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유진은 면접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완전히 맛집이네, 여기.’
자유 기사들의 무술들을 견식 하면서 그동안 ‘지식’으로만 쌓았던 옛 기억들을 재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창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고.
면접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말미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의 40대 후반의 검사와 활을 들쳐 멘 날카로운 눈매의 궁사가 들어왔다.
아주 잠깐의 시범을 보자마자 유진은 두 사람에게 합격을 선언했다.
몇몇은 끝끝내 수긍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마커슨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둘은 바로, 유진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금검과 궁귀였다.
‘금검은 아직 자신도 모르고 있겠지만, 가르치는 것 하나만큼은 뛰어난 실력자였지. 후학 중에 손꼽히는 고수들도 여럿 나왔었고. 그 때문에 태양신교에서도 영입 제안을 할 정도였으니.’
또한.
‘그리고 궁귀, 그가 직접 만든 신법만은 보통 수준을 넘어선 이론이었다.’
합격자가 여럿 있긴 했지만,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이는 결국 금검과 궁귀, 그리고 투귀였다.
‘세 사람의 무술을 합쳐 새로운 전투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겠어. 아주 독창적이고 파괴적인 무술을.’
유진의 입이 말려 올라갔다.
한편, 마커슨은 합격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사라진 상황.
리처드와 릴리안, 유진만이 심사석에 앉아있다.
“여보. 이렇게 많이 뽑았는데 괜찮겠어요?”
릴리안이 걱정 섞인 물음을 하자 리처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로베르 가문은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오. 쌓아온 것이 있으니.”
문제없다는 말에 유진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러면 내년에 한 번 더 열어볼까요? 이걸로는 좀 아쉬워서요.”
순간 리처드가 굳었다.
“……1년은 좀 그렇고 2년 뒤는 어떠냐……? 아무래도 큰 행사다 보니…….”
“농담이에요.”
유진은 쿡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 * *
어제 마커슨의 안내대로, 합격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무술 선생의 자격으로 로베르가의 수련장에 모였다.
그들은 지난 밤사이 로베르가에서 준비한 축하 파티를 맞이하며 만족스러운 밤을 지낸 듯했다.
검술을 주로 쓰는 자에게는 고가의 검을, 창술을 쓰는 자에게는 튼튼한 창을 지급하여 작은 보상을 쥐여준 탓이었다.
물론, 탈락자들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문전박대하지는 않았다.
마커슨이 합격자들 앞에 우뚝 서 있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우리 가문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끔 탈락자들에게도 성대한 위로식을 치르고 수고비를 지급했다. 작은 대가를 치른 셈이지만, 나중에 이들은 우리 편에서 큰 도움이 될 거야.’
유진이 리처드와 마커슨을 설득할 때 했던 말대로, 유진은 미래를 생각하고 탈락자들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 것이다.
개중에는 질풍인지 돌풍인지 하는 율과, 투귀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져 체면을 구긴 벽력도 있었다.
‘그들조차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영지를 떠났으니…… 어쩌면 공자님은 황제가 될 인물이 아닐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살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마커슨으로서는 유진이 참으로 기특하고 대단해 보였다.
유진은 이들을 앞에 두고 주욱 둘러보았다.
페드로, 스콜스, 샌안드릭…….
용병계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거나, 이제 막 떠오르는 실력파 기사들만이 주를 이뤘다.
그중에는 금검과 궁귀, 투귀도 서 있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꽤나 친해졌는지, 조금씩 잡담을 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왜 자신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보통 지도를 위해서는 한 무술당 한 명의 선생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니.
“우리를 비교하고 싶으신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꼬맹이 도련님이시란 말이지.”
그들끼리 쑥덕거리는 동안.
유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우선, 첫 번째 합격자이신 페드로 선생님. 먼저 저를 간단히 지도해 주세요.”
페드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짧은 머리에 반듯한 인상의 사내.
유진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 가문의 비전 검술만 배운 뒤 자유 기사로 활동 중이지. 특징은 정석적인 검술이고.’
기초를 다지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인물이었다.
페드로는 자신이 첫 번째 순서라는 걸 조금 의식하는 듯했으나, 이내 능숙하게 검술 지도를 시작했다.
“공격과 방어 중 생존에 필수적인 방어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페드로가 방어 동작을 시범 보였다.
척, 척!
머리, 왼쪽 측면, 오른쪽 측면, 왼쪽 하단, 오른쪽 하단, 걷어내기, 밀쳐내기.
그에 조합되는 스텝까지.
깔끔하고 정석적인 동작을 선보였고, 검술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페드로의 기본기를 인정하듯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다.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모여 있던 선생들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일제히 집중됐다. 자신이 가르칠 제자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유진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척, 척-!
페드로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에는 약간 어설펐지만, 방금 페드로가 보여줬던 그 방어 동작을 이내 모방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공격기를 알려주세요.”
모든 동작을 마친 유진이 덤덤하게 말하자, 페드로는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며 다시 앞으로 나와 검을 휘둘렀다.
절도있는 동작의 베기와 찌르기, 다양한 식들.
“따라 해 보십시오.”
이번에는 묘한 떨림이 감춰져 있었다.
마치, ‘이건 어려울걸.’이라는 뉘앙스가 녹아 있는 듯한 말.
유진이 검을 움직였다.
쉭, 쉬익……!
처음에는 감을 잡는 듯 속도와 방향이 애매한 움직임이었으나.
한두 번 그 동작들을 따라 하고 나자, 이내 수준이 쭉 끌려 올라왔다.
“허…….”
페드로는 더 이상 탄성을 참아낼 수 없었다.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경지라는 것이 있는 ‘방어’보다도 배는 어려운 동작이 ‘공격’이다.
그런데 유진은 방금 단 몇십 분의 시간 동안 방어는 물론 공격 동작까지 자로 재듯이 따라 했으니 놀라울 수밖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선생들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보통이 아니군.’
‘마커슨, 저 양반에게 배운 건가?’
“다음 동작은 무엇이죠?”
공격 동작을 모두 마친 유진이 오롯이 서서 페드로에게 묻자.
페드로는 오기가 발동한 것인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수련장 구석에 놓인 허수아비를 번쩍 들고 와 중간에 두더니.
자세를 취하고, 허수아비를 향해 검을 한 번 휘둘렀다.
탓, 쐐애액……!
동시에.
툭-
주변이 한번 번쩍이더니, 허수아비가 깔끔하게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발도술이었다.
단순한 휘두르기가 아니라 한순간에 호흡을 집중하여 일격에 상대를 깊게 베는 기술.
이는 검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칠 기술이 아니었다.
근력, 신체의 균형, 검의 방향에 따른 팔의 움직임, 상체의 회전까지.
조금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발도술의 위력은 현저하게 줄어들며 오히려 빈틈을 보이기 때문에 이는 숙련자들만이 사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발도술이라, 페드로가 좀 무리했는데.”
“저건 어렵겠군.”
지켜보던 스승들도 발도술만큼은 바로 배우기 어렵다는 걸 아는지 고개를 저었다.
“따라, 해, 보시죠.”
이제 페드로의 말 속에는 오기마저 섞여 있었다.
유진은 허수아비 앞에 서서 한 달 전 마커슨과 겨뤘던 대련 장면을 떠올려봤다.
검, 도, 창, 활, 쌍검, 도끼, 봉, 채찍.
이 무기들을 조금씩 다루면서 각종 무기에 대한 감을 익혀놓았다.
그 감을 토대로 앞선 페드로의 시범을 능숙히 구현했고, 지금에 왔다.
‘발도술이라.’
페드로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360도 각도에서 관찰하듯 유진의 뇌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완전 기억.
그리고 묵광으로 발달한 기감.
두 가지 능력에 더해 한 달 동안의 경험이 섞이자, 페드로가 그 짧은 순간에 어디에 어떻게 왜 힘을 집중했는지까지 파악되고 있었다.
“해보겠습니다.”
유진이 발도술을 펼치려 검을 쥐었는데,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페드로의 동작에 묘하게 틀어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고민에 잠긴 사이, 이번에는 유진이 모방을 못 해낸다고 생각하는지 페드로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동시에, 꼬마를 상대로 으스대고 있던 게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페드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발도술이란 기술입니다. 이건 처음에 배우기엔 어려우니-”
다음에 가르치겠다…….
라고 말하던 참이었다.
척, 쐐애액-!
유진의 검신이 허공을 빠르게 갈랐고.
툭…….
유진은 앞에 있던 허수아비를 잘라냈다.
“…….”
“…….”
“…….”
페드로는 물론, 선생들 전부가 할 말을 잃고 훈련용 허수아비의 절단면을 응시했다.
페드로가 벤 허수아비의 절단면도 분명 깔끔했으나, 유진의 검이 자른 허수아비는 그보다 더 말끔했다.
후.
유진이 심호흡을 뱉어냈다.
‘어제 봤던 궁귀의 움직임이 도움이 됐어.’
유진이 방금 페드로의 동작에서 조금 수정한 부분은 바로, 하체였다.
상체 힘만이 아니라 하체 힘을 동시에 끌어냄으로써 위력을 증대시킨 것.
놀라움으로 인해 죽은 듯이 조용해진 수련장 사이, 페드로는 홀로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유진이 하체를 사용했다는 걸 관찰하고, 페드로도 미약한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진정, 그저 상인 가문의 자제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불찰인 건가.’
자유 기사로 활동하며 지금껏 많은 기사와 용병들을 봐왔지만, 이토록 빠른 습득력을 지닌 인물…….
그것도 7살밖에 안 된 수재는 본 적이 없었다.
‘하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검술 기초가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구나. 실제로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발도를 쓸 때 손아귀 힘이 먼저 빠지곤 했어. 단순히 체력 문제인 줄 알았거늘.’
페드로는 십 년이 넘게 수련해온 자신의 검술이 얼마나 엇나갔을지 되짚어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게서 깨달음을 얻으니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그런 페드로의 표정을 살피던 주변의 다른 자유 기사들 역시 알아챘다.
‘어쩌면, 유진 공자 덕분에 페드로가 이 순간에 각성했을 수도 있겠구만.’
‘표정을 보니 아주 충격이 큰 모양이야. 하긴, 최소한 내가 놀란 것보단 더 놀랐을 테니…….’
‘저 꼬마는 진정 미래에 어떤 인물이 될 셈인 거지?’
유진에 대한 깊은 인상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이제야 사람들을 한 번에 이곳에 모아둔 이유를 알겠군.”
정적을 깨고, 페드로의 뒤를 이어 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바로, 궁귀였다.
궁귀는 여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지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보법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되,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초이자 핵심 보법이었다.
유진도 그런 궁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해보겠습니다.”
저 마법 같은 주문, ‘해보겠습니다’란 문장은 선생들을 긴장케 했다.
유진이 저 말을 뱉으면, 무조건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궁귀가 가진 보법의 특징은 머리부터 발까지 이어진 마나 회로를 균형 있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궁귀는 그조차도 스승에게 수없이 혼나며 배운 기술이었기에 설마 하며 이 보법을 보여주었는데.
타다닷……!
유진은 곧바로 궁귀의 보법을 모방했다.
약간의 소음이 들렸지만, 궁귀 역시도 방금 전 페드로의 표정을 똑같이 짓고 있었다.
그렇게.
유진의 재능에 한두 명씩 매료되는 사이…….
결국 금검이 나섰다.
그가 평소 장난기 가득하던 표정을 지운 채 진지한 표정으로 유진 앞에 섰다.
유진이 천재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금검은 다른 스승들과는 달리 유진에게 놀라기만 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했다.
‘나는 다르다. 나의 검술에는 형과 식이 정해져 있지 않아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야. 이건 따라 할 수 있다기보다는, 이 검술을 느낄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자유 기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금검만의 비술이자 기본기.
금검에게는 자신이 만든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척!
금검이 자세를 잡고 검을 움직였다.
확연히 달랐다.
페드로의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으나 뻔하지 않았고.
궁귀의 보법을 밟았으나 그보다 빨랐다.
탓…….
금검의 검이 멈췄다.
지켜보던 다른 선생들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파괴적이고 빠른, 그렇다고 예측이 되는 것도 아닌 검무(劍舞)였다.
금검의 고개가 돌아가 유진에게 고정됐다.
유진이 걸어 나왔다.
그가 검을 움직였고.
“……허!”
금검은 또 한 명의 금검을 보고 말았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