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제이드의 대검은 유진의 목 언저리를 향해 쏜살같이 치달았다.
유진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10성 수준의 소드 마스터. 범인이라면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도 버거울 터였다.
하나, 유진은 달랐다.
쐐애액!
날아오는 대검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모든 기운을 감당해냈다.
저대로 대검을 가만히 둔다면 유진은 그대로 절명할 터였다.
물론, 이미 제이드의 대검이 그의 손을 떠난 이상 유진의 목숨은 더 이상 유진의 손에 달린 게 아니긴 했다. 대응이란 게 무의미하단 의미.
대검은, 결국.
피짓!
유진의 목근처를 얕게 베고 지나간 뒤 공중에서 흩어졌다.
조그만 핏방울이 유진의 목에서 흘러내렸다.
“호오.”
그럼에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유진을 보며 제이드가 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응했다면 넌 죽었을 것이다. 네 패기는 높게 사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네가 어찌 그리 떳떳한지는 직접 말을 들어봐야 하겠다.”
유진은 베인 상처의 통증을 무시하며 제이드를 직시했다.
“그 당시 제 판단은 오롯이 펜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워낙 당당한 태도였기에 클라크와 뮬, 시리우스도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제이드는 여전히 냉담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이어 유진이 모든 것을 꺼내놓았다.
“제가 죽인 배신자는 흑지에 있는 마탑, 그중에서도 네크로맨시 마법을 주로 쓴다는 흑마탑과 결탁했었습니다. 유적지 내에서의 연쇄 살인사건도 이와 관련이 있고요.”
“…….”
“그리고 임무 도중 제 목숨을 노렸습니다. 또한 펜첼 임무 도중 수많은 단체들과 뒤에서 금전적 거래를 해왔습니다. 이게 제가 알아낸 바였고, 그랬기에 사살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수많은 단체들과 거래를 했다는 것은 아직 유진의 손에 있는 정보가 아니었지만, 뒤를 캐다 보면 어차피 나올 것이었다.
시리우스가 놀란 눈을 뜨다 이내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게 정말인지 증명할 수 있느냐? 조금이라도 사실을 부풀리거나 다르게 말했다가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유진 로베르.”
유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무 기사단의 총 책임자인 클라크가 단원들의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시리우스가 생각했을 때 유진의 말에는 지나친 만용이 있었다.
“보고를 올리면 되는 일을 네가 굳이 직접 나선 이유가 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감히 훈련생 주제에……!”
시리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아무리 평소에 유진을 신뢰하던 클라크일지라도 유진을 마냥 옹호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유진이 아직 어떠한 근거도 내놓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라 함은, 조금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고 있을 분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알고 있을 분? 그게 누굴 말하는…….”
“다만 저는 상황이 워낙 긴박했기에 선조치를 한 후 보고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줄리아를 만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시리우스가 한마디를 더 하려 했지만, 뮬이 먼저 말을 정리했다.
“좋다. 그러면, 현무 기사단의 임무였던 글람푸스탄 연쇄 살인 사건이 흑탑의 계략이었으며 현무 단원 중 한 명이 흑탑과 거래하고 있었다는 게 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유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펜첼 역사상 처음 있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것이 혹여나 소문으로 퍼진다면, 북방에서 고고한 학처럼 절대적 위치로 존재하던 펜첼의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뮬을 비롯한 간부들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가늠을 하던 와중.
제이드가 유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사실 여부의 판단은 이 질문으로 갈라질 것 같군. 유진 로베르.”
“예.”
“어떻게 현무 단원을 단신으로 처치했지?”
제이드가 궁금한 것은 그 점이었다.
고작 훈련생 신분이며, 13살에 불과한 유진이 어떻게 6성급을 상회하는 현무 단원을 처리한 것인가?
그 엄중한 물음에 시리우스와 클라크도 유진을 미심쩍은 눈으로 응시했다.
“오히려 유진, 네가 흑탑과 거래하여 흑마법사와 힘을 합친 뒤 알 수 없는 힘을 얻어 펜첼을 배신한 것은 아니냐?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아라.”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거야 유진 스스로도 기적이었다고 판단이 들 만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마법을 이용하여 배신자의 안면에 파이어 볼을 먹였다는 사실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승리의 근거가 된 유진의 힘 일부는 보여주어야만 했다.
유진이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우선, 저는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여 약제사에게서 독약과 각성제를 대비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독과 각성제? 독과 각성제를 이용한다고 해서 현무 단원을 처치할 수 있다면 지금 펜첼의 기사단은 진즉에 멸했을……!”
“얘기를 들어보지, 시리우스.”
“……예, 알겠습니다.”
제이드가 시리우스의 말을 가로막자, 그도 별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클라크는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듯 묵묵히 서 있다.
유진은 간부들을 잠시 둘러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리우스는 여전하고, 클라크 삼촌은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야. 뮬 삼촌의 반응도 재밌네.’
유진은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이걸 보여줘야겠지.’
시리우스의 말대로 그 정도 잔기술로는 시간을 끌 수 있을지언정 기사단원을 아예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유진에게는 한 수가 더 남아있었다.
“시리우스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에 저는 한 가지를 더 준비해야 했습니다.”
시리우스의 노한 눈빛과 더불어 클라크의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유진이 좌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내며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묵광, 3성.
범상한 오러 3성 기사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수준의 연공법을 펼쳐 보인다.
그에 따라 아톰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한 속도로 움직여 단전을 뜨겁게 달구었다.
손끝과 발끝까지 뻗친 마나 회로에 하얀빛의 오러가 공급되고, 이내 유진의 오른손에 농밀한 오러 덩어리가 생겨난다.
유진은 그 오러를 검의 형태로 실체화했다.
지이잉……!
제이드의 오러 대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분명한 오러 검이 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음.”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
시리우스의 말대로 여기까지는 유진이 묵광 2성을 달성했을 때에도 보일 수 있었던 경지다.
제이드와 간부들이 납득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힘을 드러내야 했다.
바로, 상징검술이었다.
탓.
유진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단전의 오러를 더욱 농밀하고 단단하게 뭉쳤다.
펜첼의 절대자와 현무, 백호, 청룡 기사단장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차분한 마음을 가진다. 명경지수였다.
이어 유진만의 상징, ‘장미’를 마음속에 그리자…….
화아악!
유진의 등 뒤에 새빨간 잎과 푸른 가시 줄기를 뽐내는 거대한 장미가 일순 발광했다.
어두컴컴하던 가주전 전체가 오러로 구현된 장미꽃잎으로 산발하고,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쳤다.
제이드의 짧은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스쳐 흔들린다.
시리우스가 인상을 구기며 유진을 노려보았고, 클라크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유진을 응시했으며, 뮬은 유진을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했다.
뮬은 유진의 상징검술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뽐낼 것인지는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클라크는 이미 직접 본 적이 있었으니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으며.
심지어는 시리우스조차도 인정해야 했다.
13살에 상징검술을 꺼낸다는 것만으로도 유진의 오러 수준과 마음을 제어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기 때문이었다.
“거두어라.”
제이드는 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유진에게 명했다.
유진은 조용히 장미의 환영을 거두어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두었기에 제이드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지 못했지만, 간부들은 눈치챘다.
제이드의 입가에 드리운 옅은 미소를 말이다.
“유진 로베르.”
“예, 가주님.”
“왜 꽃이냐?”
상징검술은 각자가 이용하고자 하는 객체를 떠올려 그것의 특징을 활용하는 식으로 공격과 방어를 구사한다.
일반적인 경우, 자신의 상징으로 아주 강하고 드센 ‘동물’을 객체로 떠올리곤 한다.
뮬은 청룡을 떠올렸고, 시리우스는 백호를, 클라크는 현무를, 릴리안은 주작을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유진은 전설적인 신수나 포악한 맹수가 아닌 그저 식물이자 무생물인 ‘꽃’을 상징으로 삼았으니…….
“어째서 꽃, 그중에서도 장미를 네 상징으로 삼은 것이냐.”
제이드가 궁금할 법도 했다.
유진이 잠시 말을 정리하여 대답을 쭉 이었다.
“제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대륙의 1인자가 되겠다는, 야망과 같은 것이냐?”
“어떨 때는 1인자가 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제 유일만 욕망은 아닙니다. 저는…….”
유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어떤 상대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제 의견을 늘 관철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뒤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음.”
“장미는 그러합니다. 소나무처럼 사계절이 올곧지는 못할지언정, 빛날 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나지만 겨울이 되면 질 줄 아는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제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툭, 물었다.
“그 대답은 밤새 준비했느냐?”
“조금 피곤하긴 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비유적인 표현을 덜어보아라. 들을 때는 좋으나 반추하니 느끼하구나.”
“알겠습니다, 가주님.”
간부들은 이 대목에서 제각기 다른 표정을 띠었으나, 같은 것을 보았다.
제이드가 유진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장미에게 현혹된 것처럼.
유진이 속으로 심호흡을 내뱉었다.
‘후, 직접 말로 하려니 제이드 말대로 되게 느끼하군. 그래도 이제 막바지 같은데.’
제이드가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이미 배신자 녀석의 치부는 펜첼에서 수집 중이었다. 자세히 조사를 해보니 여기저기 석연치 못한 흔적들이 드러나더구나.”
제이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진에게 오러 대검을 쏘아낸 것도 일종의 시험이었던 셈.
간부급들도 그 사실은 알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나.”
제이드가 건조한 표정을 한 채 클라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책임이 있는 현무기사단장에게 6개월간 근신을 명하며, 전부 사자의 고통에 들어갈 것을 명한다.”
사자의 고통이란 펜첼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지옥훈련을 말했다.
클라크는 모든 명에 승복하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시리우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현무 기사단 전체는 근신 기간 동안 펜첼에서의 모든 지원을 받지 못한다. 유진.”
“예.”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이후에 조사를 위해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은 알아두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주님.”
“?”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간부들은 잠시 나가고, 제이드와 독대하겠다는 말이었다.
“하.”
시리우스는 당연히 유진의 요구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 잠시 자리를 내주어라.”
제이드가 이를 허하자 시리우스는 속으로 이를 갈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정말 저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나중에 내 자리마저도 노릴 수 있겠어.’
클라크도 옅은 웃음을 흘렸다.
‘또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군. 엘도라가 정말 열심히 해야겠는데.’
모두가 나간 가주전.
제이드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유진을 쳐다보았다.
가주전에서 가주와 독대하는 훈련생이라니.
적어도 자신이 가주로 있을 때 이런 녀석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유진은 흔들림 없는 또렷한 눈동자로 말했다.
“제가 구해온 용병인 줄리아는 청탑주, 즉 흑지 3대 세력 중 하나인 마탑주의 딸입니다.”
교지의 적인 흑지.
그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강하다는 마탑 사람을 구해왔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아라.”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