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전생에서의 기억이 생생했다.
놈은 물개, 펭귄과 같은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녀석, 사자의 정령이었다.
처음에는 귀여운 외양으로 참가자들의 경계를 허물고, 막상 가까이 다가오면 기습을 하는 방식이었다.
뒤쪽에 흩어지는 붉은색 핏물도 이 물개의 모습을 한 정령이 아이들을 공격한 덕분일 것이다.
이 정령은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해본 뒤, 판단하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정령이 임의로 통과를 결정한다.
보통 애초에 정령의 정체를 알아채 관찰력을 보여주거나, 비등비등한 전투 수준을 보여주면 합격.
아마 엘도라는 애초에 정령의 정체를 눈치채고 지나쳤겠지만, 인스 형제나 라울러는 싸움을 벌였을 수도 있다.
유진도 본래 이전 생에는 여기까지가 한계였음을 자각했다.
하지만 이번 생의 유진은 쉽사리 사자의 정령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 녀석은 제대로 밟아놓아야 해.’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은 수정 구슬을 통해 제이드와 더불어 모든 펜첼의 가솔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유진은 이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로 했다.
그리고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나에게는 이 녀석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어.’
물개가 유진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하하, 나도 이해해. 나를 의심하는 거, 솔직히 나도 내 일이 쉽지 않…….
-정체나 밝혀, 가지고 놀지 말고.
-정체라니?
유진이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물개를 노려봤다.
-이번에는 무슨 모습이냐? 피를 흘리는 악귀? 아니면 뿔을 단 악마? 그것도 아니면 뭐지?
-하하…….
빙긋 웃는 표정이던 물개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놈이 모습을 싹 바꿨다.
슈우우욱!
흑빛의 거적때기를 둘러메고, 기다란 삼지창을 든 커다란 정령의 모습으로.
-크흐흐…… 어디서 뭘 듣긴 들었구나.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말이야.
놈의 목소리도 기괴하게 갈라진다.
-잘 알지. 아주 잘.
놈은 12살짜리 어린아이의 앞에 있기엔 너무 커다랗고 공포스러운 외양이었다.
전생의 유진은 그때 상처 입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오러도, 무기도 없는 몸으로 어떻게 이 정령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에 겪었던 환상과 상처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네 눈에는 원망이 담겨있군. 날 언제 봤다고 그러지?
-원망?
유진이 양손에 하얀 빛깔의 오러를 뭉쳤다.
-맞아, 원망. 너는 꼭 한번 이겨보고 싶었어.
그리고 정령에게로 달려들었다.
물속이었기에 속도가 조금 느릴지는 몰라도.
-……!
유진의 속도는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정령이 재빨리 삼지창을 앞으로 세웠다. 유진의 명치를 향해 쏘아지는 창.
그가 몸을 비틀어 창을 비껴내고 오러로 날카로워진 손날을 창대를 향해 휘둘렀다.
유진에게는 무기가 없다.
그랬기에 저 정령의 창을 잘라버려 똑같이 무기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려 한 것.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콱!
창대에는 조금의 흠집이 났을 뿐 잘리지는 않았다.
물속이 아닌 지면이었다면 상황을 달랐을 터. 물론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흡!
어떻게든 거리를 좁힌 유진이 정령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나.
-나름 빠르구나.
정령은 비죽 웃으며 순식간에 유진의 뒤로 이동해 삼지창을 휘둘렀다.
유진이 옆구리를 가격당했고, 곧바로 뒤로 돌며 뭉쳐진 주먹을 휘둘렀다.
정령은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방금 건 느렸어.
유진이 인상을 구겼다.
전생을 떠올려 보았을 때 정령의 속도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그 말이 정말이었군.’
-사자의 시험에 나타나는 정령에 대한 진술은 가지각색이다. 어떤 아이는 해봤자 1성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3성에 버금간다고도 하니 말이다.
아마도 예상컨대, 사자의 정령의 전투력은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맞춤형이지 않을까 싶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유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정령이 웃었다.
-하하, 그런데 어째서냐?
-개소리 말고 덤벼라.
유진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맹렬히 달려들었다.
쉭! 쉬익! 쉬이익!
하얀 빛깔의 오러가 물살을 가르며 정령을 숨통을 끊으려 든다.
그에 정령은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고 젖히며 가볍게 피해냈다.
-다시 묻지, 어째서냐? 어째서 나에게 단순한 적의가 아닌 이렇게까지 진한 원망이 담긴 살의를 내뿜는 거지?
-난 네가 싫으니까.
-내가 뭘 했다고 그러지? 우리는 오늘 처음 보지 않나?
전생에서 저 정령의 모습을 한 사자의 정령 덕분에 사자의 시험에 떨어졌고, 그때 입은 공포심과 상처 때문에 몇 년을 고생했다는 사실.
이런 걸 굳이 저 정령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크윽…….
유진은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야 이미 파악하고 있던 함정을 피하는 거였기에 쉽게 넘어왔지만, 지금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달랐다.
물론 유진에게는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군. 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거지? 그런 주제에 숨은 가쁜 것 같아.
-후우, 말이 많은 타입이구나.
정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진을 응시했다.
분명 싸움의 양상은 정령이 훨씬 우세한데도 이상하게 수세에 몰리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올가미에 조여져 가는 듯했다.
유진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일까?
우우웅!
유진이 오러를 더욱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다리와 팔에도 오러를 둘러 근력을 높이고, 속도를 더욱 낸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다.
‘얼음동굴이 있는 방향, 더 안쪽으로…….’
더욱 몰아쳐야 했다.
지이잉!
이번에는 유진의 오러가 작은 단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오러를 이용하여 형태를 갖춘 무기를 이루는 것은 기본적으로 3성 이상 수준의 검사만이 가능했다.
-호오……?
정령이 놀라는 사이.
팟!
유진이 순간 다리의 오러를 폭발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단검이 정령의 가슴팍에 도달한다.
정령이 다급히 몸을 내뺐지만, 결국 공격을 허용했다.
프스스!
깊게 패인 흉부에서 검은 연기가 퍼져 물에 흩어졌다. 치명상이었다.
-……!
놈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유진이 예상치 못한 힘을 갑자기 꺼내 드니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금검, 궁귀, 투귀와의 극한 훈련이 없었다면 이런 순간조차도 오지 않았을 터.
유진이 심호흡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령이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다. 나쁘지 않군. 이 정도면 사자의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겠어. 얼음 동굴로 지나가라.
-후, 지나가라고? 하하.
유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 합격이니 지나가면 된…….
-너 따위가 나를 평가하고, 내 앞길을 결정해? 누구 마음대로? 내가 처음에 말했지.
-……무엇을 말이냐?
-널 ‘이겨보고 싶다’라고.
유진이 단검을 더욱 꽉 쥐었다. 전보다 더욱 적대적인 태세였다.
-나에 대한 평가는 나만이 할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정령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크크…… 이렇게 되면 나도 명분이 생기지.
슈우우우…….
-사자의 시험에서 내가 굳이 ‘이 힘’을 드러내게 한 녀석은 이제 가주가 되신 제이드님 이후로 네가 처음이군.
팡!
놈이 삼지창을 크게 휘둘러 유진을 물려내더니.
모습을 또 한 번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놈이 변신하는 형상이 묘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 변신체는…….
-네 자신을 상대해라.
바로 유진의 모습이었으니까.
그것도 유진의 기억 속에 그가 가장 싫어하는 스스로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축 처져 있는 얼굴.
늘어진 어깨.
자신감 없는 표정.
남을 원망하는 눈빛.
태양신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창 방황하며 자신을 혐오하고 세상을 저주하던 때의 모습이었다.
-이, 개같은…….
그 모습을 보자 어릴 적 그때의 극심한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단순히 유진이 혼자서 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라.
슈욱!
검은 실 같은 기운이 정령의 검지에서 쏘아져 나와 유진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저주마법이었다.
유진이 느끼는 감정을 극심하게 증폭시키는 효과인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우울하고 힘없는 표정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이어 마치 진짜 자신이 유진인 양 목소리를 흉내 냈다.
-넌 왜 살아?
-닥쳐…….
-어머니께 죄송하지도 않으니?
-닥치라고……!
-차라리 죽는 게…… 모두를 위한 길 아닐까?
유진의 숨이 턱 막혔다.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도 힘든데, 온몸에 근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맹렬하게 회전하던 묵광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데, 머릿속에 어떠한 시끄러운 잡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쟤는 저 꼴로 태어나서 무슨 기사가 되겠다고…… 에휴.
-어머니는 8성 기사인데, 아들은 순 병신이네.
-나 같으면 자살했다.
환청이었다.
쉽게 말해 정령은 정신 공격을 하고 있었다.
오러도, 힘도 없이 태어나 온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던 유진에게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커다란 상처였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환청을 털어내려 했지만.
텁!
텁-!
설상가상으로 뭔가가 유진의 발목을 확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새 앞에서 응시하던 ‘유진의 모습을 한 정령’이 대여섯 명으로 불어나 그의 양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이는 환각이었다.
숨이 콱 막혀온다.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머릿속에는 환청이 가득하고, 환각이 보인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유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앞선 저주에 걸려 무기력한 감정이 비대해진 덕분에 생긴 무의식이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유진은 회귀한 지금이 과거보다 훨씬 강한 상태라는 사실도 망각하였다.
이미 사자의 시험에 대한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령의 수준이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아…….
동공의 초점이 천천히 사라진다.
* * *
같은 시각.
원형의 탁자 위, 가운데에는 사자의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을 비추는 수정구슬이 놓여있다.
제이드와 시리우스, 클라크는 수정 구슬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사자의 정령이 분명 지나가라고 했는데, 어째서…….”
클라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시리우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만용이지. 가끔 저런 종자가 있어. 자신을 과신하고 정령과 끝까지 싸우는 녀석들.”
그가 제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아버지 같을 수는 없는데 말입니다. 뭐, 이미 동공이 흐릿하군요. 구조 인력을 보내겠습니다.”
하나, 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
시리우스와 클라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결과는 뻔했으니까.
오직, 제이드만이 흥미로운 눈동자를 반짝였다.
“좀 더 지켜보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정구슬이 번쩍였다.
* * *
전생보다 분명 강해졌고,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저주를 이용한 트라우마 공격은 변수였다.
심장이 느려지며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시험에 탈락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잠깐.’
죽기 직전까지 몰리자 유진의 머릿속에 문득 아기 적 자객이 암살을 시도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어떠한 ‘보랏빛 기운’이 유진의 심장에서 튀어나와 유진을 구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 기운을 꺼내서 쓴다면?’
유진이 느려지는 심장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미세한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만, 희한하게도 심장이 아닌…….
경험한 적도, 본 적도 없는 어떠한 ‘기억’들이 유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건 아마도 광마, 메피스토가 가졌던 기억인 듯했다.
한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광마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이 눈에 그려졌다.
-메피스토,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을 깨끗이 한다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단다.
-그때 말씀하신 ‘명경지수’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래, 명심하거라.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뜻, 명경지수(明鏡止水).
‘만약 이 명경지수의 마음을 오러로 구현할 수 있다면……!’
유진은 처음에 혼돈을 이용하려 했지만, 뜻밖의 장면에서 단서를 얻었다.
손톱만큼 남아 있던 오러를, 단전 전체에 흩뿌려 뒤덮는다.
저주마법으로 더럽혀진 머릿속과 단전, 온몸이 씻겨 내려가는 감각을 상상한다.
그러자-
지이잉……!
저주로 인해 고장 난 것 같던 묵광이 돌연 크게 반응했다.
마치 제 주인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듯, 기어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급속도로 올라가는 온도, 몸에 차오르는 고양감, 저주로 더럽혀진 몸을 정수로 깨끗이 씻어내듯 개운한 감각까지.
우우우웅!
묵광이, 머릿속 어둠을 물려내고 있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