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클라크 일행은 갑작스레 나타난 좀비 떼들을 처치하느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진을 찾아내 그와 줄리아를 구출해냈다.
좀비 떼들의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폭군의 출현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물론 그 사실은 유진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펜첼로 돌아온 며칠 뒤.
펜첼의 병실에 줄리아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고, 유진은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있다.
“너…… 나…… 좋아하냐…….”
음냐음냐.
줄리아는 병실 침대 베개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으휴.”
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줄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은 귀엽게 생겨서는…….’
뭐 저렇게 침을 많이 흘리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유진은 각성제로 인해 몰려오는 두통과 두근거림으로 몸 상태가 안 좋은 와중에도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전생에 태양신교와 흑지의 전쟁에서 가장 큰 두각을 드러냈던 단체는 3곳이었다.’
바로 마탑과 전사의 요람, 그리고 기록의 탑이었다.
마탑은 마법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수준 높은 마법사들이 모여 이루어진 단체였고.
전사의 요람은 검, 도, 창, 등의 냉병기를 다루는 자들이 주축이 되는 세 개의 명가를 중심으로 모여 이루어진 단체.
그리고 신비함으로 무장하여 그 모습과 형태, 규모, 위치조차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곳이 바로 기록의 탑이었다.
기록의 탑은 태양신교의 온갖 계획을 모두 파훼했으며, 미래마저도 예지한다는 소문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정체는 태양신교가 흑지를 통일할 때까지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침을 흘리며 자는 이 꼬맹이가 현 마탑주이자 청탑주의 딸이란 말이지.’
흑지의 운명을 책임지고 쥐락펴락하던 그 거대한 세 곳의 단체 중 하나의 주인.
그 주인의 딸이 바로 줄리아였으니, 유진의 눈에 그녀는 앞으로 마탑과 자신을 이어줄 복덩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더해 유진은 이번 일을 통해 배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래가 많이 바뀌었어. 그리고 나로 인해 그 변화는 점점 더 심해질 거야.’
지금까지 유진이 한 일에 실패는 없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 덕에 오만함이 생겼고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자신감이었고 기지를 발휘한 거라 보였겠지만 말이다.
‘흑탑의 나이트급 좀비, 붉은 전갈의 암살자, 현무 기사단의 배신자, 마지막으로 폭군과 광마까지.’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쉽지 않은 일도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기회가 몇 번씩이나 있었으며 유진은 매 순간 아슬아슬하게 비극을 비껴냈다.
요점은 단순했다.
‘기억만으로는 나를 오롯이 지켜낼 수 없다. 아는 것과 대처할 수 있는 건 별개야.’
완전기억을 가진 자로서, 전생자로서, 그리고 묵광을 탑재한 능력자로서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특히 폭군과 광마와의 만남은 기억에도 없거니와 통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너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섣불리 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배움을 얻었다.
물론 상황을 타개한 결과 많은 보상을 얻었다.
유진이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것들을 반추해보던 참이었다.
끼이익.
“공자, 몸은 좀 괜찮으시오?”
궁귀가 병실에 들러 유진의 옆에 앉았다.
“죽겠어. 하나도 안 괜찮아. 그렇게 약을 잘 만든다고 소문난 궁귀의 최고급 기력 보충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
“각성제까지 쓸 상황이었다니, 정말 죽을 뻔했나 보구려.”
“나도 살아있는 게 신기해.”
“그러면 그만큼 얻은 게 있겠소이다?”
유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번 사건을 통해 얻은 성취를 속으로만 되짚어보았다.
‘우선, 상징검술을 시전하는 데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시전 속도가 좀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이제 나만의 상징검술, 장미검을 꺼낼 수 있어.’
장미검.
유진이 자신의 상징검술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이었다.
나이트급 좀비를 상대할 때 유진은 장미검을 완벽하게 구현해냈고, 완벽한 방어와 공격을 구사하던 녀석을 단 일검으로 썰어냈다.
장미검의 위력은 지금까지 유진이 사용해왔던 모든 기술과 검술을 비교해보아도 가장 강력했다.
하지만, 유진은 만족하지 않았다.
‘상징검술은 훨씬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시전 중에 흩날리는 장미잎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람마다 상징검술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유진의 경우 꽃과 같이 잎과 줄기, 가시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매개체를 떠올릴 수도 있고.
‘펜첼의 배신자처럼 거북이의 등껍데기를 형상화하여 공격 반사 효과 같은 걸 만들어낼 수도 있어.’
하물며 클라크의 경우는 또 다른 효과를 보일 수 있을 터.
쉽게 말해 상징검술은 ‘발전형’ 기술인 것이다.
그런 만큼 유진의 성장 가능성은 쉽사리 점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떤 걸 얻었길래 그렇게 혼자 미소를 지으시오? 같이 좀 웃으면 안 되오?”
궁귀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유진은 여전히 속으로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마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3성 수준에 버금가는 파이어 볼을 시전했어.’
지금은 줄리아를 모방하여 한 가지만 배운 상태이지만 기회만 있다면…….
유진의 머릿속으로 교지와 흑지의 전쟁에서 한순간 판도를 바꿨던 수많은 마법들이 스쳐 갔다.
유진은 줄리아를 힐긋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법을 옆에서 관찰하며 마법적 감각을 유추했고, 펜첼의 배신자를 상대하던 도중 이를 극적으로 이용했다.
그 덕에 유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능력은 줄리아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러와 더불어 마력까지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유진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광 3성에 다다랐다. 폭군과 광마 덕분이었어.’
묵광 3성은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단순한 오러의 성취가 아닌 묵광의 발전.
묵광 2성을 성취한 게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일이니 유진의 성장 속도는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3성에 다다른 묵광의 부가 효과는 예상되긴 했으나 이건 직접 시험해보면 될 일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줄리아 양을 보면서 히죽 웃는 걸 보니…….”
“헛소리하지 말고, 나중에 훈련하면서 확인해 봐.”
“호오, 뭐가 있긴 했나 보구려.”
궁귀는 턱을 매만지며 기대감이 잔뜩 실린 눈을 빛냈다.
“붉은 전갈은 어떻게 됐는지나 말해 봐.”
“추종향을 묻혀놓은 덕분에 로베르 가문의 정보조직인 금월단을 붙여놓았소. 용케 놈의 몸에 상처를 냈구려.”
“아슬아슬했다, 그땐 진짜.”
하얀 알약 안에 들어있던 것, 추종향.
당시 유진은 붉은 전갈의 암살자에게 단검을 던져 상처를 냈었다.
그런데 그 단검은 사실 단순한 투척용이 아닌 그 추종향을 묻혀놓은 단검이었고, 암살자의 몸을 베고 지나가면서 추종향이 몸속 깊숙이 스며들어 간 것이었다.
“그 추종향은 만들면서도 아리송했소. 공자가 알려준 제조법이 워낙 독특했으니까 말이오.”
“그만큼 효과가 괜찮았지?”
“물론이오. 거리에 제한이 없는 것 같았소. 지금도 밖에 나가 추종향을 맡기 위해 집중하면 놈이 있는 방향이 잡힐 정도니…… 그런 제조법은 어떻게 안 것이오?”
“그건.”
유진은 말을 아꼈다. 그 추종향은 전생의 기억을 통해 만든 희귀한 약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마를 비롯한 흑지의 몇몇 강자들을 쫓기 위해 만들어진 비약 중 하나가 해당 추종향이었다.
“또 묵비권 행사하네, 진짜.”
“모르는 게 편할 수도 있어. 그냥 묻지 마.”
“에휴.”
궁귀가 잔뜩 투덜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항상 비밀이 많고 말해주지 않는 것이 많은 유진에게 궁귀는 퍽이나 서운한 모양이었다.
“됐고, 얘는 어떻게 됐어?”
그 질문에 궁귀가 대답 대신 옆에 놓여있던 종이와 펜을 가져와 조용히 글씨를 썼다.
펜첼 모두가 줄리아는 평범한 교지의 용병이라 알고 있기에 더욱 조심하는 행동이었다.
줄리아 양의 흑지 이송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소. 지시만 내려주시오.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종이를 성냥불로 태워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당분간 조심해야 할 것 같소.”
“뭘?”
“현무 기사단 단원 중 한 명을…… 공자가 처리하셨잖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자와 줄리아 양이 사라진 시점과 그 기사단원이 사라진 시점이 일치한다는 걸 아는 것 같았소.”
“그래서 걱정돼?”
“그럴 수밖에!”
유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알아서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궁귀는 유진을 믿었지만, 상대가 펜첼이다보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으음…….”
“줄리아 양이 깨어났나 보오.”
줄리아가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
“어…… 약제사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소이다. 잘 자셨소? 몸은 괜찮으시고?”
“덕분에요. 히히.”
줄리아는 궁귀에게 살갑게 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둘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궁귀가 인상이 더러워서 그렇지, 라울러나 줄리아나 쉽게 친해지는 걸 보면 됨됨이가 괜찮단 말이지.’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간지럽구려.”
“신경 잘 써서 부탁해. 줄리아 너도 조심하고.”
이미 궁귀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줄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공자, 잠시 나오…….”
금검이었다.
유진에게 말을 건네려다, 눈에 불을 켠 궁귀와 마주친 금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펜첼까지 불법적으로 따라와서는 나의 공자랑 무슨 말을 자꾸 섞는 거요?’
‘불법적? 대륙법에 그런 법이 있소? 공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내가 더 많이 주고 있는 것 같소만.’
‘웃기는 소리! 그런 역할이야 나도 할 수 있는 거거든?’
‘해보든가! 해보든가!’
금검과 궁귀는 펜첼에서 가끔 마주치면서 종종 서로 모르는 척 눈으로 설전을 벌이곤 했다.
“크흠.”
유진이 신호를 주자 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진 공자, 에막스 교관께서 찾으시오.”
유진이 문밖으로 나서자 훈련 교관인 에막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 로베르 수련생, 가주님께서 너를 가주전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이 있으셨다. 조속히 이동하도록.”
“예.”
올 게 왔다.
금검이 에막스에게 유진의 몸 상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니 나중에 가면 안 되겠냐고 사정을 했지만.
“지금, 찾으시니, 가시오.”
에막스가 아주 냉담한 목소리로 거절하자 금검도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유진은 아직 덜 아문 어깨 쪽 상처의 통증을 무시하며 에막스를 따라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귀는 유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공자가 알아서 하겠다면, 알아서 잘하겠지…….’
* * *
가주전 문 앞에 도착한 유진과 금검, 에막스는 클라크를 마주했다.
“유진, 마지막으로 용모를 단정히 하라.”
클라크는 평소 유진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던 것과는 다르게 엄숙한 말투였다.
“예, 클라크 경.”
그에 유진도 클라크를 삼촌이라 부르지 않고 경이라 칭하며 예를 표했다.
가주전에 들르는 이 시간이 얼마나 진지한 자리인지 나타내는 셈이었다.
태연한 표정의 유진과는 다르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금검이 발을 동동 굴렀다.
“별, 별일…… 없으면 좋겠군. 후우…….”
“나는 금검이 나보다 먼저 어떻게 될 것 같다. 가만히 좀 있어.”
금검은 유진이 펜첼에 와 인스 형제를 두들겨 팼을 때도 걱정을 했었다.
그만큼 유진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은 가주님과 클라크 경의 명확한 판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잘못이 없다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예.”
에막스도 말과 표정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게끔 하고 있었지만, 말의 내용에는 유진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6개월 동안 유진을 훈련시키며 훈련생으로서 유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겪어온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내를 뒤로하고, 유진과 클라크가 가주전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고오오…….
가주전 내부는 사무치게 고요하고 어두웠으며 차가웠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고요한 분위기가 온도와 빛을 차단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가주전 맨 끝, 상단에 위치한 남자가 보인다.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고, 어떠한 기운이나 살기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로 인해 형성된 무거운 공기가 드넓은 가주전 전체를 짓눌렀다.
그 양옆에는 뮬과 시리우스가 서 있었다.
유진과 클라크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어, 제이드.
그가 인사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유진 로베르.”
“예, 가주님.”
“내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제이드는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펜첼의 훈련생 신분인 유진 로베르, 너는 현무의 기사단원을 해한 적이 있느냐?”
짙게 떨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가주전을 무겁게 울리며 유진의 귓가에 다다랐다.
한 치의 거짓이나 망설임이 담긴 대답을 한다면, 유진은 크게 벌을 받을 터였다.
유진이 대답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음성으로.
“예, 제가 죽였습니다.”
그 즉시.
파아앗!
제이드가 오른손에 농밀한 오러로 날 선 장검 하나를 구현했다.
이어 제이드가 유진에게로 장검을 곧장 쏘아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