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같은 시각.
수정 구슬을 통해 사자의 시험에 참여한 아이들을 지켜보던 시리우스, 클라크는 각기 다른 표정이었다.
“허, 유진…… 이 녀석.”
클라크가 유진이 놀랍다는 듯 수정 구슬을 응시하는 반면에.
“…….”
시리우스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이드가 뒤쪽에 앉아 따듯한 차를 홀짝이며 작게 웃었다.
“사자의 정령을 2차 페이즈까지 다다르게 만든 아이는 여지껏 없었다. 기특한 아이구나.”
클라크는 제이드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후론 처음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어. 머리만 총명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루 뛰어난 능력이다.’
정령의 본래 힘을 꺼내 들게 만든 전투력과 더불어, 2차 페이즈에서의 정신 공격을 버텨냈다는 점.
거기에다 소용돌이 마도 함정을 파악하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정령을 처치했다는 점까지.
‘내 딸한테 드디어 라이벌이 생겼군.’
그동안 실력으로나, 감정적으로 엘도라를 흔들어 놓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유진이 등장했고,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으니.
‘딸아이가 당황한 표정을 보다니.’
수정 구슬을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한 클라크는 엘도라가 유진 덕분에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다.
그에 반해.
“……하하, 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대단한 아이군요. 전에 소강당에서 그렇게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인 근거가 있어요.”
시리우스는 사뭇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인정했다.
클라크는 저 표정이 뜻하는 진짜 의미를 알고 있었다.
‘형님이 유진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겠군. 녀석 입장에서는 골치 아파지겠는데.’
초반에는 유진을 그저 치기 어린 꼬마, 건방진 녀석으로만 여겨 대놓고 무시를 했었지만.
지금에 온 시리우스의 태도는 전혀 달라졌다.
그러던 참,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근래에 펜첼에 신입으로 들어온 요리사였다.
입술이 유난히 두껍고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근육이 매우 튼실한 것이 특징.
“안녕하십니까, 간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시킨 적 없는데?”
“시장하실 것 같아 알아서 잘 한번 준비해 봤습니다.”
“뭐…… 그래요.”
고개를 돌리던 시리우스와 클라크가 요리사의 팔뚝에 시선이 멈췄다.
‘신입 요리사가 힘이 좋아 보이는군. 좀…… 과하게 좋아 보이는데.’
‘요리사 출신이 맞나?’
제이드가 요리사를 훑더니 묘한 눈빛을 보였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
신입 요리사는 쿠키와 마들렌이 담긴 접시를 건네면서, 은근히 수정 구슬을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사자의 시험이지요?”
상념을 잘라낸 클라크가 넉살 좋게 물었다.
“자네도 사자의 시험 결과가 궁금한가? 신입이라 펜첼 가문 고유의 시험이 신기한 모양이군.”
“아, 예. 이 시험을 통해 참가자들의 가능성이 확연히 드러난다고 들었습니다. 제 어릴 적도 생각나고 해서 말입니다.”
“하하, 많이들 그러지. 어린아이가 주는 힘이야. 과거를 뒤돌아보게 한다는 건.”
요리사가 수정 구슬에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예…… 그런데 저 아이는 딱 봐도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군요. 몸에 상처도 많고, 근육이 탄탄한 게 딱 봐도 인성도 바르고 남을 챙길 줄 알며 앞으로 커다란 인물이 될 게 눈에 훤히 보입니다. 확실해요.”
“……?”
유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는 몸만 보고 인성과 성격까지 보이나……?”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요리사는 빙긋 웃고는 방을 나갔다.
클라크와 시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수정 구슬을 쳐다보던 와중.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풍덩!
유진이 얼음동굴에 도착하여 그대로 쭉 직진할 줄 알았더니, 아이들을 보내고 다시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
시리우스의 표정이 바싹 굳었다.
‘설마.’
클라크와 제이드의 표정도 한껏 진지해져 있었다.
“아버지, 설마 유진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지켜보지.”
* * *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다시 던져 출발점으로 향했다.
‘아마 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꼴찌로 사자의 시험을 통과하겠지. 어차피 순위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도 함정의 난이도는 더욱 높아질 테니, 자신을 더욱 극한까지 몰아갈 수 있을 터였다.
유진은 그 마도 함정을 다시 한번 파훼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굳이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자의 시험은 아주 치밀하게 짜인 시험이다. 단순히 장애물을 통과하는 데에 그치지 않아.’
시험을 통과하는 데에만 급급하다면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푸슈우-!
계속 헤엄을 치다 보니 사자의 정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마 정령을 통과하지 못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정령을 상대하여 통과하는 이 관문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바로 정령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출발점으로 다시 소환된다는 점이었다.
그랬기에 유진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응?
누군가가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걸 눈치챈 정령이 뒤로 휙 돌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유진에게 제압된 경험이 있는 정령으로서는 유진을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아 보였다.
-뭐지? 왜 다시 오는 거야?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령을 슥 지나쳐갔다.
-무슨…….
정령의 고개를 갸웃거리든 말든, 유진은 계속 출발점을 향해 헤엄쳤다.
사자의 정령도 지나치고.
그러다가 아직 사자의 정령을 넘어서지 못한 아이들도 지나쳐 역주행을 했다.
-응……? 뭐야? 쟤 왜 이쪽으로 와?
-모, 몰라……!
워낙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유진이었기에 그들은 입 모양을 뻐끔거리다가 유진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유진이 출발점에 도착했다.
푸후!
“음?”
출발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등집사가 유진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결국 포기하는 겁니까? 아니, 어쩌면 그게 현명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열두 명 중 세 명이 탈락했으니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니고, 지금 제한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6시간 중 2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
‘그렇다면 최대 4번 정도는 왕복할 수 있겠군.’
유진이 일등 집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숨을 한차례 크게 마신 뒤 다시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등 집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굳이 출발점까지 다시 와서 숨을 쉬고 돌아간다고? 이상한 놈이 들어왔군…….”
유진은 뒤를 돌아 다시 얼음동굴이 있는 쪽을 향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날아오는 작살, 그리고 일정 영역에서는 연속된 작살이 쏟아진다.
이어 사자의 정령을 상대해 통과하면 호수 아래에서의 장애물은 전부 통과하는 셈이다.
누군가의 눈에 이 과정은 그저 ‘시험’에 불과하겠지만, 유진은 이 시험의 진면목을 직접 마주할 생각이었다.
바로.
유령보(幽靈步).
펜첼가의 가솔들이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창안한 기술로, 마치 유령의 걸음처럼 예측이 되지 않는 보법을 말했다.
유령보는 펜첼가의 모든 무술과 연계할 수 있어서, 함께 겸용으로 사용하게 되면 위력이 강화된다.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직계 중에서도 간부급밖에는 없었다.
유진은 이 사자의 시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빼먹기로 결심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유령보였다.
‘날아오는 작살들은 분명 무작위가 맞다. 하지만 그 작살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피하는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 바로 그것이 펜첼의 고유 보법, 유령보야.’
맨 처음에 작살을 피해 얼음동굴을 향할 때는 일종의 시험적인 성격이 짙었다.
작살이 어디에서 어떻게 날아오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첫 번째 이동에서 마쳤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이 유령보의 습득을 시작한 것이다.
그에 더해.
‘시간이 더 흘렀으니 다른 마도 함정도 생겨났을 거야. 갈고리, 철퇴, 쇠사슬 같은 게 섞이겠지.’
찰칵, 찰칵.
이번에는 오른쪽 위와 바로 아래쪽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유진이 처음과는 다르게 바로 몸을 비틀지 않았다.
쐐액!
쐐애액!
작살과 처음 보는 갈고리가 유진을 향해 치닫는다.
본래 단순히 몸을 비틀어 피해내면 될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이곳이 지면이라고 생각하고 몸 대신 ‘발’을 움직였다.
보법을 밟듯이 말이다.
‘왼쪽 30도로 오른발을 뻗어 이동 후에 전방을 향해 곧바로 덤블링.’
애초에 묵광 덕분에 범인들보다 월등히 향상된 기감을 가졌던 유진은 묵광이 2성급에 도달하면서, 보다 더 예민해진 감각을 가지게 됐다.
순식간에 함정의 궤도를 파악한 유진이 움직여 함정을 그림처럼 피해냈다.
이어.
찰칵, 찰칵.
푸슈우! 푸슈우욱!
이번에는 시간차를 두고 철퇴와 화살이 날아왔다. 전방과 왼쪽의 조금 아래였다.
‘고개를 가슴까지 숙여 전방 이동 후, 뒤로 손바닥 두 뼘 만큼 이동.’
마찬가지로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향해 몸을 던지다시피 움직였다.
이번에도 곡예처럼 모두 피해냈어야 했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피짓!
-읍…….
결국 작살에 오른쪽 팔을 조금 베이고 말았다.
평범하게 피해내려면 충분히 피했겠지만, 숨겨진 보법을 깨우치기 위해 ‘계산’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동작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워지려면 이 과정을 두 번, 세 번, 많으면 네 번까지도 반복해야 할 터였다.
‘그냥 오러를 쓸까?’
오러를 쓴다면 훨씬 더 빠른 움직임이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순수한 움직임으로만 터득을 해야 완전히 내 걸로 만들 수 있어. 상처가 나더라도 감내해야 한다.’
반복만이 답이었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서슬 퍼런 대검과 더불어 각양각색의 장애물들이 유진을 덮쳤다.
그리고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보인다. 유령보의 동선, 그리고 걸음의 수까지.’
심지어는.
‘유령보와 곡예운을 섞어도 되겠는데? 결이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해.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유진의 눈빛이 더욱 진지하게 물들었다.
* * *
-후우…….
살을 엘 것 같은 얼음물 속에서 유진은 홀로 함정들과 계속해서 사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팔과 다리에 많은 상처가 남았지만, 연발 작살 영역까지 지나쳤을 때는 이미 유령보를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였다.
그리고.
-뭘 하다가 또 온 거지?
유진이 물개 모습을 한 사자의 정령 앞에 도착하여 그를 마주했다.
사자의 정령은 유진을 보기 싫다는 표정이었지만, 유진은 녀석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우리, 승부는 제대로 내야지?
-……이미 네놈이 나를 그 소용돌이로 몰아넣어 죽이는 바람에 내 본체에도 피해가 왔다. 게다가 새로운 복사체를 만들기까지, 이게 얼마나 귀찮은 과정인 줄 알아?
-그건 소용돌이가 이긴 거지, 내가 이긴 게 아니야. 확실하게 판정을 내야 한다고.
-아니, 그냥 통과하면 될 걸 왜 다시 와서 또 생난리를……!
-간다.
유진이 아톰을 맹렬히 회전시키며 정령에게 달려들었다.
정령은 짜증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피를 흩뿌리는 악귀로 변신했다.
유진의 성취가 거의 3성 이상임을 이미 눈치챈 정령이었기에 수준에 맞게 전력을 3성으로 끌어올렸다.
굳이 다시 붙겠다니 붙어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뭐야……!
유진의 수준은 그사이에 더 올라있었다.
‘움직임이……! 분명히 20분 전까지만 해도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는데!’
지금 유진의 몸놀림은 마치 귀신같았다.
물론 펜첼에서 100년이 넘게 사자의 정령으로 활동해 온 그였기에 유진에게 완벽하게 능욕당하진 않았지만.
‘힘을 전부 다 드러낸 게 아니었나……?’
지금 유진의 움직임은 분명 물 속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땅을 딛고 달리는 것처럼 빠르고 능숙했다.
정령은 자존심이 조금 상하여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으나, 그에게는 최대 4성까지의 힘만 드러낼 수 있는 제약이 걸려있었다.
만에 하나.
‘설마 이 녀석의 수준이 4성은 되지 않겠지. 아직 12살에 불과한 녀석이니까.’
그렇게 된다면.
‘12살 때의 제이드 가주님을 뛰어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정령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질 때.
-딴생각을 하는군.
어느새 정령의 코앞에 다다른 유진이 이를 뿌득 깨물었다.
-갈아 마셔줄게.
-나에게 왜 그렇게 억하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자의 정령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기운을 확 꺼내 들었다.
-네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나도 확인해 보고 싶구나!
두웅-!
폭탄이라도 터진 듯, 물속이 크게 진동했다. 순식간에 2차 페이즈로 들어선 것.
곧바로 정령의 다섯 손가락에서 검은 실 다섯 개가 튀어나와 유진의 머리를 향했다.
환각, 환청, 환통, 트라우마와 더불어 정신착란까지 다섯 개의 저주마법이었다.
분명 유진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의 속도가 아니었다.
사자의 정령이 아무리 유진에게 당했다 하더라도 백 년의 경력이 있고, 정령계에서도 인정받아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뭐야.
유진이 자신의 이마에 박힌 다섯 개의 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오러를 이용해 손으로 잡아 뜯어버렸다.
-아니, 어, 어떻게……!
묵광의 기본 효과, 정신 방벽이 한층 더 강화된 덕분이었다.
-이리 와.
유진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