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동상이몽 >
베르사유 궁전.
장엄하게 꾸며진 거울의 방에 각 나라의 외교관들이 우글거린다.
처음엔 프랑스의 클레망소가.
다음엔 영국의 로이드조지가.
미국의 윌슨까지, 세 정상이 서명하고 나서야 중국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량치차오가 펜을 잡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1919년 6월 30일.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되었다.
***
궁전 바깥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외교부 장관, 량치차오가 다가왔다.
"해냈구려."
해냈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이, 이럴 때는 독으로 작용한다.
군벌전쟁과 중일전쟁, 2차대전, 다가올 냉전까지···.
한 고비를 넘기면 다음 고비가 머릿속을 지배한다.
내게는 휴식기라는 것이 없다.
"이번 강화회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중국은 정식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소. 4억 3천에 이르는 중국 민중의 바람이 이뤄진 거요. 장군의 공이 컸소이다."
량치차오가 연거푸 치하의 말을 건넸다.
나는 궁전 처마 밑에 떨어져 고이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동의하오. 기존의 세계는 8대 열강을 칭했지. 하지만 작년 대전쟁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몰락하고, 이탈리아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면서, 일각에서는 이제 5대 열강을 일컫더구려."
"5대 열강이라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을 말함이오."
일본아, 너니?
재밌는 용어를 퍼뜨리는구나.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량치차오가 중얼거렸다.
"중국도 그 대열에 끼는 날이 올런지···."
나는 량치차오의 고민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20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
사상 전쟁의 시대가 올 거다.
민족주의와 결합한 파시즘.
사회주의와 결합한 볼셰비즘, 마오이즘.
개인주의자들의 아나키즘.
전통적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권위주의까지···.
온갖 이념이 혼재되어 각축전을 벌이며.
기존에 존재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역할은 희미해진다.
사상이 국가를 좌우하고 민족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
8대 열강이니, 5대 열강이니, 따위에 집착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공화주의의 확립.
일찍이 소설가 루쉰은 중국인의 저열한 국민성을 식인으로 비유하며 약자에 대한 관용, 미래를 내다보는 개혁 의지를 강조했었으니.
중화민국이 지향하는 바는 공화국에 걸맞는 근대 시민의 탄생이 되어야 한다.
"오빠!"
멀리서 한서시가 손을 흔들었다.
"가보시오. 가족끼리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구려.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는 것 같소."
"그럼, 있다가 뵙죠."
다가가니 한서시가 엉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수작이 있다.
"왜 불렀냐."
"부르면 안 돼? 조약에 도장이 찍혔으니, 할 일도 없잖아."
"할 일은 항상 있지."
"아니, 그러지 말고. 자, 받아."
한서시가 빳빳한 종이를 내밀었다.
"뭔데, 이거."
"오페라 티켓."
"이걸 보자고?"
"미쳤어? 우리끼리 이걸 왜 봐? 언니랑 보라는 거잖아."
"오페라는 노잼인데."
한서시가 날 째려봤다.
"언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일 핑계로 신혼여행도 나 몰라라 하고. 파리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지. 이 동생이 어렵게 오페라 티켓까지 구하여 대령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노잼이라니. 그게 할 소리야?"
"응, 고맙다."
마침 판초 우의를 쓰고 들어오는 시시우가 보였다.
한서시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오빠, 홧팅."
시시우가 빗물을 털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말했다.
"오페라 티켓이 있는데 저녁에 보러가자."
"오페라 노잼인데."
"그렇긴 해."
시시우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등 뒤를 향했다.
"저기 기둥 뒤에 서시 숨어 있는 거 보여?"
"고개를 돌리진 않을 건데,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
"마음씨가 참 기특해. 남매인데, 일밖에 모르는 누구랑은 참 다르단 말야."
"오페라, 안 갈 거야?"
"가야지. 사실 너랑 보면 꿀잼일 것 같기도."
파리의 마지막 저녁은 그녀와 함께였다.
***
영국의 총리, 로이드조지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큰 틀에서 방향성을 정했을 뿐.
세부적인 수정은 끝없이 이어진다.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 헝가리 등의 문제도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 회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세계를 보기 위함이다.
로이드조지는 구석에 앉은 재무부의 케인스를 지목했다.
"존, 말해봐. 자네가 엘리제궁에 한신을 데려왔지. 꽤 긴밀한 이야기도 나눈 걸로 알고 있어. 그는 어떤 자인가?"
"제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을 말씀드릴 수는 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까요."
"우리는 그걸 듣고 싶은 거야. 사적인 부분을 말야."
케인스는 커피를 홀짝이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용입니다."
"드래곤?"
"글쎄요. 저는 비를 뿌리고 토지를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로 동양의 용을 말씀드린 겁니다만, 드래곤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요. 적으로 돌린다면 드래곤처럼 강력한 적대 세력이 될 테니까요."
"그와 무슨 얘기를 했지?"
"별거 없습니다. 강화회의의 전반적인 사항을 평했을 뿐입니다."
로이드조지는 케인스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의 똥고집은 더 추궁한다고 무언가를 토해낼 리 없다.
대신 이 자리에는 한신과 또 다른 인연이 있는 인사가 와 있다.
"장군도 말씀해보십시오. 아마 영국에서 한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장군일 테니, 오늘 회의에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지목받은 타운센드 중장이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저는 일찍이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한신과 수년간 동고동락하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정을 맺었지요. 저보다 그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믿고 있습니다."
"무얼 알고 싶으십니까?"
로이드조지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신이 중국에서 정권을 잡을 것 같습니까?"
"정권이라면, 정확히 어떤 의미신지?"
"중국이 공화제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수준으로 공화제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형식은 공화를 유지하더라도 결국은 1인 독재의 출현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한신이 그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으시는 겁니까?"
"그런 셈입니다."
오늘 회의는 중대하다.
향후 영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자리.
그 판단의 추가 될 인물이 한신이다.
대전쟁의 중동 전역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폭풍 같은 기동전으로 사막의 전쟁을 조기에 종료시킨 동양의 용.
단순히 전쟁영웅인 줄만 알았는데, 이번 강화회의에 출석하여 보여준 외교적 역량은 또 무엇인가.
그의 단호하면서도 망설임 없는 태도는 그동안 중국에 대하여 서구사회가 품고 있던 선입견들을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로이드조지는 장차 그가 아시아권역에서 세력 충돌의 핵이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얼른 말해보십시오, 한신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재촉에도 타운센드는 은근히 뜸을 들였다.
"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그 친구와 술자리를 한 적이 있지요. 큰일을 마치고 난 후, 녀석은 마음을 놓았는지 꽤나 거나하게 취했었고···."
"그리고···?"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녀석과 밝히지 않기로 약속했단 말입니다."
"국익을 생각하십시오, 장군. 이 회의에서 나눈 얘기는 절대 밖으로 새나가지 않을 겁니다."
타운센드는 고민하는 듯 코를 찡긋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후우, 조국을 위해서라면 말하지요. 녀석은 이미 중국의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랐는데, 아직 20대입니다. 더 오를 곳이 어디겠습니까? 녀석은 제게 똑똑히 말했습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제가 통치한 나라, 1인 권력을 움켜쥐어 공화정의 황제가 되는 것이 자신의 오랜 꿈이라고요."
로이드조지는 생각에 잠겼다.
기존 아시아 정책에서 영국이 최우선으로 고려했던 나라는 일본.
영일동맹은 아시아에서 영국이 해양 패권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대전쟁에서 일본의 행보는 석연찮았다.
동맹을 위한다기보다는 명백히 자국의 이익만을 신경쓰는 듯한 태도.
중국이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협상국 편에서 함께 싸웠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중국 톈진에 상주한 바너디스턴 소장이 보내온 리포트는 중국군의 군사적 역량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중심에 한신이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영일동맹의 기한은 아직 남았으나, 그 효력은 대전쟁 개전 이후 유명무실해진지 오래였다.
반면 영중공동방적군사협정을 맺은 이후 영중관계는 날이 갈수록 긴밀해지고 있었다.
"좋소이다."
로이드조지는 손뼉을 딱 쳤다.
"오늘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지만, 잠정적으로 정책 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각의 보좌진들이 재빨리 손을 놀렸다.
"영국의 파트너를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꿉니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하게 되었지만, 양국의 교류를 더욱 긴밀히 하여 무역로에는 타격을 받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리고 한신.
일본에서 중국으로 선회하도록 계기를 만든 자.
젊은 나이임에도 날카로운 기지를 가진 범상치 않은 인물.
친영 인사로 분류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예루살렘에서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그건 시온주의자들과의 충돌이라고 봐도 무방.
영국에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책 선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타운센드의 증언이다.
파트너는 적당한 야심이 있는 자가 좋다.
친영 인사가 중국의 1인자가 된다면 그것보다 영국에 이익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영국은 한신을 지원합니다. 우리는 그자를 장차 중국의 황제로 만들 겁니다."
어쩐지 케인스의 표정이 묘했으나.
로이드조지는 확신했다.
인도에서 거둔 막대한 이익으로.
19세기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인도 못지않은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을 발판 삼아.
20세기에 대영제국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종신 총리의 꿈도 불가능은 아닐 거라고.
***
중국의 외교위원회 소속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왕징웨이는 꿀꿀한 기분이었다.
일본의 음모를 분쇄하고 중국의 거의 모든 이권을 되돌려받은 일은 분명 일대 쾌거.
그러나 그 일을 해낸 사람이 본인이 아닌, 한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연성자치론 따위로 중국의 분열을 획책하는 군벌 나부랭이가 중국을 대표하다니···.
하지만 일은 또 잘 해낸다.
양가적인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왕징웨이는 허한 마음을 술자리로 달랬다.
프랑스 유학 시절 질펀하게 드나들던 뒷거리는 그의 안방이나 다름없다.
거침없이 마시며 다양한 사람과 교제했다.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는 같은 아시아인으로 재기가 있는 자였다.
그가 즉석에서 제안했다.
"생제르맹 거리에서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집회가 열릴 건데, 한번 가볼래?"
"뭐 하는 집회인데?"
"제국주의를 규탄하며 전 세계 인민들의 해방을 지향하는 모임이야."
"까짓거 가보지."
도착한 가옥에는 프랑스인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는 사회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국가는 오직 소수의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갈 뿐, 누구도 인민을 챙겨주지 않습니다. 다 함께 부릅시다. 인터내셔널가를!"
생소한 풍경.
사회자의 외침에 모두 기립하여 주먹을 들어 올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투쟁과 단결을 다짐하는 강렬한 가사가 인상 깊었다.
가히 광적인 분위기.
왕징웨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사람들 뭐야, 미친 거 아냐?"
"하하, 미쳤다니. 이게 새로운 시대의 사상이라고. 이 친구들은 프랑스 공산당의 창당을 준비하는 거야. 코민테른이라고 들어봤나? 공산주의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
"공산주의라면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맞아. 그거 알아? 허울뿐인 미국의 민족자결주의에 비하여 소비에트는 정말로 민중을 지지한다고!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꿈꿔왔던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새 시대의 일꾼들이야!"
처음에는 꺼려지는 느낌도 있었으나.
집회를 관찰하면서 왕징웨이는 점점 강하게 끌렸다.
그들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여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인 한 명이 왕징웨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중국입니다."
"오, 바로 국경을 맞댄 이웃이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볼셰비키입니다. 러시아 공산당원이랄까요."
왕징웨이는 그와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중국의 문제로 화제가 옮아갔다.
"중국과는 이웃이다 보니 러시아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영토 분쟁이 있지요. 하지만 소비에트의 방향성은 명확합니다. 전 세계에 평등한 민족해방혁명을! 소비에트는 과거 러시아제국이 중국으로부터 강탈했던 영토를 깔끔하게 포기할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미 소비에트는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의 해방을 돕고 있습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확실히···. 코민테른은 다르다.
왕징웨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집회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처음 자신을 데리고 온 베트남 술친구가 어깨를 툭 쳤다.
"응, 마음에 드는군. 이런 세계가 있을 줄이야."
"다행이네. 중국도 인터내셔널의 물결에 동참한다면 세계의 진보가 한층 더 빨라질 거야."
왕징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이름? 응우옌 아이꾸옥이다."
"응우옌···, 뭐라고? 너무 어렵잖아."
"어려우면 그냥 호찌민이라 불러."
"호찌민이라, 알겠어."
호찌민이 말했다.
"나는 혁명가야. 장차 베트남에서 사회주의 투쟁을 일으켜 프랑스의 압제를 몰아낼 몸이지."
"가능성이 보이나?"
"가능성 따윈 몰라. 무조건 성공할 거야. 최근에는 러시아 공산당이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주니 한결 수월해졌어."
"그렇단 말이지···?"
왕징웨이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쑨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본 군국주의에 이용만 당하다 내쳐질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도, 그걸 알면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
하지만 굳이 일본일 필요가 있는가.
이제 전 세계 민중의 동지인 소비에트가 있다.
마침 인터내셔널가가 또 한 번 합창이 되었다.
왕징웨이는 가사는 잘 몰랐으나, 그 기상만은 닮고 싶어서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위정자들은 아편으로 우리를 중독시키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그러니 군벌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 파리의 동상이몽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