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까아앙!
제이드의 검과 유진의 검이 맞부딪혔다.
묵광의 오러를 상당량 끌어올려 가한 공격이었기에 웬만한 또래 아이들이라면 일격에 나가떨어졌을 터이다.
하지만 어린 제이드는 달랐다.
크레이터를 길게 남기며 뒤로 밀려난 어린 제이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를 이긴다면, 네가 나이를 더 먹은 뒤에 중년이 된 나 역시도 상대해낼 수 있을 거다, 이 말이제?”
“그런 셈이지.”
“크하하!”
앳된 목소리로 걸걸하게 웃어 재끼던 제이드는, 돌연 표정을 바싹 굳혔다.
“고것은 안 될 말이여.”
까가강.
갑자기 그가 들고 있던 철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누굴 개 호구 발싸개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나 제이드여, 제이드. 너 이런 거 할 수 있어?”
오른손에 하얀빛의 오러를 기다랗게 형성하기 시작했다.
검기였다.
확실히 그 당시 대륙에서 가장 기대되는 인물로 손꼽힌 인물이었던 만큼, 제이드가 보이는 검기의 수준은 대단했다.
“시방 미래의 나는 대륙을 제패할 거물일 터인디, 어따 대고 내 앞에서 누굴 이기녜, 마녜…….”
하지만.
“이런 거 말하는 건가?”
유진이 말을 끊고 철검을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하얀 검기를 만들어 보였다. 제이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정순함이 엿보였다.
순간 당황한 제이드가 멈칫했지만, 이내 씨익 웃었다.
“쓰애끼, 의외의 면이 있고만? 그 나이에 검기 쓰는 녀석은 나뿐이었는디, 시대가 많이 변했나?”
유진을 다시 본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던 제이드는 이내 유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유진 역시 유령곡예보를 밟아 기묘한 궤도를 그리며 제이드에게 돌진했다.
“허어, 유령보……? 근데 좀 특이한 유령보구먼?”
쐐애액!
유진의 보법을 보며 잠시 감탄한 제이드가 일갈하며 검기를 내질렀다.
그런데 방향이 다소 엉뚱한 곳을 향했다. 제삼자가 보면 고개를 갸웃할 장면이었지만.
“읍……!”
유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유령곡예보로 인해 가속도가 붙은 몸이 향할 수 있는 방향은 단 한 곳뿐인데, 제이드는 딱 그곳으로 미리 검기를 찔러넣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유진이 밟을 경로를 예상이라도 한 듯했다.
‘아무리 유령보에 곡예운을 섞어서 보법을 변형했다고 하지만, 제이드 앞에서 써먹기에는 무리라는 건가……!’
유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황급히 뒤틀었다.
사각으로 빠져 횡으로 검기를 흩뿌리면 일격에 제이드를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피해야 하는 상황.
하나, 그마저도 불가했다.
피지짓!
유진의 어깨에 3개의 깊은 자상이 남았다.
제이드의 일격다흔에 당한 것이었다.
“윽…….”
경로를 읽힌 데에다가 상처도 작지 않았다. 고작 1합에서 커다란 전력 차이가 드러난 셈이었다.
“좀 더 갈고 닦아야것는디? 느려.”
제이드의 말대로 보법이 어설펐을 수도 있고, 속도 자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할만하다. 보법만 조금 달리하면 돼.’
판단되기로 확실한 건, 검술 자체는 펜첼 기초 검술을 다룬다는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유진은 피가 흘러나오는 어깨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략을 바꿔 더 좀 더 단순한 보법을 구사하기로 결정.
다리에 오러를 몰아넣던 차였다.
촤아악!
무언가가 흩뿌려지는 소리와 함께 유진이 눈을 감싸 쥐었다.
“크으윽!”
“하하하! 방심은 금물이여!”
제이드가 부스러진 얼음 가루를 한 움큼 쥐어 유진의 얼굴에 오러를 실어 쏘아버린 것이다.
앞이 보이질 않는다.
이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는 유진의 모습을 포착한 제이드는 기회를 잡은 맹수처럼 틈을 주지 않고 와락 달려들었다.
유진은 그 잠깐의 순간 한 가지를 직감했다.
‘이번 공격에 죽을 수도 있다. 이건 시험이라고 해서 중간에 멈출 분위기가 아니야.’
중년이 된 지금의 제이드 역시도 한 번 노리기 시작한 적은 무관용의 원칙으로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왔다.
물론 얼음 가루를 뿌리는 비겁한 짓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미안하게 됐구마!”
제이드는 사자의 시험이고 뭐고 간에 상대를 아예 썰어버리겠다는 광기를 내비치며 검을 내리쳤다.
유진이 이를 뿌득 갈며 내뱉었다.
“그런 술수도 많이 갈고 닦으셨나 보네……!”
우우웅!
유진은 묵광의 기감을 활용, 보지 않고도 눈에 그리듯 제이드의 검이 날아오는 궤도를 상상했다.
쉭! 쉬익!
연속으로 베어져 오는 제이드의 검을 눈을 감은 상태로 귀신같이 피해내 버렸다. 제이드의 말대로 유령곡예보의 속도를 더욱 높인 것이었다.
제이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검을 눈감고 피한겨? 너…… 방금은 좀 달랐던 것 같은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한 목소리.
눈에 들어간 얼음 가루가 녹아 없어지고, 유진이 충혈된 채로 제이드를 노려봤다.
“넘어선다고 했지, 내가.”
“너, 펜첼에 몇 년 있었던겨?”
유진이 피식 웃었다.
“3일.”
“……장난치는 거 아니여.”
한숨 돌린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기를 다시 구축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위축되는 것을 감지했다.
비록 제이드가 다소 졸렬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유진은 그런 술수조차도 막아내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웃는 모습이었지만, 제이드의 무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제이드가 오러를 끌어올리며 다가온다.
“펜첼에 3일 있었던 네놈이 나를 꺾고 지나가서는 안 되제.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혀.”
새하얀 빛의 오러가 바닥에 깔리며 진동이 생겨난다. 전생에서 봐오던 그 어떤 어린 천재들보다도 강한 기운이었다.
여러 잡념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할만하다는 생각은 작아지고, 제이드의 광기 어린 표정이 눈에 더욱 크게 들어온다.
‘놈은 정말 강하다. 엘도라와 내가 합공을 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사자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데.’
‘애초에 제이드가 2대 1의 구도를 생각하고 고안한 시험일 텐데, 지금은 1대1이다. 내게 무리인가? 정말 어린 시절 제이드를 그대로 재현한 게 맞나? 수준을 더 상향한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묘하게 꺾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아. 시팔, 그새 잊었네. 하하.”
유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웃었다.
제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여, 회까닥해버린 겨?”
“그 반대야.”
불과 몇 시간 전에 깨달은 것.
명경지수를 떠올린 것이다.
유진이 사자의 정령을 상대할 때 느꼈던 그 감각을 되살려 다시 한번 명경지수의 마음을 갖췄다.
앞에 서 있는 제이드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의심,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까지.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여러 잡념들을 몰아낸다.
‘사자의 정령을 상대할 때는 얼음물 속에 숨도 쉬지 못하는 상태였어.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 훨씬 좋아.’
쉽게 말해 겁먹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순간적으로 마음이 위축된 것.
잠시였지만, 두려움을 머금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 잠깐 사이에 머릿속이 맑아지고, 기세가 다시 불붙은 것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니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 변화는 눈 깜짝할 새였다.
제이드의 오러와는 묘하게 다른 빛깔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하나만 묻자, 꼬맹아.”
그 점을 눈치챈 제이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너, 펜첼 오기 전에 어디서 구르다 왔냐? 보법은 유령보인디, 오러는 난생처음 보는 질감이란 말이제. 오러 운용법이 겁나게 독특혀.”
이 질문은 제이드가 유진의 무위에 놀랐다는 말이자, 경계한다는 의미였다.
유진은 제이드의 안목에 조금 놀랐으나, 티 내지 않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이곳저곳.”
“……곱게는 대답 안 해주시것다?”
제이드가 방금과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검기를 더욱 강하게 형성했다.
이어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검기를 쏘아내며 부딪혔다.
카앙! 카앙! 캉! 카강!
오러가 사방으로 튀며 어두컴컴한 얼음동굴이 번쩍번쩍 빛났다.
분명 초반에는 유진과 엘도라가 합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제이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요…… 여우 같은……!”
유진의 검술은 명경지수의 마음을 갖춘 뒤에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펜첼의 기초 검술로 단단히 다져진 패도적인 자세.
금검을 필두로 배운 변칙적인 검의 궤도.
제이드의 조언대로 좀 더 속도를 높인 유령곡예보.
마지막으로 이 세 개를 절묘하게 어우러지게끔 명경지수를 사용했다.
그 결과.
쉭! 쉬익! 쉬이익!
유진은 이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측 불가의 움직임을 구사하며 제이드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찌르려 하는가 싶으면 사각으로 빠지고, 뒤로 빠지는가 싶으면 위에서 아래로 검을 긋는다.
검술이라기보다 차라리 묘기에 가까웠다.
‘명경지수를 꺼내면서 체력과 정신력이 한 번에 많이 쓰였다. 아주 결정적일 때만 사용할 수 있겠어.’
물론.
‘나에게 딱 알맞은 맞춤형 검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이 감각을 기억해둬야 해.’
유진만의 새로운 검술이 구축된 순간이었다.
피짓! 피지짓……!
전투가 이어짐에 따라 제이드의 몸에 깊은 자상들이 쌓여 갔고.
“뭔 이런 더러운 검술이 다 있……!”
“극찬은 고맙다!”
콰즈즉!
“워매…… 이게 뭔 일 이여…….”
제이드가 가슴팍에 깊게 파인 5개의 검흔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너…… 일격다흔까지 구사하는겨……? 심지어 나보다도 더 능숙하게……?”
쿨럭!
제이드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유진은 한숨을 몰아쉬며 제이드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너와의 싸움에서 펜첼 검술을 완성했다. 고맙게 됐군.”
“몇 살인디 유령보에, 펜첼 검술까지 완성해놓은겨……? 너 뭐시냐?”
“너랑 동갑이야.”
“뭐여?”
제이드가 다가오는 유진을 망연히 쳐다보며 바닥을 짚었다.
“하아, 어이가 없네, 어이가……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드만, 그 말이 이 말이었던겨……?”
제이드는 한 번 더 피를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뭐, 어차피 나는 죽는 것도 아니고, 백년 천년 12살 제이드일텐디…… 축하한다. 둘은 통과여.”
체념한 듯 말하는 제이드의 모습에 엘도라가 힘겹게 환호성을 질렀다.
“유진……! 해냈-”
유진이 말을 끊었다.
“아니.”
“그냥 지나가면 된다니께, 뭔…….”
“네 손.”
유진이 제이드가 바닥에 짚은 손을 가리켰다.
“그냥 지나가면 된다면, 얼음 가루는 뭐하러 움켜쥐는 건데?”
제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래서 예리한 놈들이 싫다니께!”
촤악!
얼음 가루를 유진의 얼굴로 다시 한번 뿌렸다.
물론, 한발 늦은 뒤였다.
쉬익!
유진이 보법을 밟아 사각으로 빠지며 얼음 가루를 빗겨냈다.
‘어떻게 된 인성이…… 아니,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건 오히려 배울만한 점인가. 어쨌든 마지막까지 예의주시하길 잘했어.’
유진이 가볍게 혀를 차며 제이드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다가갔다.
“지금의 가주님은 이런 스타일이 아닌데, 실망이야.”
“자존심이 달렸는디 실망은 얼어 뒈질!”
제이드는 동굴이 쩌렁쩌렁해질 만큼 크게 일갈하더니.
“이것도 피해 봐, 일격다흔 백규(白奎)여! 인마!”
온 힘을 다한 검격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넓고 긴 오러가 공기를 찢으며 유진에게 치달았다.
쿠구구구!
3개로 갈라지는 검의 줄기.
그에 더해 작은 별 모양의 오러 입자들이 검의 잔상을 따라 흐드러지듯 뒤쫓았다.
백규(白奎), 흰색 별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 양반이 진짜……!”
비록 방금 또 다시 얼음 가루로 얍삽한 공격을 하긴 했지만, 이 마지막 일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일격다흔 백규’는 제이드가 가끔 사용하는 중급 기술이라고 들었던 비기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검격이 아닌, 베이게 되면 그 즉시 환부가 깊게 타버리는 추가 효과가 있었다.
필살기에 가까운 기술, 일각에서는 백규를 오러의 폭풍이라 불리기도 했다.
‘백규를 이 나이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그럼 벌써 4성이란 얘기인데……! 인성과 실력이 반비례하는 건가?’
유진은 이 타이밍에 필살기를 꺼내들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두 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일격다흔 백규의 파훼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크하하하!”
유진이 백규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상한 제이드는 광소를 터뜨렸지만, 이내 안색이 굳었다.
유진이, 역으로 제이드의 품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폭풍의 눈은 고요하다지, 아마?”
쾅!
어깨로 제이드를 강하게 부딪힌 유진이 제이드를 깔아뭉갰다. 백규는 허공을 잔뜩 불사르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백규는 시전자에게 가까울수록 오히려 위력이 약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유진은 그 점을 이용한 것.
“어떻게……!”
“이제 진짜 통과다.”
유진이 망설이지 않고 제이드의 복부에 검기를 깊게 찔러넣었다.
푸욱!
“큽…….”
제이드는 결국 무릎을 꿇고 피를 크게 쏟아냈다.
“후우우…….”
유진이 호흡을 내뱉는 소리가 얼음 동굴에 고요하게 퍼졌다.
제아무리 제이드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큰 부상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전투는 비로소 끝난 거라 봐도 무방했다.
다만, 유진의 입장에서 현 가주의 어린 시절을 나타낸 이 인격체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문제였다.
제이드가 작게 웃었다.
“너…… 이름이 유진이라고?”
“……그래.”
제이드가 고개를 천천히 떨구며 중얼거렸다.
“미래의 나는…… 아마…… 너를…… 아낄 것 같고만…….”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는 푸른 입자가 되면서 공중에 비산했다.
유진이 큰 호흡을 내뱉으며 조용히 묵례했다.
아무리 마법으로 만든 인격체에 불과하다지만, 현 가주에 대한 예의이자 존중의 표시였다.
‘유년기의 제이드는 완전히 깡패나 다름없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많이 변한 것일까. 계기가 있었을까?’
여러 궁금증이 들었지만, 당장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시험은 완전히 끝났으며 동굴 밖으로 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선물이 남겨져 있었다.
“음……?”
제이드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푸른빛의 작은 반지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서?”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