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임명식 이후 6개월가량이 지난 시점.
다른 대륙이라면 푹푹 찌는 더위가 느껴져야 하지만, 펜첼의 여름은 서늘함을 간직했다.
“합!”
“합-!”
연무장에는 유진과 라울러, 인스 형제, 엘도라를 비롯한 총 9명의 수련생들이 목검을 들고 기초자세를 취하며 기합을 넣고 있다.
13살이 된 유진은 더욱 성숙하고 단단해진 몸이 됐고, 동시에 펜첼의 기사단에 들어갈 수련생으로서 훈련에 매진했다.
검술명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훈련방식은 체계적이었고, 심각하리만치 혹독했다.
오전 6시에 기상하여 공복인 상태로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기.
땡볕 아래에서 마보 자세로 수 시간을 버티기.
일명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펜첼의 뒤쪽 절벽을 끝까지 오르내리기 등.
주로 하체와 몸 전체의 균형을 중시하는 훈련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실수라도 하면 중상을 면치 못했지만, 뛰어난 신관을 데려와 치유를 마친 다음 바로 다음날 또다시 혹독한 훈련을 거듭했다.
그렇게 기초 체력 훈련이 끝나면 검술과 보법을 익히기 바빴다.
훈련의 총 책임을 맡은 일등 집사, ‘에막스’는 개인마다 최대한의 기준을 정해놓고, 자비라고는 한 줌도 없이 녀석들을 굴리고, 또 굴렸다.
“너희들은 합 일(一)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껏 수백 번은 이야기했다.”
“예!”
“예-!”
에막스가 땀을 뻘뻘 흘리던 라울러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자꾸 둘, 셋이 된단 말이지.”
라울러 앞에서 우뚝 멈춰선 에막스가 스산한 목소리를 냈다.
“라울러, 넌 우리 펜첼에서 무얼 얻길 원하지?”
“예? 아, 훌륭한 검술과, 보법…….”
“무슨 헛소리지? 넌 검술보다 창술에 특기가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검술명가인 펜첼에 있을 게 아니라.”
에막스가 라울러를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창술을 가르치는 가문에 문하생으로 들어가던가, 네 가문으로 돌아가 따로 창술 선생을 초빙해야 옳다.”
“그렇지만…….”
“그래, 그렇지만 펜첼은 널 받아들여 굳이, 굳이 검술을 훈련시키고 있지. 왜일까?”
라울러가 멈칫하는 사이, 에막스가 라울러의 귀에다 대고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이유는 하나다! 왜냐! 가주님과 클라크 경, 시리우스 경이 자비롭기 때문이다!”
“예, 예……!”
“그런데 빌어먹을 네놈이 집중을 안 하는 덕분에, 합 일이 되어야 할 펜첼을 자꾸 둘로 만들어 놓는다, 이 말이다!”
쾅!
목검을 바닥에 세로로 내리찍은 에막스가 라울러의 얼굴 바로 앞에서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펜첼을 나가던가…… 아니면 검술을 존중하던가…… 둘 중 하나로 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에막스는 라울러의 기합 소리가 미묘하게 엇박으로 나오고, 동작에 자꾸 창술의 동작이 섞여 나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에막스는 섬뜩한 눈동자를 거두고 몸을 세웠다.
“금일 기초 검술 훈련은 여기까지다. 다음부터 라울러 수련생이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때는 무수면 2박 3일 훈련으로 전 수련생들이 괴롭게 될 것이다. 알겠나?”
“……예!”
“휴식 시간이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에막스가 잠시 라울러를 쏘아보고는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유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창술에, 검술에, 남들보다 훈련을 두 배로 하고 있으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이제 15살인 라울러는 분명 또래 아이들보다 뛰어난 체력과 근력, 그리고 오러 수준을 가졌으나.
‘펜첼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더 고생을 해야겠지.’
물론 유진 역시도 사자의 시험을 통과하고 펜첼의 정식 수련생이 된 건 처음이기에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못해낼 훈련들은 없었다.
애초에 어릴 때부터 거칠고 자유분방한 무술 선생들과 구르고 다치며 극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아 왔기 때문.
그에 반해 라울러는 어릴 적 유진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데에다가, 다루어야 하는 무기도 둘이 되었으니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라울러가 창술에만 집중하기에 펜첼의 검술은 너무 훌륭한 기본기야. 검술과 창술은 완전히 다른 무술처럼 보여도, 결국 목적은 같으니 둘 다 섭렵한다면 나쁠 게 전혀 없지.’
“후우…….”
라울러가 고개를 떨구고 마른세수를 한다. 자괴감이 드는 모양이다.
유진이 라울러에게 다가갔다.
“울어?”
“울기는, 인마.”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데.”
“땀, 땀이야. 아유! 놀리러 왔냐!”
라울러는 1년 전보다 더욱 가까워진 사이가 되어있었다.
유진은 굳이 라울러에게 격려나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네가 잘 커야 나의 든든한 심복이 되니까. 나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목적을 위해 이 생각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다만, 나름 긴 시간을 함께 동고동락하니 생겨난 마음도 있었다.
‘나 홀로 아무도 모르는 목표를 가지고 지금껏 현생을 살아왔는데, 이들의 존재가 내게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줘.’
태양신교의 교황에 대한 복수.
그 이후 대륙의 1인자가 되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자가 되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13년을 달려오면서 유진 역시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라울러같은 믿음직한 녀석이 옆에서 열심히 애를 쓰고 있으니 유진에게도 동기부여가 되고, 위안이 되었다.
그 와중.
“아니, 유진. 찌르기는 아무리 해도 뭐가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이것 좀 한번 봐주라.”
“미안한데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나 다음에 물어봐.”
“번호표라도 뽑았냐? 헛소리야.”
함께 훈련을 받는 녀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1년 사이에 유진은 그들 사이에서 완전한 리더의 자리에 선 것이다.
게다가 뜻밖의 인물들도 유진을 따르고 있었다.
“다 비켜.”
인스 형제였다.
그들이 유진을 둘러싼 아이들을 밀치고 다가오더니, 라울러를 한번 힐긋 보고는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 로베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뭐가, 뭘.”
인스 형제의 눈동자가 유진의 팔뚝 쪽을 향했다.
“이 형들이 또 남의 몸 훑어보네.”
“어떻게 유산소 훈련을 이렇게 미친 듯이 받으면서 근육의 부피는 그대로고, 체지방만 줄어드느냐 이 말이야.”
인스 형제는 1년 전과는 훨씬 굵어진 목소리였고, 더욱 커다래진 근육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에는 유진이 있었다.
“원리가 궁금한 거야, 아니면 훈련 방법이 궁금한 거야?”
“쉽게 말해, 너만의 노하우가 궁금하다.”
“형들이 노하우라고 하니까 괜히 알려주기 껄끄럽네. 다음에 알려줄게.”
“부, 부탁이다! 우리는…… 반드시 더 강해져야 한단 말이다…….”
유진은 인스 형제가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강해지고 싶어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상가는 바가 있었으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인스 형제는 끝까지 데리고 갈 만한 인물들이 아냐.’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려줄 테니까, 다들 좀 앉아 봐. 나 좀 쉬면서 말하게.”
“응!”
“좋다.”
유진은 지금 자신의 위치가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펜첼에 처음 왔을 때야 자신의 무력을 키우기 위해 펜첼을 이용하려는 생각만 했지만.
임명식 이후에 입지가 달라지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펜첼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나의 아군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심지어는 엘도라 역시도 무관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진의 말대로 자리에 앉고 있었다.
하지만.
뭐든 그렇듯, 생각보다 쉽지 않은 점이 있었다.
끼이익!
연무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키가 커다랗고, 덩치도 두 배는 더 큰 사내들 열댓 명 가량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유진의 기수 바로 위 기수이며, 두세 살이 더 많은 선배들이었다.
개중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인물이 말했다.
“후배들은 1층과 2층 연무장을 청소하고 나가 있어. 지금부터는 우리 시간이니.”
날렵한 콧대와 턱선이 외적인 특징이며, 펜첼의 수련생 중 가장 촉망받는 인물.
‘카인’이었다.
그는 시리우스를 배경에 두었으며 실제로도 펜첼의 수련생들 중 가장 강한 무위를 뽐냈다.
그러한 사실은 유진의 기수 아이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으니.
“아, 예…….”
“알겠습니다……!”
괜히 반항해 봐야 좋을 것도,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청소도구를 찾았다.
카인의 양옆에 주욱 서 있는 사내들은 유진의 무리들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훑어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우리 때는 이런 말 안 해도 알아서 다 청소도 해놓고, 환기도 시켜놓고 했는데…….”
“참 좋아졌어. 그러니 실력도 그저 그렇지.”
“저런 것들도 펜첼이라니, 야, 거기! 거기는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 발자국 봐라. 어휴.”
특히나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들은 저들끼리 팔짱을 끼고 모여 무언가 작당모의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진은 그 모욕적인 말들을 모두 들으면서도 섣불리 나서진 않았다.
이유는, 카인이 먼저 나섰기 때문이다.
“애들 듣는데 그러지 마라. 선배로서 모범이 돼야 해. 가주님을 실망시키지 마라.”
“아……! 응.”
“크흠, 그렇지…….”
카인의 말 한마디에 산만한 덩치의 녀석부터 매서운 눈매를 부라리던 녀석까지 입을 다문다.
카인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유진이 카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게다가 힘을 최대한으로 드러낼 때, 상징검술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했지.’
과연 펜첼의 최대 기대주다웠다.
카인은 미래에도 상당한 실력자로서 대륙을 누비고 다니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
다만.
‘그 사건 이후에는 카인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지.’
펜첼의 간부급만 아는 카인의 사연을 알고 있는 유진은 카인을 마냥 적대하기는 껄끄러웠다.
그보다는, 오히려 힘을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 뒤에 청소하는 게 번거로웠을 텐데, 고생했다. 이만 나가봐.”
“네!”
“알겠습니다!”
카인은 사뭇 덤덤한 표정으로 후배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던 와중.
발걸음을 옮기던 유진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거기, 너.”
“?”
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돌아보자, 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고생했다. 나가봐.”
“…….”
유진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고, 카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 *
그날 밤, 연무장.
쉭, 쉬이익!
라울러가 홀로 창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검은 보조 무기로서의 역할이고, 주 무기는 창.
에막스의 말대로, 이곳은 검술을 주 무술로 다루는 펜첼이었기에 라울러는 창술을 독학으로 터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유진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거야. 이런 날이 쌓이고 쌓인다면, 그렇게 5년이 지나고 난다면 펜첼의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겠지.’
유진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란, 나, 찰.
회전과 찌르기.
그에 이어 수많은 창술 중 ‘팔천무극창(八天武極槍)’이라는 것을 유진에게 배워 수련 중이었다.
유진은 라울러에게 일초식(一招式)부터 오초식(五招式)까지를 보여주었고, 라울러는 그 동작을 익히고 또 익혔다.
쉽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일초식을 뻗던 그때였다.
덜컥!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낮에 마주했던 선배들의 얼굴이 연무장의 조명에 비춘다.
“하, 나. 어이가 없네, 진짜.”
“진짜 창 쓰고 있네? 얘?”
3명의 선배가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라울러에게 소리쳤다.
“비켜! 꼬맹아.”
“무슨 깡으로 펜첼에서 창을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상 네가 훈련할 곳은 없다.”
저녁 시간의 연무장 사용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다.
라울러는 진심으로 억울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그러면 저는 2층에서 훈련하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들은 코웃음을 쳤다.
“2층? 누가 네 마음대로 2층을 써?”
“2층은 위 기수들에게 우선적인 사용권이 부여된다는 규칙을 모르나?”
“미친놈이네, 이거.”
라울러는 다시 한번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이어진 말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너, 걔지? 여동생 데리고 다니는 애.”
“……예.”
“간수 잘해라. 그리고 부모님 없다는 거 티내고 다니지 마. 보호자를 여동생으로 데려오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여긴 강자존이다. 뒷배경도 하나의 실력이자 능력이야. 생각을 하고 다녀라.”
여동생은 물론, 돌아가신 부모님까지 들먹이자 라울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욕지거리가 목젖까지 올라오고, 당장이라도 창으로 저 선배라는 작자들의 배에 창으로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알겠습니다.”
끝끝내 말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하나, 선배들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 기분 나쁜가 보네. 후배님이.”
“그렇게 열 받으면 대련 한번 해. 네가 할래? 야, 네가?”
“한 손으로 해도 이기겠다. 그게 대련이냐, 폭력이지.”
셋이 큭큭거리며 라울러를 조롱하던 와중, 라울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련.”
“?”
“좋습니다, 대련.”
라울러가 창을 쥐어 들었다.
“아무나, 오시죠.”
라울러가 선포하자 선배들이 벙찐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척-
입구에 꽂혀있는 목검을 쥐어 든 선배 하나가 곧바로 라울러에게 쇄도했다.
쉬이익!
“이런 걸 일컬어 지도 대련이라 한다, 후배님아!”
쾅!
목검을 내리치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고, 라울러는 창을 가로로 들이쳐 올려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
“오, 제법인데.”
선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보법을 밟았다.
초반까지는 란, 나를 이용하여 방어해낼 수 있었다.
심지어는 간간이 찰을 섞어 선배를 곤란하게 하기도 했다.
“하, 이거 봐라……?”
묘하게 호각을 이룬다는 느낌이 들자, 선배는 약이 올랐는지 속도를 끌어 올렸다.
결국, 라울러는 이내 한계에 다다랐다.
쿡!
간이 위치한 곳에 찌르기를 한 번 허용하자, 급격하게 움직임이 느려졌다.
“커헉……!”
“아프냐? 하하.”
선배는 피식 웃으며 검을 크게 옆으로 젖혔다.
“다시는 못 까불게 해줄게.”
아예 라울러의 다리 하나를 분질러 놓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변은 없었다.
콰드득!
휘두른 목검이 라울러의 정강이를 타격했고, 라울러의 다리가 그대로 부러졌다.
“끄아악!”
그의 비명이 연무장을 가득 울렸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