영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언론들은 무지와 증오를 넘나드는 질문들을 던져왔다.
오리엔탈리즘까지 갈 것도 없었다.
그냥 대놓고 악의적이었다.
나는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협상국의 사령관이었으나.
그들이 보기에는 미개하고 더러운 한 명의 중국인일 뿐이었다.
겨우 들어온 파리의 호텔 방에서 시시우는.
"달팽이나 처먹는 새끼들이 무슨 남의 나라 식문화에 지랄이야, 지랄은. 강아지가 귀엽긴 하지만, 까짓거 먹을 수도 있지. 우씨."
라며 점점 늘어나는 욕 실력을 뽐냈으나.
나는 중국도 달팽이를 먹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언론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놈들은 하이에나다.
중국 외교단을 물어뜯는 것은 먹잇감을 찾는 일련의 행위일 뿐.
다른 먹잇감이 나타나면, 그깟 찌라시들은 금방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번 파리 강화회의는 소문난 잔치이니, 고기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
첫 출근날.
나는 시시우를 비롯한 경제 부문의 인사들을 내버려 두고 소수의 인원만을 대동한 채 호텔을 나섰다.
2차 대전을 막는다 어쩐다 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철 지난 일본의 음모를 분쇄하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의 이권을 지켜내어 정의를 바로 세워야지.
나를 일본 킬러라 불러 다오.
파리의 외무부 건물은 비무장 인간 바리케이드로 꽁꽁 봉쇄되어 있었다.
기자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거지만.
온갖 나라에서 날아온, 온갖 단체의 회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외교 대사를 찾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놈만, 아니 한 국가만 걸려라인데.
결국, 이러저러하니 자기네 민족을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그 과정은 마치 사이비 종교 전도과정과 흡사했다.
예컨대, 저기 보이는 것처럼.
"눈이 맑으십니다. 말씀 한마디 들어주시겠습니까?"
"바빠서요."
"긴 이야기 아닙니다. 민족의 독립 열망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커서, 이미 이와 같은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한 이력이 있고···."
"아아, 바쁘다니까."
"그럼 서명이라도···."
그리스 외교 대사는 손을 내저으며 휑하고 사라졌다.
서명을 부탁하던 남자는 서글픈 눈으로 대사가 사라진 방향을 쫓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실시간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와다다다.
남자가 내게 달려왔다.
"호, 혹시 평화회담에 새로 오셨다는 중국의 한신 장군님입니까?"
나는 입을 한 번 풀고 말했다.
한국어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맞습니다."
"헉! 우리나라 말을 하시는군요! 조선 출신이시라는 소문이 정말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인천 분입니다. 선원이셨고, 이민을 가신 거지요."
"이런 머나먼 타지에서, 동포를 만나다니···. 그것도 중국이란 커다란 나라에서 장군을 하고 계시는 대단하신 분을···."
멋대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남자의 이름은 김규식.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대표다.
연이은 실정으로 국체는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나.
조선은 그리 쉽게 거꾸러지는 나라가 아니었으니.
일본이 아무리 총칼로 짓밟더라도 김규식과 같은 독립열사가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쭉 지켜보니, 알리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지난 3월 1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당연하지만 다 아는 얘기.
하지만 성의있게 경청하며, 동시에 전략을 수립했다.
내게는 파리 강화회의가 거대한 던전처럼 느껴졌다.
온갖 함정과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마귀 소굴.
그러나 그 위험도만큼 곳곳에는 아이템과 보상들이 숨겨져 있으니.
파리 강화회의장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외교단은 내게 커다란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쓰러뜨려야 할 던전의 1차 보스는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에 가해지는 부당한 식민 지배는, 일본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각 나라의 대표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명을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서명입니다."
한참 만에 김규식이 이야기를 마쳤다.
나는 서명판을 내려다보았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명단.
외교 대사의 이름은 없고, 무슨 기자나, 하급 장교, 기업인 등의 이름만 가득하다.
예를 들면, 로렌스 따위의 서명 말이다. 이 친구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이런 서명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 어떤···?"
"강화회의에 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안건으로 올리는 겁니다."
김규식이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이 바로 독립 안건 청원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도 만남을 가졌었지요."
"어떻게 됐습니까?"
"만남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노라 말했었지요. 하지만···. 이후, 저희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윌슨이 배신한 겁니까?"
"···그렇게 믿고 싶진 않습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물론 다시 만남을 요청하여도 회신은 없었고, 저희는 회담장 입장을 거부당하였습니다.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대표단만이 들어갈 수 있다더군요."
윌슨의 고결함이야 누가 모르겠냐만.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도와드리지요."
김규식은 언뜻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국의 독립 청원.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만, 청원을 위해 몇 가지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돕지요, 뭐든 돕지요!"
김규식은 또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였다.
***
빅3가 빠진 외무부의 회의장은 김빠지는 모양새였다.
가장 주목받는 독일의 평화협상을 빅3가 처리하니, 이곳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의 영토 한 뼘을 가지고 수십 분을 질질 끌고 있었다.
량치차오와 왕징웨이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대놓고 하품을 했다.
일본 대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체 눈이 작아, 깨어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은은하게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가 그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자, 기상 시간.
땅땅.
나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고 손을 들었다.
의장이 발언권을 주었다.
"그···, 시베리아 전선의 일본군을 지원하는 방안 있잖습니까. 회의록을 보니 저번에 대충 넘어간 듯 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싶은데요."
딱!
일본 대사가 책상을 짚으며 깼다.
자는 것 같아도, 필요할 때는 깨어나는 것을 보면 역시 외무성의 인재긴 하다.
"구체적인 방안? 이미 다 논의하였소만. 더 뭐가 필요하다고?"
"만주의 철도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곳곳이 끊어져 수송이 어렵습니다. 극한의 환경을 견뎌내야 하는 시베리아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 보다 체계적인 수송 계획이 필요합니다."
내가 마치 일본군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처럼 말하자 일본 대사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한신 장군이 뛰어난 전략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그러면 어디 한번 계획을 말해보시오."
"그런데 일본군의 보급로가 원체 길어서 전방위적인 계획을 짤 수가 없더군요. 따라서 함께 상의할 만한 적당한 분을 초빙했습니다."
"누구를?"
"들어 오십시오."
한껏 상기된 표정의 김규식이 회의장에 발을 디뎠다.
그를 알아본 일본 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저자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소!"
"일본군의 모든 보급은 조선의 철도를 통해 이루어진다지요? 여기 오신 분은 조선인이니 일본의 상황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일단 회의장에 김규식을 데려오는 1차 목표는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