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유진은 제이드의 반응에 안심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이드가 분노하여 자신에게 무어라 쏘아붙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유진은 조금 더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제이드에게 의견을 직접 내보이는 것이었다.
사자의 시험 직전에도 제이드가 ‘펜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며 의견을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이드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수준이 낮은 이들의 조언도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
‘더 가감 없이 이야기해 보자.’
유진이 이야기의 초석을 깔았다.
“펜첼은 바뀌어야 합니다. 사자의 시험 전에도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한다.”
“펜첼이 교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북부의 최강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 그것은 상징적인 허울일 뿐입니다.”
“……음.”
전보다도 더욱 과감해진 유진의 발언에 심기가 거슬릴 법도 했지만, 제이드는 유진의 말을 끊지 않았다.
아니, 대륙의 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유진의 안목에 오히려 감탄한 듯 보였다.
“대륙은 교지와 흑지로 양분되어 있기에 겉으로 보기엔 비등비등한 듯이 보입니다. 실제로 서로의 전력은 정확히 가늠된 적이 없기도 하고요.”
“계속하라.”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륙은 태양신교라는 거대 집단에 의해 사실상 통일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신교가 맘만 먹는다면 이삼십 년 이내로 통일이 될 겁니다. 그저 하지 않는 것일 뿐이죠.”
제이드는 이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태양신교의 무력과 권력은 실로 막강하다.
흑지의 3대 단체.
마탑, 전사의 요람, 기록의 탑이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태양신교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그들도 결국 함몰될 것이었다.
그 정도로 태양신교는 강성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런 태양신교가 펜첼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펜첼이 태양신교에게 협조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여기에서 제이드는 조금 불편한 인상이었다.
이야기의 맥락상 유진의 말은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펜첼은…….”
뜻밖의 말이 나왔다.
“태양신교와 싸워야 합니다.”
“……!”
제이드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태양신교는 그들이 가진 힘을 바탕으로 수많은 패악을 저질러왔고, 지금은 더욱더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북부에서도 그러한 점이 보였더냐?”
“아뇨, 북부는 깨끗합니다. 그만큼 태양신교는 펜첼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미온적인 움직임을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그들의 행패가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심각합니다.”
태양신교의 패악질이라 함은?
‘교지 전체를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걷고, 이로 인해 터져 나오는 불만들을 무력으로 찍어 누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젊은 여성이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사내들을 현혹하여 태양신교의 교인으로 삼는다. 물론 그 방법은 온화해 보이지만,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 같지.’
교단 내부로 들일 때는 좋은 조건과 포상을 약속하지만, 일단 들어오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교단을 나갈 수 없는 구조였다.
불리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가족들을 볼모로 삼기도 했으며, 불법적인 최면 약물을 먹이기도 헸다.
일종의 노예 계약을 하는 셈.
이는 전생에서 유진이 태양신교에서 오랫동안 몸담으며 알아챈 사실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나쁜 일들을 직접적으로 기획하거나 종용하지는 않았었다.
‘여기까지는 제이드라면 당연히 아는 정보다. 그저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을 뿐. 이제 본론을 꺼내야 해.’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에게 물었다.
“하지만 펜첼은 그런 태양신교의 뜻을 거부하고 협조하지 않으니, 아예 등을 돌리자는 이야기군.”
“등을 돌리는 그 방법이 중요합니다.”
“이제 줄리아가 청탑주의 딸이라는 게 왜 중요한지 말해보아라.”
“우리는 흑지와 손잡아야 합니다.”
“……흠.”
유진이 단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현재 청탑주는 4대 마탑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하며, 이를 활용한다면 태양신교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줄리아가?”
“줄리아는 펜첼과 마탑을 이어줄 중요한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제이드의 표정에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그는 10성급의 소드 마스터이자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최강자.
그런 그에게도 태양신교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런데 아예 흑지와 손을 잡고 태양신교에 대항하자는 말이니,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제이드의 마음속에 확신을 심어주게끔 한 마디를 더했다.
“펜첼은, 끝까지 펜첼이어야 합니다.”
“…….”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는 과감히 칼을 들어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곳이 펜첼입니다. 상대가 설령.”
유진이 제이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거인이라 할지라도요.”
하지만 유진의 의도와는 다르게 제이드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유진, 네가 명석한 녀석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아챘다. 그에 상응하는 실력을 가진 것도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펜첼이 강성하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양의 피를 흘릴 수는 없다. 이 할애비의 마음을 이해하겠느냐?”
가주인 제이드가 자신을 일컬으며 할애비라 표현한다.
유진은 자신이 가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하며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라면 더 멀리 보실 줄 알고, 큰 희생을 원치 않으시리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네가 한 말은 모두 맞지만-”
“그렇다면 큰 희생을 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닙니까?”
태양신교에 대항한다면 누구 하나는 완전히 궤멸할 것임을 둘 다 알았다.
“펜첼에 문제점이 있다는 말이구나.”
“예,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너무 강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제이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강하다는 게 문제라니.
제이드가 어리둥절한 듯 말을 천천히 늘였다.
“아부는 아닌 것 같고, 무슨 뜻이냐.”
“펜첼은 할아버지가 없다면…… 모래성과 같습니다.”
유진은 말하면서도 제이드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청룡부터 주작 기사단까지. 쟁쟁한 기사단 여럿은 물론, 숨기고 있는 비밀 조직까지 있으니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렵겠지.’
전생에서도 제이드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펜첼의 쇠락기를 보아온 유진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펜첼은 제이드라는 초인만을 과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진도 이어진 제이드의 반응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펜첼에 속한 인재들의 가능성을 가리고 있다는 말이구나.”
여기서 유진은 확신했다.
‘제이드는 말이 통하는 양반이다.’
지금껏 봐온 모습이 있긴 했지만, 제이드의 사고는 정말로 열려있었다.
“원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욱 어두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요지는, 인재 양성에 더욱 힘쓸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제이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직전에 펜첼의 배신자가 있었다는 일만 봐도 그렇군. 하물며 놈이 훈련생에게 패배했으니.”
유진도 멋쩍은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북벽의 제이드가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다니.
유진은 펜첼이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까지도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제이드가 의외의 질문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두렵지 않았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과 같은 말들을 나에게 한다는 것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장면이 아니기도 했다.
13살짜리 아이가 세상 풍파를 겪을 대로 겪고, 인간이 아닌 무신, 초인의 수준에 이른 존재에게 감히 조언과 지적을 하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청 두려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후회했어요. 그냥 말을 줄일 걸 하고 말입니다.”
제 감정을 순순히 실토하는 유진의 모습에 제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런데 어찌 그런 부담감을 짊어지고 펜첼에 그와 같은 정보를 풀 생각을 했을꼬?”
“그건.”
“만약 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너는 그대로 역적으로 몰릴 텐데 말이다. 그게 아니면 네 아비의 가문인 로베르가의 힘을 빌린다면 펜첼이라는 딱딱한 곳을 두드릴 필요도 없지 않았겠느냐?”
“음.”
유진이 그 질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이드는 기다렸다.
유진이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유진의 대답이 더욱 궁금한 기색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후, 유진이 입을 열었다.
“펜첼은…… 제 어머니의 가문이니까요.”
제이드가 입가에 띠던 웃음기를 지웠다.
여태껏 논리로 무장했던 유진이 감성적인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자 제이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란 눈치였다.
“이것만큼은 계산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저희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삼촌들을 사랑하거든요.”
“…….”
제이드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릴리안과는 가문의 규율에 의해 사이가 멀어졌고, 그 결과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릴리안의 속마음을 이 어린아이를 통해 전달받았다.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녹는 듯 허물어졌고, 제이드는 내심 자신이 정말 가문과 규율이라는 틀에 얽매여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의 효심을 다시 보게 되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너는 날 항상 놀라게 하는구나.”
제이드는 평소 하지 않던 감정 표현을 직접 말로 꺼내놓았다.
유진이 흔들리는 제이드의 눈동자를 보았다.
‘제이드도 사람이구나.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이런 모습을 보일까.’
유진은 속내를 감추고 빙그레 웃었다.
“기쁜 놀라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마무리 짓자꾸나.”
“비밀리에 청마탑과 연락을 취해 줄리아를 안전하게 호송하고, 관계의 초석을 다지면 좋겠습니다.”
제이드가 긴 호흡을 내뱉었다.
“흠…… 아무리 네가 뛰어나고 비범한 녀석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펜첼의 훈련생 신분이다. 너를 통해 마탑과의 관계를 다지는 건 무리-”
“제가 아닌 뮬 경을 추천합니다.”
가주의 말을 끊는 무례함을 보이면서까지 유진은 확신을 드러냈다.
뮬은 펜첼 내에서도 제이드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이며, 외부에 얼굴을 알린 적도 없기에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그는 마탑과 소통하기에 가장 적절하거니와 이번 작전을 통해 뮬의 치료를 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전생의 은혜를 갚는 겸, 유진의 뜻도 관철할 수 있을 터였다.
“영악한 녀석, 이미 다 계획을 해 뒀구나.”
“생각하다 보니까요.”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지 제이드는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응시했다.
저 녀석은 도대체 어느 수까지 내다보는 것일까?
유진은 긴장이 한결 덜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자리에서 어쩌면 큰 징계를 받거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태양신교의 복수.
그것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일이었으니까.
큰 위험에는 큰 보상이 따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민해보마.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아, 반지는…….”
유진이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제이드는 손을 저었다.
“그건 네 물건이니 알아서 하거라. 비밀공간에 들어간 일이나, 미지의 인물을 만난 일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유진이 제이드의 눈치를 살피니 이게 폭군과 관계되어 있던 물건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드가 다시 엄숙한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 유진 로베르에게 명한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던 일이 다가왔다.
“펜첼의 훈련생, 유진 로베르는 3년간 오러 봉인에 처한다. 그리고 수시로 나와 대면하여 그 경과를 지켜보겠다. 너의 노력에 따라, 오러 봉인은 더 빨리 풀릴 수도 더 늦게 풀릴 수도 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이드가 유진의 손목과 발목에 하얀빛을 띠는 오러 봉인 침을 쏘았다.
피짓.
약간 따끔한 느낌과 동시에 기묘하게 답답한 느낌이 유진을 감싸고 돌았다.
정말로 오러가 봉인된 것 같았다.
유진은 어찌 되었건 사전에 협의 없이 펜첼의 기사단원을 죽였다.
그게 좋은 일이었건, 나쁜 일이었건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이드는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위치였으니, 이와 같은 처벌을 명하는 것이었다.
‘3년간 오러 봉인이라. 이게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 나눈 대화의 맥락과 분위기를 보았을 때, 제이드는 유진에게 아주 가벼운 처벌을 내릴 것 같았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끔, 대외적으로만 처벌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한 처벌 수위에 유진은 잠시 고민을 해봐야만 했다.
무언가, 다른 깊은 뜻이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 나가보아라.”
“예, 가주님.”
유진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가주전을 나섰고.
자리에 남은 제이드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범인과는 격을 달리하는 재능과 더불어 정세를 파악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
그리고 제 가족을 생각하는 인성과 효심까지.
‘차기 가주가 될 인재가 없어 고민스러웠는데, 녀석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러 봉인이 어째서 네게 가혹한 처벌이 아니라, 네게 내리는 가장 큰 선물인지 얼마나 빨리 깨달을까.’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