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쾅! 콰앙!
좀비들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울리는 굉음으로 글람푸스탄이 진동했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한 마법사가 있었다.
‘웬 이상한 녀석이 등장하는 바람에…… 뭐, 상관없나.’
그는 저 수많은 좀비들을 일으킨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는 처음 고대 유적지에서 줄리아와 호위 병력을 습격하여 줄리아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실제로도 거의 모든 호위병들을 죽이고, 이제 부상당한 줄리아 하나만 남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줄리아의 마법이 생각보다 강력했기에 흑마법사는 잠시 대피하여 모략을 짜던 와중.
줄리아는 글람푸스탄 어딘가로 숨어버렸고, 흑마법사는 줄리아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잠복해야 했다.
글람푸스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스러운 공간들이 많았기에, 그중 한 곳에 숨은 것 같았다.
그렇게 좀비들을 글람푸스탄 곳곳에 매복시키고 그녀가 제 발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줄리아가 흑마탑에 오는 걸 흑탑주가 싫어하는 이유가 있군. 이 정도로 마나를 잘 다루니 후계자 다툼이 생길 수밖에.’
그러던 와중, 펜첼의 기사단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글람푸스탄에 방문했고.
돌연 줄리아 특유의 마나가 느껴져 나와보니 웬 이상한 녀석과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녀석 덕분에 흑마법사의 계획이 틀어졌다.
물론 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준비한 나이트급 좀비와 대적을 이룰 정도다. 저 꼬마의 수준은 대략 4성급이니, 충분히 해결 가능하고도 남는다.’
나이트급 좀비라면 대략 5성급 수준에 버금가는 정도이니, 4성급 기사라면 10명이 와야 상대가 될 것이었다.
실제로 나이트급 좀비는 4성 기사도 이겨본 적이 있으니.
흑마법사의 위치는 유진과 나이트급 좀비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부터 대략 1km.
‘복장은 펜첼, 임무를 수행하다가 우연히 줄리아를 발견한 건가.’
유진과 나이트급 좀비가 서로 천천히 가까워진다.
나이트급 좀비가 저 애송이를 상대하는 사이, 줄리아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흑마법사가 줄리아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줄리아는 어디론가 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물론.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어디로든 도망칠 힘이 없군. 굳이 나의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으니, 저 녀석을 해치운 뒤에 처리하게 놔두면 되겠어.’
이번 암살 작전의 특성상 누가 줄리아를 죽이려 했는지 밝혀지면 곤란해진다.
글람푸스탄에서 일어난 미지의 사건으로 마무리 지으려면 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펜첼의 기사단이 이곳에 와 있으니 더욱 모습을 숨겨야 했다.
* * *
까아앙!
유진과 나이트급 좀비가 검을 맞대었고, 유진이 뒤로 조금 밀려났다.
“하, 어이가 없네.”
30합이 넘어갈 무렵, 유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 좀비의 정체는 후에 마탑에서 전술 병기로 사용할 나이트급 좀비.
애초에 좀비라는 족속들은 체력이 닳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긴 했으나, 해도 너무했다.
유진의 오러는 쓰면 쓸수록 어쩔 수 없이 닳을 수밖에 없는데, 저 거대한 좀비는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 거긴 해. 이놈은 남의 힘을 빌려 조종당하는 것이니까.’
유진의 시야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이 근처에 좀비를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녀석을 먼저 처치하면 나이트급 좀비도 힘을 잃을 것이었다.
다만.
‘위치를 알기가 어렵다. 아예 끝장내 버리고 놈을 찾는 게 더 편하겠어.’
“크우우어어!”
나이트급 좀비의 거대한 검이 공중을 붕붕 가르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거대한 놈은 계속해서 유진을 압박하고, 경로를 차단하고, 방해했다.
그에.
화아악!
유진이 아톰을 최대치로 회전하여 오러를 발산, 상대방을 뒤로 크게 물려냈다.
단순한 소모전으로는 답이 없다. 전략을 바꿔야 했다.
모든 걸 떠나서,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또한.
‘저기에서 날 지켜보고 계신 클라크 삼촌에게도 어필이 되면 좋겠지.’
클라크는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유진의 뛰어난 기감은 이미 클라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 사이 줄리아는 유진의 전투를 지켜보며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일면식도 없는 녀석이 나를 이토록이나 헌신적으로 도와주나? 싶은 생각이었다.
혹시, 첫눈에……?
줄리아는 순간 어떤 망상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이내 고개를 털고 유진에게 소리쳤다.
“내가 도와줄게……!”
“조용히 해. 위치 발각되니까.”
유진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줄리아는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창백한 안색이 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뭘 돕겠다는 건지.
유진은 줄리아의 위치가 탄로 나 흑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아예 줄리아의 음성을 오러를 흩뿌려 지워버렸다.
‘이제 끝내야 한다. 승부를 내야 해.’
유진이 이를 빠득 깨물었다.
나이트급 좀비의 수준은 대단히 강했고, 아마도 현생에서 만난 마수 종류 중 가장 강한 녀석이 아닐까 싶었다.
“크아아아아!”
다시 달려든다. 온종일도 가능하다는 듯, 더욱 거세진 기운을 뿜어내는 녀석의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하지만.
유진은 이때만은 기다렸다.
체력적 부담.
압박감.
두려움.
이따위 감정들을 물려내야만 했다.
그래야, 상징검술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착-
유진이 눈을 조용히 감고, 싸우고자 하며 날뛰는 오러를 차분히 잠재운다.
마치, 잠이 오기 직전인 것처럼, 너무나 편안한 상태를 만든다.
카인과의 대결에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상징검술을 꺼낸다.
유진이 13년간 수없이 익혀온 그만의 검술, 그리고 펜첼의 기초 검술을 합친다.
명경지수라는 이음새를 이용, 이미 한 번 해본 적이 있으니 이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죽을 수도 있다.
그 문장을 떠올리자 잠시 차분한 마음에 흙탕물이 일었지만, 이내 빠르게 잠재웠다.
하얀빛의 오러를 단전 속에서 형상화한다. 그 모양은 장미.
꽃잎 부분과 가시 돋친 줄기를 떠올려 결합한다.
휘유우우웅!
카인과 대결할 때 일었던 그 돌풍이 다시 일었다.
아니,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강한 회오리였다.
곧이어.
번쩍……!
붉은색과 녹색빛이 섞인 거대한 장미의 형상이 유진의 등 뒤에서 잠시 발광했다.
장미만이 가질 수 있는 화려하고도 고혹적인 힘.
그와 더불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가시가 조화를 이루니.
그 모습은 검술의 일환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이 모든 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번쩍!
유진이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풀 플레이트 갑옷을 둘러 입은 거대한 좀비가 그의 몸뚱이만 한 검을 유진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유진은-
탓…….
단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을 뿐이었고, 유진의 검은 잠시 달빛을 받아 발광하자…….
서걱.
나이트급 좀비가 뛰어오던 모습 그대로 세로로 쪼개져 유진의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건 단 하나였다.
엄지손가락만 한 장미잎 수십 개가 유진의 검에서 흘러내려 바닥을 수놓았다.
쿠궁…….
두 조각이 된 나이트급 좀비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졌다.
고오오…….
모든 전투가 끝나고, 글람푸스탄에는 정적만이 드리웠다.
“후우…….”
호흡을 고르던 유진의 고개가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언제까지 지켜만 보실 겁니까.”
저 멀리, 가지가 우거진 나무 뒤에 서 있던 클라크가 피식 웃으며 유진에게로 다가왔다.
“볼 때마다 놀랍구나.”
클라크는 유진을 차분히 응시하면서도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주할 때마다 경지를 넘어선 듯한 모습을 보이니 신기할 수밖에.
남들이 10년을 수련할 과정을 홀로 반년도 안 되어 돌파한 느낌이었다.
“감탄할 때가 아니십니다. 흑마법사가 저쪽에 매복…….”
유진이 흑마법사가 있던 쪽을 가리키며 달려가려 하자, 클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놈은 이미 도망가고 있다. 일단 기사단원들을 추격하도록 시켜놨다. 곧 놈은 잡힐 거야.”
“……알겠습니다.”
유진은 납득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닷!
“이, 이게 다 무슨 일……!”
굉음을 듣고 달려온 상급생들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좀비들의 사체가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들은 유진과의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지금에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클라크 경! 괜찮으십니까?”
상급생들이 이 모든 전투가 클라크의 활약인 것으로 알고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클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전투를 끝낸 유진을 살펴라.”
“전투를 끝낸 유진……? 저 꼬마가 이 좀비들을 처치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뭐하나? 빨리 가서 녀석을 챙기래도.”
“저, 정말……? 아, 예!”
상급생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유진에게 달려갔다. 저 녀석이 이 많은 좀비들을 해치웠다니, 솔직히 거짓말 같았다.
유진은 머릿속이 지끈거리고 아톰이 타는 것처럼 욱신거렸으나,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그랬기에 손을 저어 보이며 기둥에 기대앉았다.
클라크는 그런 유진을 작은 미소로 지켜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유진을 질책했다.
“유진 로베르, 이번 전투의 결과를 떠나서, 네 잘못을 알고 있느냐?”
“잘못이요? 음, 너무…….”
“너무?”
“너무 혼자 다 한 거요?”
“장난치지 마라. 네 용기는 자칫하면 만용일 수도 있었다. 상징검술 발현이 단 1초라도 늦었다면, 너의 생사는 알 수 없었어.”
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안 죽었잖아요. 다행이죠, 뭐.”
“야, 인마.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 아니냐.”
클라크가 왜 질문의 의도를 모르냐는 듯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제야 유진이 진지한 표정을 꾸미며 대답했다.
“제가 선두로 좀비들을 치지 않았다면 저 소녀의 생사는 물론 저까지도 위험해졌을 겁니다. 펜첼 가문의 기본 이념은, 싸움을 피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영지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유로 이곳까지 왔는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라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유진에게 이러한 물음을 한 까닭은, 정말로 질책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상급생들에게 유진이 아주 생각이 없었다는 게 아님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생각이었고, 유진도 그걸 알아채고 진지한 척을 했다.
클라크가 장난기가 동해 한 번 더 유진을 테스트했다.
“신호탄은 왜 쏘지 않았지? 너는 펜첼의 기사단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유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현무 기사단만큼 펜첼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만…….”
상급생들의 이목이 유진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강한 적과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펜첼 소속 수련생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카인을 포함한 상급생들의 표정이 내심 감탄으로 물들었고, 클라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말 로베르 가문 아니랄까 봐…… 영악한 녀석. 그런데 저 말은 진심인 것 같기도 한데. 어릴 적의 릴리안이 생각나는군.’
릴리안의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리던 클라크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패기롭고 호기로운 모습은 제 어미를, 영리한 구석은 아비를 꼭 닮은 모습이었다.
“하, 하하. 하하!”
대장이 웃자 상급생들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웃고 보았다.
그들을 뒤로하고, 유진이 일어나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줄리아에게 다가갔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줄리아…… 줄리아야.”
줄리아는 이제야 유진이 겁이 나는지 조금 두려운 눈동자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이름을 물은 이유는, 처음부터 줄리아라고 부르면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답답한 친구네. 우리가 너 해치려고 여기까지 와서 그 많은 좀비들을 해치웠겠냐? 그 두려운 눈동자 좀 그만해라. 아휴, 정말.”
“…….”
유진이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생수통을 건네자, 그제서야 줄리아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목을 축였다.
그 사이 유진은 기사단원들이 흑마법사를 쫓기 전, 단원들 중 하나가 줄리아를 응시하던 그 눈빛을 또렷이 상기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배신자가 있었던 건가.’
펜첼에 배신자가 있다니, 처음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으나.
‘해결책은 하나다. 지금도 붉은 전갈 놈들은 나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펜첼의 배신자와 붉은 전갈의 암살자를 엮는다면…….’
대뜸 유진이 줄리아에게 물었다.
“너 연기 잘해?”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