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유진과 엘도라가 시험장으로 발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예, 예? ‘그 시험’을 준비…… 예, 알겠습니다.”
토끼가 수정 구슬에 대고 무어라 말을 하더니 둘을 멈춰 세웠다.
“잠깐, 기다려라! 시험의 수준을 달리하라는 가주님의 명이 내려왔다. 1분 뒤에 입장해.”
“……뭐가 어떻게 바뀌는 건데?”
“후후…….”
토끼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한쪽 벽으로 다가가더니, 두 앞발을 벽에 짚었다.
이어.
슈우우우!
하얀빛의 오러가 아닌 푸른빛의 기운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마력이었다.
드드드드!
동굴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면서, 얼음 조각들이 천장에서 떨어지고 균열이 갔다.
와중에 유진은 이 상황을 대략 추측해보았다.
‘아마 나와 엘도라를 지켜보던 제이드가 100마리의 얼음 동상으로는 둘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제이드가 따로 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었다.
엘도라가 토끼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뭐가 바뀌는 거냐고요, 웃지만 말고 이야기를 해요.”
“후후, 아주 무시무시한…….”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수가 있어요.”
“너희 둘이 합을 맞춰 시험을 보기로 했지. 가주님은 그걸 참작하여 너희에게 더욱 적절한 시험을 마련하신 거다.”
“그러니까 그 적절한 시험이 뭐냐고!”
엘도라가 검을 집어 들자 토끼가 실토했다.
“100마리의 얼음 동상이 아닌, 단 하나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게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어.”
아마 그 하나의 적은 대단히 강한 상대일 터.
이렇게 되면 더 많은 동상을 해치운 자가 서열이 더 높은 걸로 하자는 제안이 무산되는 셈이다.
엘도라가 유진이 시험을 거부하고 그냥 따로 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았다.
“잠시만, 그러면 서열은 어떻게 가리지.”
유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 한 놈을 마지막으로 누가 때려서 처치하는지로 네가 좋아하는 그 서열을 가리면 되지.”
“음…… 좋아.”
토끼가 앞발을 탁탁 튕겼다.
“너희를 처단할 얼음의 검사가 준비되었으니 이제 들어가라. 부디 건투를 안 빈다.”
이를 갈며 두 남녀가 시험에서 떨어지길 바라는 토끼를 보며 유진은 피식 웃었다.
‘전생의 정보로도 알 수 없었던 점이다. 제이드 덕분에 변수가 생겼어.’
하지만 염려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 한 놈은 펜첼의 기초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최종 기사겠지. 엘도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오히려 잘된 일이 됐어.’
유진은 이 시험에서 펜첼 검술의 완성, ‘일격다흔’까지 구사해볼 요량이었으니.
이번 시험에서 펜첼 검술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시험장으로 들어갔고.
“후우, 계획과는 달라지긴 했지만…….”
엘도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더 재미있겠는데?”
* * *
바닥 중간중간에 놓인 발광석이 희끄무레한 빛을 발한다.
유진과 엘도라는 검을 쥐어 든 채 주변을 경계했다.
고오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엘도라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다가 중얼거렸다.
“저 토끼 녀석이 뭔가 잘못 처리한 게 아닐까?”
유진의 발달한 기감에도 뭔가 걸리는 게 전혀 없으니 정말 그런 건가 싶었다.
일단 공간 자체의 너비가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이 안 되니, 묘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도대체 언제 나오는-”
엘도라가 다시 한번 입을 열던 참.
“뒤!”
“……!”
유진이 본능적으로 검을 세로로 세웠고, 엘도라도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까강! 까아앙!
어디선가 쇄도한 검이 유진과 엘도라를 동시에 가격했으나 둘은 가까스로 방어해냈다.
“기습……!”
뒤를 돌아보니, 덩치가 조그만한 한 아이가 비죽 웃고 있었다.
“제법이고만?”
유진이 눈살을 좁히며 놈의 행색을 빠르게 훑었다.
유진보다 작은 키, 풀어헤친 머리에, 어깨에 대충 걸쳐놓은 검.
단정한 디자인의 수련복을 입었으나 정작 단추는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소매는 삐딱하게 걷어놓은 차림이었다.
척 봐도 뭔가 껄렁껄렁해 보이는 외양이었다.
다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물론 놈을 쓰러트리는 게 중요하니 알 바는 아니었다.
“네가 얼음의 검사냐.”
유진이 아톰을 회전시키며 서서히 오러를 끌어올렸고, 엘도라는.
“으음, 보고 싶었잖아……!”
히죽 웃으며 검을 오른손으로 붕붕 돌렸다.
전투 상황에 들어서자, 엘도라는 그야말로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느샌가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진한 살기를 내뿜는 모습.
“내가 1등이라고,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정신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정말 광녀가 맞는 것 같다.
“그려, 내가 얼음의 검사다. 오랜만에 나온 김에 너거들 실력 좀 제대로 봐야 쓰겄다.”
놈은 앳된 목소리로 교지 북부 소수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다가왔다.
그러면서 하얀빛의 오러를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었다.
엘도라가 유진에게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저놈, 겉모습은 어린아이인데 오러 수준은 장난 아니거든? 생각 잘하고 싸워야 해? 알겠지? 으응?”
“알겠으니까 콧바람 좀 그만 뿜어.”
유진은 엘도라와 눈빛을 교환한 뒤에-
파앗!
꼬마 얼음 검사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유진은 앞선 얼음 동상들과의 싸움에서 익힌 펜첼 기초 검술을 기본으로 유령곡예보를 시전.
엘도라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검술을 구사하며 꼬마를 압박했다.
대륙 최고의 수재로 꼽히는 엘도라와 묵광을 탑재한 유진의 합공.
웬만한 기성 기사도 버거울 정도의 맹공이 펼쳐졌다.
하지만.
까강! 까강! 까가강! 깡!
어슴푸레한 어둠 가운데 검과 검이 부딪히며 시뻘건 불꽃이 연달아 튀어 올랐다.
이는 다시 말해, 유진과 엘도라의 합공은 꼬마 얼음 검사에게 죄다 막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잇……!”
“후우……!”
엘도라가 이를 악물며 속도를 높였지만, 꼬마도 그에 맞춰 검을 움직여 공격을 차단해버리고.
유진이 엘도라의 공격을 막는 사이에 보이는 꼬마의 빈틈을 노리면 귀신같이 보법을 밟아 사각으로 빠졌다.
펜첼의 기초 검술, 그중 방어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미 둘의 수를 꿰고 있는 듯한 느낌일 지경.
유진이 잠시 전세를 파악했다.
‘엘도라는 그동안 자신이 익힌 특유의 검술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다. 나 또한 오러를 나름 많이 사용하고 있어. 그런데도 이 꼬마 녀석은 꿈쩍도 안 한다니.’
분명 외양은 왜소한 꼬마 아이에 불과했지만, 전력 자체는 백전노장의 경험을 가진 듯했다.
‘뭔가 이상하다. 고작 12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펜첼의 검술을 저토록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게다가.
‘꼬마의 오러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야.’
무언가 미심쩍은 생각이 드는 와중.
“고것이 다냐?”
한창 공격을 방어하던 꼬마가 혀를 가볍게 차며 히죽 웃었다.
타닷…….
유진과 엘도라도 호흡을 고르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섰다.
“후우, 저 자식, 가진 오러의 반도 사용 안 하고 있어. 근데 이 정도라면.”
엘도라가 이를 뿌득 갈며 꼬마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꼬마는 강했다. 아니, 1대 1로 맞붙는다면 유진이든 엘도라든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건지, 꼬마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너무 쫄지 말어. 내가 너네들 잡아먹냐? 그냥 팔다리만 적당하게 조질겨. 긴장 풀라 이 말이여.”
말투만 놓고 보면 웬 어린애가 넉살 좋은 아저씨를 흉내 내는 듯, 우스운 광경이었으나.
“퍼뜩 끝내자고.”
꼬마의 눈이 순간 시퍼런 빛을 뿜어내며 둘에게로 치달았다. 긴장을 조금이라도 늦췄다가는 일격에 당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몸을 휘감았다.
유진이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하던 그 찰나의 순간.
그는 엘도라의 검이 기묘한 각도로 움직이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지금 그걸 시전하겠다는 건가?’
전생에서 엘도라를 펜첼 최초의 여가주로 만들어준 그녀의 비기.
역전검(逆轉劍).
쉽게 말해 상대의 힘을 그대로 흡수하여 회전력을 이용해 되돌려 치는 기술이었다.
“잘 봐둬, 유진 로베르!”
이미 꼬마의 검은 유진과 엘도라의 눈앞에 놓였다.
꼬마는 누굴 먼저 칠 것인가?
유진부터였다.
까아앙-!
유진은 애초에 방어를 중점으로 검을 세웠기에 피해를 입진 않았으나, 크게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 꼬마의 검이 엘도라에게 향했다.
엘도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시계방향으로 뒤틀어 돌렸다.
“호오?”
꼬마는 제법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역전검에 당하나 싶었다.
녀석은 검을 재빨리 반시계방향으로 강하게 돌려버리더니, 곧바로 엘도라에게 검을 쏘았다.
역전검이 파훼된 것.
크직!
그녀의 옆구리가 깊게 찔리며 붉은 피가 튀었다. 엘도라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분명 엘도라의 기술은 깔끔했고 좋은 타이밍에 들어갔다.
“으윽……!”
“꽤 괜찮은 수였어. 근디 나한테는 무리제!”
‘저 녀석, 엘도라의 기술을 이미 알고 있어.’
꼬마가 넘어진 엘도라에게 추가타를 가하려 달려들었다.
그녀가 더 큰 부상을 입는다면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쾅!
유진이 몸을 던져 꼬마를 튕겨내고는 내뱉었다.
“누나 일단 빠져있어 봐.”
“그래도……!”
“좀, 있어 봐.”
유진이 발광석에 비친 얼음 검사 꼬마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묘하게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말투도 그 사람하고는 너무 다르고, 차림새도 선뜻 어울리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맞는 것 같네.’
펜첼의 기초 검술이 깊게 베여있는 방어 자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외모.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데도 흐트러짐 없는 검술 실력.
자세히 보니 의복도 펜첼의 정식 수련복이었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봐도 오러의 질감이 너무 똑같잖아.’
저 꼬마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너.”
“드루와, 인마. 혀 놀리지 말고.”
“이름이 제이드 펜첼이냐?”
꼬마가 잠시 멈칫하더니, 씨익 웃었다.
“이놈 봐라?”
* * *
같은 시각.
클라크가 수정 구슬을 통해 유진과 엘도라를 지켜보다가 눈살을 좁혔다.
“흠…….”
엘도라가 저토록 크게 다친 모습은 처음 본 것이다.
그에 시리우스가 내심 기뻐했지만, 애써 티내지 않으며 제이드를 뒤돌아봤다.
“아버지, 유진 혼자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시험을 중단하는 게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아니.”
제이드가 창밖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지켜보지.”
“하지만!”
“녀석들을 대처가 기대되지 않느냐?”
클라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펜첼의 기초 검술과 유령보를 습득했습니다. 아버지 말고는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는데, 저 녀석은 해냈어요.”
자신의 딸아이가 다친 것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만큼 유진의 행보에도 관심이 가는 눈치였다.
“게다가 유령보를 자신이 익히던 보법과 섞었는지, 자세가 조금 달라요. 배운 것을 활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응용까지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지.”
시리우스도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유진을 칭찬하지는 않았었다.
시리우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수정구슬 속 유진을 노려봤다.
‘아버지의 분신이 봐주지 않고 제대로 된 힘만 보여준다면……!’
유진과 엘도라의 동시 탈락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 * *
유진이 쓰러진 엘도라를 뒤에 두고 검을 치켜들었다.
“용케 알아봤구먼? 내가 듣기로 미래의 나는 지금하고 영 딴판이라든디. 그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났길래 말이여.”
눈앞의 저 얼음 검사 꼬마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정체를 시인했다.
유진이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중년의 제이드는 항상 대륙 표준어를 쓰고, 짧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으며, 의복도 티 없이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모습이다.
그런데 어릴 적의 제이드는…….
‘껄렁껄렁한 태도에, 구수한 사투리에, 자유분방한 옷차림까지. 당시에는 사고 꽤나 치고 다녔겠는데.’
거의 양아치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아마도 나이를 먹으며 말투도 고치고, 옷차림도 신경 쓰며 어른의 모습을 갖추려 노력했겠지.
어쨌든, 현시대 최고의 기사인 제이드 펜첼은 유년기에도 극강의 무력을 뽐내고 있었다.
분명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이 시험은 제이드가 직접 명령한 시험이다.’
그렇다는 말은.
‘기존보다 조금 더 어려워졌다뿐이지, 깨지 못할 시험은 아니라는 뜻이야.’
유진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오러와 기감을 크게 향상시켜 준 묵광.
여기까지 오며 습득한 펜첼 기초 검술과 유령곡예보.
그에 더해 본가에서 금검, 궁귀, 투귀와 뛰고 구르며 수련한 각종 무술까지.
그가 가진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당신을 넘어설 수는 없겠지.’
유진이 오러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오러 수준은 괜찮구먼, 미래의 내가 점 찍은 놈이 너…….”
“너를 넘어서면.”
“?”
유진이 또렷한 안광을 내뿜으며 바닥을 강하게 찼다.
“지금의 가주님도 넘어설 수 있겠지.”
타앗!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