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저 양반은 내가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죽어도 안 오더니, 요즘 청승맞게 혼자 뭐 하는 거야?”
애초에 유진이 이 주점에 들른 이유는 인스 형제의 호위기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금검이 중얼거리는 말에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밤에도 늦게 들어올 때가 많더니 호위기사들끼리 아주 술판을 벌이고 있었구나? 응?”
“아니, 유진 공자를 위해 호위기사들과 친분을 쌓고, 그러려고 마신 거지! 음주만을 위한 음주는 아니었…… 악!”
유진이 금검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머지않아 피멍이 들 것이다.
훈련생들이 유진을 중심으로 뭉치자 자연스럽게 호위기사들도 금검을 중심으로 친목을 다졌던 것.
“금검, 너는……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
“크윽…….”
그사이 인스 형제의 호위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과 금검이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 * *
인스 형제의 호위기사는 밝은 곳은 철저히 피해 으슥한 길만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도 기척은 아주 조금씩 내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유진이 가늠해보며 계속해서 그를 따라갔다.
가만 보니 호위기사가 향하는 곳은 시리우스와 인스 형제가 머무는 저택의 뒤편에 위치한 야산이었다.
산을 조금 오르는가 싶더니, 그는 중턱에 위치한 공터 구석 자리에 멈춰 섰다.
시리우스의 저택이 우거진 나무에 묘하게 가려져 있는 곳. 산새들의 소리와 함께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
상념에 잠긴 듯, 인스 형제의 호위기사가 눈을 감고 있었다.
“뭐 하는…….”
금검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참.
호위기사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여기는 시리우스님의 눈에 닿지 않는 곳입니다. 정확히는 제인스, 아인스 공자님들과 저만 공유하는 장소지요.”
유진과 금검이 따라왔다는 걸 이미 아는 듯했다.
그제야 유진과 금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기척을 일부러 내더라니.”
“저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미심쩍은 눈빛을 머금은 금검을 뒤로하고 유진이 물었다.
“어째서 내가 최선의 수단인 거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의 물음에 호위기사가 뒤를 돌았다.
“공자님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셨던 분이 유진 공자님이니까요. 절친한 사이라면 이 일에 관심이 있으시리라 판단했습니다.”
“절친……?”
유진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 딴에는 근육 바보들에게 몇 번 조언해준 게 전부였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니.
‘하긴, 그 녀석들은 직계라는 자존심 때문에 방계들과는 어울리지도 않고, 엘도라는 워낙 냉담하게 대하니 나밖에 없었나? 라울러는 그냥 친구로 안 치는 건가.’
가만 보니 방금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도 모르는 모양이다.
유진이 모르는 척 물었다.
“제인스는 잘 있나?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방금은 연무장에 수련을 하러 가겠다고 하긴 했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응, 보긴 봤는데.”
차마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제인스를 두들겨 패고 오는 길이라고는 말하지 못한 유진이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상태가 좋지 못하더군. 친구로서 걱정이 되기도 해서 널 보러 온 거기도 하다.”
그 말에 호위기사의 눈가에 돌연 눈물이 맺혔다.
“역시…… 막역한 친구 사이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가치가 있군요…….”
“막역한 건 아닌데…… 뭐…… 그래.”
녀석은 인스 형제와 다르게 상당히 감상적이었다.
생각을 해보면 저런 성격이라 인스 형제의 악동 짓을 받아주고 호위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본론을 얘기해 보지. 나한테 말하고 싶었던 게 뭐지?”
“우리 공자님들을 도와주십시오!”
호위기사는 흐르던 눈물을 닦더니 이번에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일단 무릎은 꿇지 말고, 그게 뭔지부터 들어봐야-”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공자뿐입니다! 글람푸스탄 사건을 해결하고, 가주님과도 독대했던 유진 공자님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뭐냐고!”
호위기사가 유진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잔뜩 빛냈다.
“저도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인스 공자님들이 대략…… 5, 6개월 전부터 눈에 띄게 난폭한 모습을 가끔 보이곤 했다는 것뿐입니다.”
“훈련할 때는 딱히 그런 느낌 못 받았는데?”
“그건…….”
유진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번득였다.
‘6개월 전이라면, 사자의 시험이 있던 때다. 그렇다면.’
“간헐적인가, 혹시?”
“그, 그렇습니다. 매사에 그런 게 아니라…….”
“주로 늦은 밤에 그런 난폭한 행동을 하고?”
“예! 맞습니다! 초창기에는 괜찮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밤에는 간헐적으로 악몽을 꾸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등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급격히 나빠진 때는?”
“공자님이 글람푸스탄에 간 사이 급격하게 나빠지셨고요.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난 모양새입니다.”
유진은 어렴풋이 짚이는 게 있었는지 추가로 질문을 했다. 정보가 좀 더 있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말해 봐. 일상적인 거라도 좋으니까.”
이러한 일은 원래 유진의 주특기였다.
‘사소한 거라도 결정적인 정보가 되기 마련이니까.’
사방에 흩어진 정보를 모아 진실을 찾는 것. 이건 유진이 태양신교에서 작전을 세우면서 제일 잘하는 분야였다.
특히 상대방의 약점과 목적을 찾는 데에서 말이다.
“일상적인 거라면…… 식탐이 늘었다는 겁니다. 원래부터 밥을 많이 먹고, 단백질에 대한 집착이 있었지만 요즘은 특히 더 심해졌어요.”
“식탐 증가, 그리고 또?”
“감정적이게 됐습니다. 뭔가 작은 일이 있더라도 화를 곧잘 내거나, 조금만 슬프더라도 눈물을 보이곤 했습니다. 말했다시피 특히 늦은 밤에 그러더군요.”
유진이 확증편향을 버리기 위해서 반대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거야 뭔가,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우울한 사람이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지 않나? 훈련이 지나치게 힘들면 사람은 종종 변하기도 한다. 특히 확고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강박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호위기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 두 공자님께서는 시리우스 경을 무서워했기에 집무실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근 6개월간 방문 횟수가 매우 잦아졌습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달에 1번이 넘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점이긴 했다.
하나, 이는 호위기사가 결정적인 단서라고 짚긴 했어도 무조건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아니었다.
이 또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으니까. 원래 아버지라면 자식을 보고픈 마음이 있을 것 아닌가?
훈련이 힘드니 제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랬기에 유진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노력했다.
“일단 그건 알겠다. 아주 사소한 걸 말해 봐. 아예, 지금 일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일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일이요……?”
시리우스와 이 일이 관련이 있다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일 수 없었기에 유진은 재차 물었다.
“음…… 어릴 적에만 가지고 있던 애착 인형을 찾는다거나, 갑자기 식기를 집어 던지거나, 요즘 유난히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거나…….”
“잠깐, 식기를 집어 던진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어떨 때는 밥을 먹기 위해 음식에 달려들어 먹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식기를 집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내팽개쳐버리고 손으로 음식을 드실 때가 있었습니다.”
유진은 여기서 직감했다.
“혹시 주말에 그랬던가?”
“주말……? 음, 네, 네! 그랬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주말 아침 식사였어요.”
유진이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주말에는 은으로 만든 식기를 쓴다는 건 알고 있지?”
“그렇…… 어, 어? 그렇다면.”
펜첼에서는 주말에 양식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라는 의미로 금식기가 아닌 은식기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유진의 머릿속에 모든 게 퍼즐처럼 맞아떨어졌다.
“폭력성, 식탐, 한밤중에 경련, 그리고 결정적으로 은식기에 대한 공포.”
모든 증상을 결합한다면 도출되는 한 가지 결과가 있었다.
‘흑룡의 피를 먹인 거구나.’
흑룡의 피.
유진이 아는 흑룡의 피가 가진 특성이 이 모든 것들에 해당되었다.
흑룡의 피를 먹이는 행위는 태양신교가 적군의 고위급 포로를 조종하는 데에 쓰던 방법이기도 했다.
그것을 먹게 되면 단기간에 강력한 성장을 이루게 해주지만, 과도한 사용은 섭취자의 인성과 절제력을 망가뜨리고 사고를 흐리게 만든다.
강하고 말 잘 듣는 인형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일정 수준을 넘어선 기사들은 흑룡의 피에 저항할 오러가 있으니 주기적으로 피를 먹이고 폭력성을 잠재우는 약물을 먹이기도 했지.’
상대적으로 강한 기사들은 흑룡의 피에 저항할 오러가 있기에 일종의 도핑 효과를 주기도 했다.
‘시리우스가 자신의 지위 상승을 꾀하려 인스 형제에게 피를 먹여 무위를 상승시킨 것일 터,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방법을 택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자신의 득을 위해 자식들까지 희생시키는 자가 시리우스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물론 전생의 시리우스에 대한 정보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런데 흑룡의 피를 이용한 연구가 펜첼에서 먼저 있었다니……. 그렇다면 태양신교는 어떻게 한 거지? 북부까지 영향력 아래에 뒀을 때 펜첼에게서 정보를 빼내서 개량한 건가?’
의심이 확장되고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흑룡의 피에 대한 부작용을 모두에게 밝혀야 한다. 일이 커질 수도 있겠는데.’
시리우스라면 인스 형제에게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이득에 관계되는 다른 이에게도 흑룡의 피를 먹였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겠어. 뮬 삼촌에게.’
거기까지 추측을 마친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우리는 여기서 할 얘기가 마저 있으니 먼저 가보도록 해.”
“유진 공자님…….”
호위기사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힌 채로 유진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부탁드립니다. 우리 바보 같은 인스 공자님들…… 이대로 미쳐가는 게 아닐까 싶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알겠으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아유, 알겠다니까요. 이 양반아.”
호위기사는 옆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금검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금검, 자네도 꼭 좀 도와주게나. 내 나중에 크게 한턱 쏠 테니…….”
금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자네 집안이 거덜 날 수도 있겠어.”
“상관없네. 그러니.”
“알겠네. 내 힘 좀 써보지.”
유진의 시선을 느낀 금검은 헛기침을 흘렸고, 호위기사는 자리를 비켰다.
유진이 금검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뮬 삼촌과의 일정을 잡도록 해.”
“다 계획이 있으신 거 맞소? 뮬 경은 현재 몸도 허약하신 데다가, 최근에 징계를 받은 공자와 만남을 꺼릴 수도 있는데…….”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한테 뮬 삼촌은 안 그럴 거야.”
‘뮬 삼촌, 이번에는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금검.”
“왜 그러시오?”
“이번에는 봐줬는데, 중간에 술집으로 새면 너 진짜 알아서 해.”
“……쳇.”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