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펜첼 가문의 성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그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커다란 탑이 하나 있었다.
“뮬님, 점심시간입니다.”
“…….”
“뮬님!”
“아, 그래, 그래.”
뮬이라 불리는 남자는 그 탑의 맨 위층, 서적이 가득한 방 안에서 책 하나를 탐독하던 와중 집사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펜첼 가문의 이단아이자, 제이드 펜첼의 첫째 아들이었다.
늘 몸이 약하여 펜첼이라는 환경에서 적응이 어려웠던 그는 이곳에서 홀로 마법을 연구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뮬님.”
“응, 오늘도 그 맛없는 보양식이라고?”
“아뇨, 그게 아니라…….”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 시험에…… 주목할 만한 녀석들이 있습니다. 뮬님께서도 한번 보셨으면 해서요.”
“주목할 만한 아이라면 엘도라 정도 아닌가? 몇 명 더 있다는 거야?”
“예, 그, 유진입니다. 릴리안 님의 아드님 말입니다.”
뮬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물었다.
“5년 전에 전국에 무술 스승 구한다고 전단지를 뿌리라 했다던, 그 맹랑한 녀석?”
“예, 맞습니다.”
뮬은 생각을 좀 더 잇다가 푸하하 웃어버렸다.
“이야, 그 녀석…… 이제 12살이지? 그 사이에 많이 컸나 보네.”
“그런가 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전담 집사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뮬님. 본가에 들를 계획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본가 근처의 약초 지역에요.”
“응, 가야지. 지금 딱 필요한 약초가 있거든.”
* * *
며칠 뒤.
사자의 시험을 치르면서 다쳤던 상처들을 모두 회복한 유진과 라울러가 연무장에 섰다.
그들의 옆에는 금검과 라울러의 호위기사가 서 있었다.
둘은 어느새 친해진 것인지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고 있다.
유진은 목검을, 라울러는 목창을 든 상태.
“심판을 봐 드릴까?”
“괜찮아, 필요하면 부를게.”
연무장을 휘휘 둘러보던 라울러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유진. 원래 여기 3층 연무장은 펜첼 직속 정예 기사들만 사용하라고 만든 공간이라던데, 가주님이 특별히 사용허가를 내리신 거래.”
“그래?”
“응, 시설도, 무기도 전부 최고급이잖아!”
라울러는 사자의 시험 이후 유진의 입지가 달라졌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
연무장 3층을 내어준 것도 그렇고, 유진을 대하는 호위기사들의 태도도 사뭇 공손하게 달라져 있었으니까.
하나 유진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나저나 형, 란나찰은 좀 더 연습해봤어?”
“당근이지.”
“가볍게 한 번 볼까?”
라울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창을 앞으로 세우자 유진이 검을 찔러넣으며 라울러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쉭, 쉬익!
이내 유진의 검이 라울러를 압박했다.
만약 검을 든 라울러였다면 진땀을 흘리며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만 급급했을 터.
하지만.
탁! 타악!
창을 든 라울러는 유진의 검을 란과 나를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걷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찰을 이용하여 공격, 유진이 멈칫거리게 만들기까지.
“오.”
‘고작 며칠 전에 창을 접한 라울러가 이 정도라니, 앞으로 내 대련 상대로 괜찮겠는데.’
유진이 감탄하며 걸음을 멈췄다.
“흐흐, 다 네 덕분이다.”
“그래, 그러면 이번엔 속도 좀 높여서 해보자.”
유진이 검을 고쳐잡았다.
“그야 얼마든지 가능-”
쐐애액!
라울러가 헛숨을 들이켰다.
유진이 밟은 보법에 가까스로 반응하긴 했으나, 기묘한 각도로 비집고 들어오는 검에 순간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 사자의 시험 전에도 유진의 움직임을 마주한 바 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움직임이었다.
예상하지 못할 만한 곳으로만 딱딱 골라서 움직이고,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검이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라울러는 유진이 힘 조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다치지 않도록 적당히 하는 거겠지.
자존심도 조금 상하기도 하고, 묘하게 피가 뜨거워진다.
“봐주면서 하지 마! 다칠 거면 다치고 말지!”
유진은 아무 말 않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게 형한테 더 좋을 수도 있겠네. 오러도 써보자.”
그 즉시 라울러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유진도 마찬가지로 오러를 운용, 2성으로 격상된 묵광을 이용했다.
화르륵!
유진의 몸이 거친 질감의 오러로 휘감겼다.
12살의 제이드를 상대하던 도중 구축한 유진만의 독특한 검술이 펼쳐졌다.
유령곡예보와 펜첼의 기초 검술, 금검의 검술이 합쳐진 동작이 묵광으로 적절히 섞인다.
라울러는 유진의 검술을 눈으로 간신히 쫓았지만.
스윽!
어느새 검이 라울러의 목 언저리에 닿아있었다.
“아…….”
“후, 형은 아직 연습이 덜 돼서 그래. 그래도 확실히 창이 훨씬 낫네.”
“……응.”
유진이 힘을 꺼내자 10초도 안 돼서 체크메이트를 당한 것.
확실히 벽이 느껴졌다.
물론 그 사실이야 시험 전에도 느끼고 있었던바.
“나, 진짜로 달라져야겠어.”
“할 수 있어, 형은.”
유진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라울러도 창을 다루기 시작했으니 그 사건만 넘기면 통과할 수 있겠는데.’
라울러는 유진의 격려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을 바닥에 내려놓고 호흡을 골랐다.
잠깐이었지만 격렬한 대련을 하고 나니 다친 부위가 다시 쑤시는 것 같았다.
그 점을 눈치챈 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따 약 한 번 더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완치는 안 된 모양인데.”
“아…… 약방 다시 가기 싫은데.”
“왜? 펜첼에 의약품 되게 좋은 거 쓰잖아. 효과 좋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라울러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약제사가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눈이 쭉 찢어져서 인상도 더럽고, 분명 약제사인데 손에 흉터가 수두룩한 데다가, 말투도 가만히 들어보면 북부 사람이 아닌 것 같애. 남부 사투리가 섞여 있다니까.”
“……그래?”
유진은 순간 떠오르는 인물들이 하나 있었다.
‘설마, 본가에서 작별인사할 때도 뭔가 수상한 표정을 짓더니. 아니겠지.’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 한 번 확인해 보고, 맞다면 오히려 잘 된 거야.’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여럿이 목소리를 높이며 뭐라고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딱 봐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뭘 더 따질 게 있단 말이오? 척 보면 척 아니오!?”
“직계는 얼음 동굴 2단계, 3단계까지 도전해서 다 붙고, 방계는 초반부터 다 떨어지고!”
“직계 녀석들에게만 피하기 쉬운 함정을 주고, 미리 정보를 알려준 거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잖소!”
내용을 들어보니 아마 탈락자의 시종으로 온 호위기사들이 펜첼 관계자에게 뭔가 비리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았다.
“시험을 다시 치르게 하시오! 우리 가문의 적자가 이 정도로 허무하게 시험에 탈락할 리가 없단 말이오!”
“옳소! 재시험을 준비하시오!”
유진이 이마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뭐 어쩌려고 저런 생떼를 부리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왜? 뭐, 설마 때려눕히기라도 하겠어? 쩝, 탈락자들 입장에서는 이상할 만도 해.”
“때려눕히기라도 하겠냐고?”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지.”
“응?”
유진과 라울러, 금검과 호위기사가 1층 연무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1층에 살짝 내려와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가장 덩치가 크고,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기사 한 명이 연무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시험의 결과를 알리러 온 펜첼의 대리인을 향해서.
“우리가 죄 개 호구로 보이는 거요?”
유진의 기감으로 보기에 놈의 수준은 대략 7성 초반.
6성 기사부터는 웬만한 기사단에서도 극진히 대우를 해주는 수준이다.
7성 기사라면 그간 커다란 일 없이 잘 먹고 잘 살아왔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저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이 7성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점점, ‘그 사람’이 입구 건너편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억울한 마음은 알겠으나 일단 자리에 앉아서 설명을 들어보시죠. 수정 구슬에 모든 기록이 담기는데, 어떻게 우리가 술수를 쓴단 말입니까?”
대리인이 차분히 설명을 이었으나 녀석들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술수가 아니라면 미리 정보를 흘린 건 맞다는 이야기인가?”
놈이 으르렁거리며 대리인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자 대리인도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펜첼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좋으나 모욕적인 행위는 참기가 어려우니-”
“여기까지 오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은 아시오? 우리 입장에서 이딴 식으로 시험에 탈락하면 기분이 좋겠소?”
그러던 와중이었다.
끼이익.
입구의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유진이 생각하던 ‘그 사람’이 나타났다.
“하…… 이거, 참.”
클라크 펜첼이었다.
항의를 하던 시종들은 클라크의 등장에 잠시 움찔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으니, 대리인은 들어가 있으시오. 내가 해결하지.”
“클라크 펜첼 경, 우리들의 억울함을 참작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시종인들은 조금 전보다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클라크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부디 상식적인 처사를 해주시리라-”
“당신네 나약해 빠진 아이들을 호위한답시고 여기까지 친히 기어 나와주신 세 시종들, 동시에 나에게 덤비시오. 진검으로 말입니다.”
“……뭐, 뭣?”
“그 검들 중 하나라도, 나, 클라크 펜첼의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재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겠습니다.”
클라크는 벙 쪄있는 세 시종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연무장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오러를 쓰든, 마력을 쓰든, 뭐든 가져다 쓰시오. 나는 이 목검을 이용, 오로지 순수 근력으로 상대하겠으니.”
3명의 시종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이를 깨물며 허리춤에 꽂힌 검을 빼들었다.
스릉, 스릉!
유진이 그들의 전력을 가늠해 봤다.
‘한 놈은 7성 초반, 한 놈은 6성 중반, 한 놈은 6성 초반. 만약에 합격술이라도 펼친다면 거의 7성 중후반까지의 전투력도 보일 수 있다.’
물론, 유진은 클라크의 성격을 알았기에 잠시 재밌는 구경을 하겠구나 싶었다.
“정말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소!”
“원망하지 마시오, 클라크 경!”
세 시종인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세 개의 검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움직임을 보니 확실히 제 몫은 확실히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로 하잘 때 이야기로 끝냈어야죠.”
클라크가 팔을 몇 번 움직이고, 멎었을 때 쯤…….
콰직!
콰드득!
으드득!
무언가 부러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나더니.
“크아악!”
“으어어…….”
어느샌가 세 시종인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무릎이 으깨지고, 팔꿈치가 자유자재로 회전하게 된 상태로 말이다.
유진은 순간 보았다.
‘맞다. 클라크 삼촌의 이명이 그거였지.’
공중에 커다란 거북이의 단단한 등껍질이 환영으로 잠시 드리웠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 방 한 방을 묵직하게 휘두르는 스타일을 가진 클라크의 이명은 바로, ‘현무(玄武)’.
클라크는 단 세 번의 검격으로 고도로 훈련된 세 기사를 제압한 것이다.
투둑.
클라크가 목검을 바닥에 내던지며 쓰러진 세 시종들에게 다가갔다.
“으으윽…….”
“잘 들으시오.”
뒤이어진 무겁고 낮게 떨리는 클라크의 음성에 유진은 호흡을 조용히 내뱉어야 했다.
“이곳은 펜첼입니다…… 불만이 있다면, 무위를 증명하세요.”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