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아킬레스건, 조선2 >
드디어 파리 평화회담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 대표단.
명목상으로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전선을 지원하기 위함이지만.
얘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거다.
나는 김규식을 쫒아내라는 일본 대사의 요구를 간단히 무시했다.
"대사께서는 제 계획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까? 참을성을 좀 가져보십시오."
김규식이 두꺼운 서류철을 들고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다.
"조선은 어떤 나라입니까?"
"예. 4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명국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기 전까지는 자유 독립국이었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에 공사를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어왔으며···."
본격적으로 김규식이 호소하기 시작했다.
일본 대사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저자는 안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소! 당장 이 자리에서 쫓아내야 하오!"
하지만 프랑스인 의장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지금의 사태가 회담장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말싸움의 연장선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터.
의장이 일본의 항의에 마지못해 김규식을 추궁하는데 그 말이 가관이었다.
"조선이란 게 일본의 한 지방입니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보다 더 역사가 오래된 나라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대한민국이며···."
"다른 나라라면서 당신은 일본인과 똑같이 생겼군요. 아니면 동양인들은 원래 다 그렇게 눈이 찢어진 거요? 저기 앉아있는 중국인들도 그렇고."
"저희가 보기에는 서양인들이 똑같이 생겼습니다만."
"설마, 농담이겠지? 저 섬 해적 놈들과 프랑스인은 인종적으로 전혀 다르오."
이번에는 듣고 있던 영국 대사가 울컥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이게 정녕 세계평화를 위해 각국의 외교대표단이 모인 회담장의 풍경이란 말이냐.
하지만 혼란은 좋다.
서양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의해 일본의 요구는 묻혔다.
아시아인종 간의 구차한 말싸움으로 격하된 것이다.
겨우 장내가 정리되고 내게 발언권이 돌아왔다.
나는 본격적으로 대담을 진행해갔다.
"그럼 일본군의 보급을 조선에서 담당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왜 그렇죠? 조선의 철도를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은 철저히 차별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국 노동자들은 철도 건설을 위해 임금도 지불받지 못한 채 노역을 했지만, 정작 철도를 이용하는 것은 일본인입니다. 기관사나 철도 관리자 등은 무조건 일본인을 채용하게 되어있으니, 한국은 그저 영토를 강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짐짓 놀란 척,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물었다.
김규식은 수천 번은 준비해왔을 답변을 척척 내밀었다.
"한국 국민들은 일본인들과 다른 계층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이제는 언어까지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실체입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오직 일본식 체제만을 강요하고 천황을 숭배토록 요구하고···."
김규식은 처음에는 얼떨떨한 것 같더니, 이내 나와 제법 호흡을 맞춰 조선의 현 상황에 대하여 소상히 밝혔다.
한참 동안 대담이 이어진 끝에.
의장이 말했다.
"쩝쩝, 다 하셨소?"
"원래는 일본의 지원 방안을 고려하는 안건이었는데, 이거 예상치 못한 사정을 듣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일본군의 진격이 조선을 착취하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시베리아 전선을 지원하는 방안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듯싶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대사는 포기했는지 심통이 난 얼굴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벌써 포기하면 어떡해.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았습니다. 일본이 본국과 맺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일명 니시하라 차관 문제인데요. 그 적법성은 차치하고라도 결국은 시베리아 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조약이니, 그 조약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뻔뻔하게 이미 확약된 결과를 뒤집겠다는 거요?"
일본 대사가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빌드업은 이미 끝났다.
"이권을 함부로 넘긴 한국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바로 조금 전 적나라하게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모자라 중국까지 넘보려 만주의 철도를 넘기라 요구하는 당신네 국가가 오히려 뻔뻔한 거지요."
"차, 차관을 그렇게 끌어다 써 놓고 입을 싹 씻을 셈이요!"
"누가 입을 씻는다 했습니까. 조약의 당사자인 돤치루이는 만주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빚을 토해내게 만드시지요. 중국은 상관치 않겠습니다. 알아서 잘 해 보시지요."
"그런 무책임한 말을···!"
일본 대사가 눈을 희번득이며 회담장을 둘러보았다.
"이보게들. 말해보시오. 이미 저번 회담에서 만주의 철도 건은 승인이 완료된 사안이잖소. 어째서 다들 침묵하는 거요!"
어째서긴.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국가로 낙인찍히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지.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파리 강화회의의 최대현안은 세계 평화였다.
물론 직접 겪은 회담의 실상은 딴판이긴 하지만.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그러했다.
패전국의 식민지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빠르게 해체되어 독립을 하였으며.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이제 식민지라는 용어 대신 위임통치와 같은 눈속임으로 호칭되었다.
식민지배나 위임통치나 그게 그거지만.
국제관계와 외교는 명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겉으로는 세계평화를 위하는 척 굴며, 자국의 식민 통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화제에 오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승전국들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한국 대표단은 바리케이드를 뚫고 본회의장에 출석하여 일본의 잔악한 통치행위를 낱낱이 까발렸다.
나는 회의장 구석의 서기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 회의록에 다 적었습니까?"
서기가 OK 사인을 보내왔다.
일본 대사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빠가야로! 용납할 수 없소!"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본국에 연락을 취하여 향후 외교 방향을 묻는 정도겠지.
강대국들이 그간 일본의 전횡을 눈감아주고 있었던 이유는.
아시아까지 신경쓰기 골치 아프니, 일본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평화로우리라 여겼던 것.
하지만 말썽이 일어났고, 소란스러워진 만큼 일본의 의도는 더 이상 관철되기 어려울 것이다.
회담이 끝나고.
일본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편을 구했으나.
어떤 국가도 입장을 표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한 문제에 얽혀 들어가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며칠 후.
드디어 그날이 왔으니.
파리 본회의장에 니시하라 차관 조약의 유효성과 한국의 독립 문제가 정식으로 안건에 올랐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결사적으로 반대할 줄 알았던 일본 대사는 어쩐지 초연한 모습이었다.
저번 회담에 이어 또 한 번 일본 식민지배의 비참한 실상이 폭로되었다.
외교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맺어진 니시하라 조약의 부당함은 덤이었다.
"얼추 회의가 된 것 같으니 표결에 들어가겠소."
두근두근두근두근.
니시하라 차관 무효 문제는.
출석자 15표 중 11표의 찬성.
그리고.
한국의 독립 문제는.
15표 중 8표의 찬성으로, 두 안건 모두 과반수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지켜보던 량치차오가 환호성을 질렀으나.
나는 일본 대사 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 번째 안건은 가결되었소. 하지만 두 번째 안건은 과반수를 넘겼으나, 가결은 실패하였소."
의장이 선포하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에게 그가 무덤덤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의장 대리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서 특별 지시가 내려왔소. 중요 의제에 있어서는 과반이 아닌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한국의 독립 문제는 중요 의제로 판단되오. 그러니 부결이오."
안건은 허무하게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어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강화회의에서 망신을 당하였지만, 일본은 여전히 승전국이고.
이번 회담에서 5대 열강으로 꼽히는 국가였다.
한국의 독립이 통과되면 승전국의 다른 식민지 문제가 줄줄이 불거질 테고.
열강으로서는 그냥 두고볼 수 없었겠지.
일본이 안건 상정을 막는 데 그리 열을 올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는데, 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회담장 바깥에서 결과를 전해 들은 김규식은 의외로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공손히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그저 암담했지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과가 없어 며칠 내로 상하이 임시정부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그때, 장군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번 일은 절반의 성공. 전혀 보이지 않던 희망의 끈을 붙잡은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안건의 부결은 뼈아프지만.
한국은 첫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정식안건으로 다루어져, 전 세계에 일본의 만행이 까발려졌으니.
앞으로의 독립운동에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상하이에는 저도 자주 들르는 편이니, 기회가 되면 또 만나 뵙지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김규식과 헤어진 후.
내 다음 시선은 엘리제궁을 향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이자, 빅3의 회동이 매일같이 열리는 곳.
말하자면, 언젠가는 곪아터질 증오의 씨앗을 열심히 심고 키우는 그곳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단호히 말했다.
"그만두겠습니다."
대영제국의 현 총리, 로이드조지가 특유의 눈썹 장난을 치며 말했다.
"장난이지? 진짜?"
"진짜 그만둘 겁니다."
"헤이, 존. 자넨 재무 장관의 대리인으로 강화회의에 참석한 거야. 자네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야."
"그래도 그만두겠습니다."
"평화조약이 마무리되려면 며칠 안남았어. 이번에는 특별히 상징적인 의미로 베르사유궁전에서 조인할 거라더군. 그때까지만 참아봐."
"아니요."
로이드조지가 혀를 찼다.
"이유라도 들어보자. 뭐가 불만인데?"
"···저는 유럽의 평화를 위해 이번 회의가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맞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 작성된 평화조약의 초안은 그저 암담할 따름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 애긴가. 말했잖아, 이게 최선이야."
최선이 아니라 차선만 되어도 케인스는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조약은 최악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최악!
"독일의 경제를 철저히 파괴하는, 100년이 지나도 갚지 못할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강요하는 것이요? 증오를 부추겨서 유럽이 서로 싸우고 약탈하고 굶주리도록 만드는 조약이 최선이라고요? 저는 태어나서 그런 끔찍한 농담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케인스가 딱 잘라 말했으나, 로이드조지는 평소처럼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이미 지난 몇 달간 수도 없이 반복된 얘기.
조약의 조인이 며칠 남지 않은 지금 먹혀들어갈 리가 없다.
"사임은 받지 않겠네. 잘 생각해보고. 엘리제궁에서 보자고."
"거긴 다시는 안 갈 겁니다. 끔찍한 곳입니다."
"그럼 베르사유궁에서 보게 되겠군. 그때 봐."
로이드조지가 사라지고.
책상에는 덩그러니 사직서가 놓여 있다.
파괴적인 미래가 영국을 기다리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그저 절망스럽다.
그때.
재무부의 직원이 눈치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케인스 위원님?"
"뭔가."
"손님이 오셨습니다."
또 헨리 포드인가.
경제학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부류는 기업인들밖에 없다.
돈이 나올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그런 게 아닌 것을.
진정 관심을 보여야 할 정치인들은 유럽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경제적 고려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대중의 눈치를 보며, 정치적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파멸이 뻔한 미래를 층층이 쌓아 올리고 있다.
"안 만난다고 해."
"예."
케인스는 일어나 짐을 꾸렸다.
사직서가 통과되든 말든 상관없다.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더는 머물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마음 먹었으나 쓰라린 심정은 여전했다.
잠시 후 직원이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어···, 위원님?"
"뭔가, 또."
"손님이 말을 전해달라고···."
"아 좀, 안 만난다 하지 않았나. 그깟 자동차, 팔리든 말든 나는 관심 없다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워낙 막무가내여서···. 한 마디만 하겠다고, 이 말을 듣고도 만남을 원치 않으시면 돌아가겠다 했습니다."
케인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들어나 보자. 우리의 자애로운 헨리 포드 경께서 뭐라 하시던?"
"헨리 포드 씨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중국의 특사인 한신 씨입니다."
중국?
직원의 입에서 나온 생경한 나라 이름에 케인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어지는 말에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신 씨께서 말씀하시기를···, 20년 내로 2차 세계대전이 터질 거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